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파울리누스(또는 바울리노)는 300년경 프랑스 남서부 아키텐(Aquitaine)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푸아티에(Poitiers)의 주교좌성당 신학원에서 교육을 받고 트리어의 성 막시미노(Maximinus, 5월 29일)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성 막시미노에게 사제품을 받고 346년경 스승을 계승하여 트리어의 주교가 되었다. 335년 알렉산드리아의 성 아타나시오(Athanasius, 5월 2일) 주교가 아리우스주의(Arianismus)를 지지하던 멜레티우스(Meletius) 이단과 맞서다가 독일 남서부 트리어로 1차 유배를 왔을 때, 당시 사제였던 성 바울리노는 그의 최고 지지자가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트리어의 주교가 된 후에도 아리우스파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성 바울리노는 로마(Roma)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아리우스 이단에 맞서 싸웠다.
아리우스주의자인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337~361년 재위)가 350년 동로마와 서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된 후 353년에 아를(Arles)에서 그리고 355년에 밀라노(Milano)에서 교회 회의를 개최하였다. 여기서 황제는 성 아타나시오를 단죄하는 초안에 주교들의 서명을 강요하며, 이에 응하지 않는 주교를 추방하겠다는 칙서를 발표했다. 성 바울리노는 아를 지역 공의회에서 성 아타나시오를 비난하는데 참여하기를 거부한 유일한 주교였다. 그로 인해 성 바울리노는 오늘날 튀르키예에 속한 프리기아(Phrygia, 고대 소아시아 중서부 지역)로 추방당했다. 그는 유배지에서 5년 동안 극심한 고통을 겪은 후 358년 8월 31일 선종하였다. 그는 비록 자연사했지만 정통 교리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추방과 유배의 고통을 마다하지 않았기에 신앙의 증거자이자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의 유해는 4세기 말에 트리어의 성 펠릭스(Felix, 3월 26일) 주교가 트리어로 모셔와 그의 이름으로 봉헌된 성 바울리노 성당 묘지에 안장하였다. 가톨릭교회와 동방교회 모두에서 성인으로 공경받는 그의 죽음에 대해 옛 “로마 순교록”과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모두 8월 31일 목록에서 순교로 기록하였다. 즉, 트리어의 주교로서 아리우스파 황제인 콘스탄티우스가 소집한 아를 교회 회의에서 성 아타나시오를 비난하거나 올바른 신앙을 포기하라는 그 어떤 위협이나 유혹에도 굴복하지 않고 프리기아로 추방되어 유배지에서 5년을 보내고 주님으로부터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고 적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아타나시오는 성 바울리노를 ‘참으로 사도적인 사람’이라 했고, 성 예로니모(Hieronymus, 9월 30일)는 그를 ‘신앙을 위해 고통을 즐겨 받은 사람’이라고 격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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