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자료실

구분 성인명     축일 신분 지역명 검색
이성례 마리아(5.29)

이성례 마리아(5.29)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인쇄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이성례 마리아 (李聖禮 Mary)
축일 5월 29일
성인구분 복녀
신분 양반, 부인,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01-1840년
같은이름 메리, 미르얌, 미리암, 이 마리아, 이마리아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기해박해 순교자의 삶과 신앙: 이성례 마리아와 이 에메렌시아의 활동과 순교 영성
이전글 성 김대건 신부,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 인물로 선정
다음글 명화와 만나는 성인 이야기: 성 안드레아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11-20 조회수177 추천수0

수원교구 기해박해 순교자의 삶과 신앙 (26) 이성례 마리아와 이 에메렌시아의 활동과 순교 영성

 

 

이성례(1802~1840년) 마리아는 충청도 홍주 출신이다. 18세 때인 1819년에 최경환과 혼배성사를 거행하여 1821년 장남 최양업 토마스 사제를 낳은 것을 비롯하여 모두 6명의 아들을 낳았다. 한글을 배우지 못했으나 기억력이 좋아서 구전으로 교리를 배웠고 체포될 당시 치근덕거리는 포졸을 따끔하게 꾸짖고 단호하게 물리칠 정도로 당찬 여성이었다. 함께 체포된 수리산의 거의 모든 교우들이 배교하고 나갔으나 이성례는 쉽게 굴복하지 않고 어린 자식들과 함께 옥에 갇힌 채로 신앙을 증거했으며, 8월 5일 남편의 장살(옥사) 소식을 전해 듣고는 옥중에서 발상(發喪, 머리를 풀고 슬피 울어서 초상난 것을 알림)했다. 그러나 수 개월간의 굶주림으로 젖먹이 스테파노가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상황을 보고는 나머지 아이들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그만 배교를 하고 옥을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장남 최양업을 외국에 보낸 일로 인해서 다시 중죄인으로 분류되어 형조로 이감되었다. 이성례는 1840년 1월 31일 서울 당고개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 에메렌시아(1801~1839년)는 충청도 예산 출신으로 외교인 집안으로 시집을 간 후, 친정 오라버니로부터 천주교를 배워서 굳게 믿었다. 이에 그녀의 남편은 심한 구타와 실외에서 옷을 벗기고 매달아 망신을 주는 등의 온갖 모욕과 폭언을 했다. 이 에메렌시아는 사지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모든 것을 인내하고 온화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남편을 설득하고 시부모에게 효성을 다하여 이웃과 친지들을 감동시켰다. 이에 남편도 아내의 마음에 녹아들어 입교를 결심하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서 어느 깊은 산속으로 이사갔다. 그러나 남편이 병자성사를 받고 이내 병사하자 이 에메렌시아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친정 오빠들이 있는 수리산 교우촌으로 가서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이 에메렌시아는 수리산 교우들과 함께 1839년 7월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갔으나 모진 고문과 심한 매질에도 흔들림없이 꿋꿋이 신앙을 지켰다. 살이 썪어서 벌레가 생겨났고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체력은 완전히 소진되었다. 그녀가 참혹한 형상으로 고통받자 교우들이 위로해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어찌 제 힘만으로 감당하겠습니까?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라며 순교의 의지를 더욱 굳혔고, “큰 고통은 큰 행복을 낳습니다.”라면서 기꺼이 십자가의 무게를 감당하고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다. 이 에메렌시아는 마지막 형벌을 받고 39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2019년 11월 17일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수원주보 4면, 원재연 하상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Total 0 ]
등록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