성인 자료실

구분 성인명     축일 신분 지역명 검색
프란치스코 살레시오(1.24)

프란치스코 살레시오(1.24)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인쇄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Francis de Sales)
축일 1월 24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설립자, 교회학자
활동지역 제네바(Geneva)
활동연도 1567-1622년
같은이름 방지거, 살레시우스,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코 드 살, 프란치스쿠스, 프랑수아 드 살, 프랜시스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생애 (1) 지옥에서라도 당신을 사랑하렵니다
이전글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생애 (2)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다음글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서거 400주년 기념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2-08-16 조회수321 추천수0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생애 (1) 지옥에서라도 당신을 사랑하렵니다

 

 

지난호 기획 기사에 이어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생애 중 특별히 우리 살레시오 가족이 기억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측면을 총 4회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그 첫 번째는 소년 살레시오의 학령기와 위기를 통한 성장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소년은 모자를 들어 올려 부모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다. 사춘기를 앞둔 소년의 뺨에 붉은빛이 돌아 잘생긴 얼굴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 주며 웃어 보였지만 소년의 눈가도 젖어 있었다. 어머니 프랑수아즈 드 시오나는 아들의 뺨을 어루만지며 흐느꼈다. 나이 열넷에 어렵게 얻은 아들은 이미 여섯 살 때부터 부모의 곁을 떠나 기숙학교에서 살았다. 라 로슈의 기숙학교는 살레시오 성에서 가까웠기에 주말이면 아버지가 그를 집으로 데려오곤 했다. 그러나 파리는 마차로도 한 달은 걸리는 먼 곳이다. ‘혹시 아프기라도 한다면….’ 소년 살레시오의 어머니는 걱정과 불안을 뒤로한 채 성모님께 아들을 의탁하였다.

 

한편 아버지 프랑수아 후작은 아들의 인사에 언제나처럼 고개만 끄덕였다. 마흔다섯에 얻은 늦둥이는 그에게도 너무나 귀한 아들이었다. 하지만 반백을 넘긴 자기에게 남은 날들을 생각하면 열한 살의 아들을 유학 보내는 일이 너무 이른 결정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모든 이에게 사랑받는 총명한 프란치스코라면 유학을 통해 크게 성공할 것이기에 안심하고 자신의 가문을 물려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청년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위기

 

파리에서의 9년은 빈틈없이 흘러갔다. 살레시오는 클레르몽 기숙학교에서 고전어와 수사학, 철학 등을 배웠다. 그는 무엇보다 신학에 재미를 느꼈는데,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그의 신심을 비춰 주었기 때문이다. 수업이 없는 날은 승마나 펜싱, 춤과 같은 귀족에게 필요한 교양수업으로 채워졌다. 살레시오는 자신의 한가한 시간만큼은 기도와 신심업에 매진하고 싶었으나 개인 교사 신부는 그가 귀족으로서의 의무에 충실하길 원했다. 그는 지도자에게 순명했으며 덕분에 또래보다 건장하지는 않았어도 운동을 즐길 줄 아는 건전하고 신앙심 깊은 청년으로 성장해 갔다.

 

유학이 끝나갈 무렵, 살레시오의 영혼을 송두리째 흔드는 어둔 밤이 찾아들었다. 당시 파리에는 위험한 신학적 논쟁이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곳곳에서 구원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이곤 했다. 무엇보다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인간은 운명을 거스를 수 없고 하느님이 정한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예정설의 가르침에 감화된 이들은 구원에 대해 부정적인 주장을 퍼뜨리기 일쑤였다. 이 사상은 프란치스코를 포함한 많은 신앙인에게 악영향을 줬는데, 천국이나 지옥의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다고 믿는 이들은 자신이 지옥에 갈까 두려워 절망하곤 했기 때문이다. 특히 겸손하며 신심 깊은 살레시오는 자신이 멸망할 것이라 확신하여 고통과 슬픔, 우울감에 시달렸다. 그러나 하느님을 찾는 이들에게 있어 영혼의 어둔 밤은 시련인 동시에 고독함 속에서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성장의 시간이었다. 살레시오는 이 정화의 시기를 통해 더 깊은 겸손과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낙관주의 정신의 태동

 

1587년 1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성지순례를 떠난다. 그는 기적의 성모상으로 알려진 검은 성모상이 모셔진 성당에 들어가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다. 예정설의 시련으로 오랜 번민에 빠져 있던 그는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며 기도하던 중 다음과 같이 간청한다.

 

“주님, 만일 당신께서 저를 지옥에 보내기로 정하셨다면 저는 당신의 뜻에 순순히 따르겠나이다. 그러나 주님, 제가 비록 지옥에 있을지라도 항상 당신을 사랑하기를 청하오니 허락해 주소서!”

 

청년 살레시오는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1요한 4,8)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또한 하느님의 사랑의 손길임이 틀림없다고 확신하기에 이른다. 그 순간 오랜 혼란과 어두움이 가시고 평화가 찾아왔으며, 그의 마음 또한 맑게 빛나는 고향 안시(Annecy)의 호수처럼 잔잔해졌다. 크나큰 희열에 가득 차 성모님 앞에 무릎 꿇은 열아홉의 청년 살레시오는 스스로를 하느님께 봉헌하며 정결서원을 바치기에 이른다. 이날의 사건 이후 살레시오는 이전과 같은 혼란을 다시는 겪지 않게 된다. 살레시오 성인은 이 시기에 겪은 영적 위기와 어둔 밤의 체험을 통해 기쁨에 찬 믿음으로 온갖 유혹과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훗날 이 체험은 낙관주의라고 하는 하나의 위대한 사상으로 꽃피어나 영혼의 목자로서 수많은 어린양을 돌보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의 중요한 사목적 지향이 된다.

 

성지순례를 통해 삶의 방향성을 전환한 청년 살레시오는 고향으로 돌아가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금 유학길에 오른다. 당시 명성을 떨치던 파도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며 법률가가 되기 위해서였다. 학업에 열중하던 살레시오는 지적 성장뿐 아니라 영혼의 성장을 위해서 영적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파리에서부터 종종 고해성사를 청했던 예수회의 포세비노 신부에게 지속적인 영적 지도를 청한다. 영적 지도자의 동반으로 그의 신앙과 영성은 한층 더 깊어졌으며, 마음 또한 온유하며 따뜻한 인격자로 성장하였다.

 

 

영예로운 귀향

 

거룩함을 추구하던 그 시대의 많은 이들처럼 젊은 날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역시 엄격하게 고행과 극기를 지키며 살았다. 심지어 1590년 12월의 대림 시기에 행한 고행은 그 정도가 지나친 나머지 건강을 잃게 했다. 1591년 1월 15일, 살레시오는 병세가 심해져 포세비노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기에 이르는데, 죽음의 문턱에서 자신의 시신을 해부학 수업에 사용해 달라는 유언까지 남긴다. 그러나 그는 죽음 앞에서도 자비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혹시라도 건강이 회복된다면 감사의 표시로 로레토 성지를 순례하겠노라고 맹세한 살레시오는 얼마 지나지 않아 건강을 되찾는다. 학업에 복귀한 그는 교회법과 민법 두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최우수 학생의 영예 속에 졸업한다. 사부아의 고향 땅으로 향하기 전, 살레시오는 먼 길을 여행하여 로레토 성지에 들러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훌륭하게 학업을 마친 아들이 고향으로 돌아오자 크게 기뻐한 아버지는 가족의 재산관리를 그에게 일임했다. 또한 살레시오는 사부아 공국의 수도 샹베리의 의회 변호사로 등록되었다. 그는 1592년,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나이 24세 때였다.

 

* 이 글의 핵심 줄거리는 살레시오 성인의 전기 축약본 『아무것도 요구하지 말고 아무것도 거절하지 말라』의 내용을 인용하였습니다.

 

[살레시오 가족, 2022년 5월호(174호), 장승필 신부(살레시오회)]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Total 0 ]
등록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