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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살레시오(1.24)

프란치스코 살레시오(1.24)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인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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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Francis de Sales)
축일 1월 24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설립자, 교회학자
활동지역 제네바(Geneva)
활동연도 1567-1622년
같은이름 방지거, 살레시우스,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코 드 살, 프란치스쿠스, 프랑수아 드 살, 프랜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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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생애 (2)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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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2-08-16 조회수194 추천수0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생애 (2)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어려움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변호사가 되어 금의환향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제로 서품받는다. 오늘은 젊은 사제 프란치스코가 시련 속에서도 인내와 용기의 여정을 통해 진정한 사도로 성장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주교님, 제가 가겠습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목소리에 제네바 교구 사제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새 사제인 그가 샤블레 선교를 간다는 것은 무리라고 중얼거렸고, 수석 사제인 프란치스코를 시샘하는 이들은 그가 영웅 놀이를 하다가 결국 그곳 개신교도들에게 죽임을 당할 게 뻔하다고 비아냥거렸다. 고민하던 프란치스코의 사촌 루이 드 살 신부가 용기 내어 일어섰다. 이로써 두 명의 자원자가 선교사로 선발되었다.

 

처음부터 교구장 그라니에 주교도 프란치스코를 적임자로 여겼다. 문제는 프란치스코의 부친이었다. 아버지의 반대를 겨우 누그러뜨리고 가문을 이을 장남을 데려다가 신부로 서품시켜 놓은 것이 불과 몇 개월 전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들을 개신교도들의 소굴로 보낸다니…. 예상대로 아버지 프랑수아 후작은 아들을 순교자로 만들지 않겠노라며 항의했다. 결국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의 동의나 재정적 지원 없이 최소한의 것들만 가지고 루이 신부와 길을 떠났다. 두 사람의 행색은 마치 예수님의 명에 따라 둘씩 파견되는 제자들의 여정을 떠올리게 했다. 샤블레는 울창한 숲과 험한 계곡, 폭설, 굶주린 늑대의 습격 등 걸어 다니기에 적당한 곳이 아니었다. 그들은 말도 없이 도보로 그 험난한 행로를 이동했다.

 


목숨 건 선교와 그 결실

 

샤블레에는 오직 여덟 가구의 가톨릭 가정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그곳의 성 히폴리투스 대성당은 이미 위그노파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다. 두 사제는 개신교 예배 후 강론을 하였다. 몇몇 농부들이 남아 그들의 강론을 들으려 하자 칼뱅주의자들이 달려들어 농부들을 위협하여 해산시키고 말았다. 당시 개신교 신자들은 가톨릭 선교사들에게 심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만일 귀족 신분이 아니었다면 그들도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죽음의 위협을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정성 들여 직접 설교문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몇몇이 그가 쓴 글을 다시금 손으로 옮겨 적으며 도왔다. 그는 이 글을 공공장소에 게시했고 심지어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의 집집마다 문틈 아래로 슬그머니 집어넣기도 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인내롭게 가톨릭 신앙을 전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노력은 놀라운 결실을 가져왔다. 프란치스코가 샤블레에 머무는 동안 2300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개신교 신앙을 포기하고 가톨릭 신앙으로 개종하였다.

 

 

제네바의 보좌주교로 임명

 

연로한 나이의 그라니에 주교는 자신의 교구를 맡길 후임을 찾고 있었고, 그 적임자로서 오랫동안 수석 사제인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를 주목해 왔다. 어느 날 주교는 그를 불러 보좌주교로 임명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겸손한 프란치스코는 단호히 거절했다. 결국 주교는 프란치스코의 고해 사제인 피에르 신부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피에르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전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였다. 하느님께서 진정 무엇을 원하시는지 스스로 깊이 성찰해 보라는 것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이에 동의하고, 식별을 위해 자신이 세례를 받았던 고향 토랑스 마을 성당을 찾아 기도했다. 얼마 후 이 젊은 사제는 그의 영적 지도자에게 말했다. “주교님이 원하시면 보좌주교직을 수락하겠지만, 제 유일한 소원은 모든 일에 있어서 하느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로마에서 그를 주교로 임명하기 위한 심사가 이뤄졌다. 프란치스코는 철저한 검증을 통과했으며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교황은 프란치스코를 불러 따뜻하게 안아주며 말하였다. “아들아, 너의 샘과 네가 가진 모든 것으로부터 물을 퍼내어라. 모든 사람이 그 물을 마시게 하고, 그 물을 여기저기 나누어 주어라.” 이리하여 1593년 12월 18일에 사제로 서품받았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불과 5년만인 1599년 3월 24일, 교황 클레멘스 8세에 의해 제네바의 보좌주교로 임명되었다. 이어 3년 후인 1602년 9월 중순에 그라니에 주교가 서거하자 그는 같은 해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에 제네바 교구의 교구장으로 착좌하였다.

 

 

겸손하고 충실한 주님의 종

 

교구장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주교좌가 있는 제네바로 돌아가길 원했으나 실제로는 안시에서 지냈다. 1603년 9월 사부아 공작 샤를 에마뉘엘이 무모한 공격을 감행하여 제네바 함락에 실패하였고, 이 일로 교황 역시 제네바에 대한 권한을 포기하자 프란치스코는 제네바행을 영원히 포기하게 된다. 그런 시대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프란치스코는 교구장으로서 많은 일을 이뤄 낸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교구장 임기 첫 5년 동안 대부분 산악 지대에 있던 교구 내 450여 개의 관할 본당을 모두 방문했다. 그는 교구장 주교임에도 복음적 청빈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대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했기에 마차를 소유하지 않고 지냈다. 때문에 사목 방문 중 그는 도보로 이동하거나 손수 말을 타고 다녔다. 또한 대접받는 것을 꺼려해 남는 방이 없는 본당에서는 침대 없이 바닥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그는 이곳저곳을 다니며 설교하고 성찬례를 거행했다. 또한 방문 내내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했으며, 때론 잘못을 교정하고 그릇된 신앙을 척결하였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가 교구장 주교로 파견된 시기의 제네바 교구는 개신교가 득세하던 지역이었다. 특히 이 지역은 칼뱅주의를 따르며 개신교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불리던 왈도파가 득세하던 지역이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칼뱅 교도들의 끊임없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교구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데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주교 문장(文章) 속 라틴어 모토는 다음과 같았다. “그는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NON EXCIDET).” 그의 각오대로 여정은 험난했으나, 그는 성령의 도움 아래 용기 있게 주교직을 완수했다.

 

* 이 글의 핵심 줄거리는 살레시오 성인의 전기 축약본, 『아무것도 요구하지 말고 아무것도 거절하지 말라』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살레시오 가족, 2022년 7월호(175호), 장승필 신부(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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