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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 새남터 순교성지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최초의 선교사가 목을 떨군 곳
지번주소 서울시 용산구 이촌 2동 199-1 
도로주소 서울시 용산구 이촌로 80-8
전화번호 (02)716-1791
팩스번호 (02)716-1794
홈페이지 http://www.saenamteo.or.kr
전자메일 saenamteo@saenamteo.or.kr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1752-1801년)
 
1752년 중국 강남의 소주부 곤산현에서 태어난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모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다가 스스로 천주교 신앙을 진리라고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후 북경교구 신학교에 입학하여 제1회 졸업생으로 사제품을 받았다.

당시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그는 신앙심이 깊은 데다가 조선 사람과 닮은 주 야고보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고, 성무 집행에 필요한 모든 권한을 부여하였다.

주 야고보 신부는 1794년 2월에 북경을 떠나 약속된 장소로 가서 조선 교회의 밀사인 지황 사바와 박 요한을 만났다. 그러나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려야만 했기 때문에 요동 일대에서 사목을 하다가 약속된 날짜에 다시 국경 마을로 가서 조선의 밀사들을 만났다. 그런 다음 조선 사람으로 변장하고 그해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밤에 조선에 입국하였다.

한양에 도착한 주 야고보 신부는 계동(현, 서울 종로구 계동 지역)에 있는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 머물면서 한글을 배웠으며, 1795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는 신자들과 함께 처음으로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그의 입국 사실이 탄로 나자, 그는 부랴부랴 여회장 강완숙 골롬바의 집으로 피신해야만 하였다. 반면에 주 야고보 신부의 입국을 도운 밀사 윤유일 바오로와 지황 사바, 그리고 집주인 최인길 마티아 등은 그날로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다가 모두 순교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주 야고보 신부는 아주 비밀리에, 그러나 열심히 성무를 집행하였다. 이곳저곳으로 다니면서 성사를 베풀었으며, 신자들의 교리 공부와 전교 활동을 위해 명도회를 조직하였고, 교리서도 집필하였다. 이처럼 그가 활동한 지 6년이 지나면서 조선 교회의 신자수는 모두 1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가 모든 것을 앗아 가고 말았다.

박해가 일어나자 연이어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주 야고보 신부의 행방을 자백하도록 강요를 받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이때 주 야고보 신부는 자기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귀국을 결심하였다가, ‘나의 양 떼와 운명을 같이하여 순교함으로써, 모든 불행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수를 결심하였다.

1801년 4월 24일(음력 3월 12일), 주 야고보 신부는 스스로 박해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내 재판이 열리고 문초가 시작되었으나, 그는 형벌 가운데서도 침착한 자세를 잃지 않고, 모든 질문에 신중하고 지혜롭게 대답하였다.

“제가 월경죄(越境罪, 몰래 국경을 넘나드는 죄)를 두려워하지 않고 지황을 따라 조선에 온 것은, 오로지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 예수님의 학문은 사악한 것이 아닙니다. …… 남에게나 나라에 해를 끼치는 일은 십계에서 엄금하는 바이므로, 절대로 교회 일을 밀고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박해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말을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주 야고보 신부에게 군문효수형(軍門梟首形, 죄인의 목을 베어 군문에 매어 달던 형벌)을 선고하였고, 이에 따라 신부는 형장으로 정해진 한강 근처의 새남터로 끌려갔다. 그곳에 도착한 뒤, 주 야고보 신부는 자신의 사형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고 나서 조용히 머리를 숙여 칼날을 받으니, 그때가 1801년 5월 31일(음력 4월 1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순교할 당시 다음과 같은 기이한 현상이 있었다고 전한다.

“하늘이 본디 청명하였는데, 홀연히 어두운 구름이 가득 차고 갑자기 광풍이 일어, 돌이 날리고 소나기가 쏟아져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형 집행이 끝나자 바람과 비가 곧바로 그치고, 하늘의 해가 다시 빛났으며, 영롱한 무지개와 상서로운 구름이 멀리 하늘 끝에서 떠서 서북쪽으로 흩어져 버렸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주문모 야고보 신부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1796-1839년)
 
성 로랑 조제프 마리위스 앵베르(Laurent Joseph Marius Imbert) 주교의 세례명은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또는 라우렌시오)이며, 한국 이름은 범세형(范世亨)이다. 그는 1796년 3월 23일 프랑스 남부 엑스(Aix) 교구의 마리냔(Marignane) 본당 관할 브리카르(Bricart)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앵베르가 태어난 지 몇 달 후에 카브리에(Cabries)의 라보리(Labori)로 이사하였고, 앵베르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집안은 가난하였지만 그 자신은 총명할뿐더러 기도나 공부에도 열심이었다. 어려서부터 스스로 묵주 만드는 법을 배워 공부를 하는 한편, 나이 많은 부친의 생활에도 보탬을 주었다고 한다.
 
그가 마음속에 동방의 포교지방에 대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엑스의 대신학교를 다니면서부터였다. 그래서 그는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로 옮겨가 공부한 후, 1819년 12월 18일에 성품성사를 받고 곧 중국의 사천(四川)으로 파견되었다. 앵베르 신부는 12년 이상 사천에 머물렀다. 그는 중국의 언어와 풍습을 익혔으며, 모든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던 중 1836년에 조선의 제1대 교구장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주교가 사망하자 곧 주교품을 받고 조선의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 해 12월 17일 중국 대륙을 건너 몽고의 서만자(西灣子)에 머물고 있던 그는 마침 조선 사신의 수행원으로 동행한 교우 조신철, 정하상 등의 협력을 얻어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이렇게 하여 조선의 교우들은 처음으로 주교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실로 조선 교회가 설립된 지 53년만의 일이었다.
 
3개월 동안 조선말을 배운 앵베르 주교는 고백을 듣고서 성사를 줄 수가 있었다. 그는 이미 조선에 와 있던 모방(Man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와 함께 지방을 순회하기도 하고,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외교인 어린이에게 세례를 주는 운동도 전개하였다. 이때부터 조선 교회는 오랜 재난을 겪은 후 주교를 맞으면서 재생하기 시작하였다. 앵베르 주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스러운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항상 허약하고 병든 몸으로 매우 바쁜 생활을 하였지만, 한편으로 그것을 최대의 행복으로 삼고 있었다. 다만 그에게 무한히 괴로운 것은 박해로 말미암아 신입교우들의 신앙이 끊임없이 위협을 당한다는 사실이었다.
 
드디어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었다. 곳곳에서 교우들이 체포되자 앵베르 주교는 박해가 퍼지기 전보다 더 많은 교우에게 성사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여, 교우들이 모여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리지 않고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러는 동안 사태는 점점 위태롭게 되어갔고, 배교자들의 자백으로 3명의 선교사들이 조선에 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배교자 김여상은 관헌들과 짜고 주교를 유인하려고 하였으며, 주교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스스로 자수의 길을 택하고, 다른 두 신부들도 주교의 권고를 받아들여 즉시 관청에 자수하도록 하였다. 포청의 옥중에서 세 선교사는 서로 만날 수 있었다. 주교는 여러 번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으며 두 신부들과 함께 옥중의 고초를 이겨냈다. 조선 정부는 그들이 절대로 배교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마침내 대역 죄인이라는 죄목으로 군문효수에 처하도록 판결을 내리고, 처형 장소는 한강변의 새남터로 결정하였다.
 
사형을 집행하는 날이 되자 세 선교사들은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가마를 타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형장에 이르자 군사들은 선교사들의 옷을 벗긴 다음 손을 앞가슴으로 결박하고, 겨드랑이에 긴 몽둥이를 꿰고, 화살로 귀를 뚫고, 얼굴에 회를 뿌린 다음 군중의 조롱과 욕설을 듣게 하였다. 그런 다음에 한 군사가 장대 위에 기를 올리고 또 다른 군사는 사형 선고문을 읽고 나서 수형자들을 무릎 꿇린 다음 열 명 가량의 병정이 달려들어 칼질을 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성직자들을 3년 만에 잃게 되었다. 앵베르 주교는 1839년 9월 21일에 순교하였으며, 그의 나이는 43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모방 베드로 신부(1803-1839년)
 
성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 신부의 한국 성은 나(羅)씨이고, 이름은 세례명인 베드로(Petrus)를 한문으로 음차하여 백다록(伯多祿)이라 하였다. 1803년 9월 20일 프랑스 칼바도스(Calvados) 지방의 바시(Vassy)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세계의 끝까지 가서 우상 숭배자들에게 포교를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1829년 5월 13일 사제로 서품된 그는 선교사의 꿈을 꽃피우기 위하여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중국 사천(四川) 교구로 파견되었다. 포교지로 가던 도중에 그는 조선의 초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주교와 동행하기를 희망하였다. 주교는 그의 경건함과 열성적인 면을 생각하여 기꺼이 조선의 선교사로 받아들였다.
 
주교가 조선 입국을 목전에 두고 만주에서 선종하자, 그는 당시 주교를 영접하기 위하여 그곳에 와 있던 조선의 교우 5명을 만나 조선에 입국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천신만고 끝에 의주 변문을 통과하여 입국에 성공하였다. 이때가 1836년 1월 12일로 그는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서양 선교사가 되었다.
 
조선에 입국한 후 모방 신부는 조선어를 배우는 한편 우선 한문으로 성사를 주기 시작하였고, 서울에서 시작하여 다음에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열여섯 곳 내지 열일곱 곳의 교우촌을 돌며 포교를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 해 12월까지는 어른 2백 13명에게 세례를 주고, 6백 명 이상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 또 가는 곳마다 회장들을 뽑아 주일과 축일에 교우들을 모으고, 그 모임에서 공동으로 기도를 드리고 교리문답과 복음 성경과 성인전기들을 읽고 배우도록 지도하기도 하였다.
 
모방 신부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큰 관심을 두어 최양업 토마스(Thomas), 최방제 프란치스코(Franciscus),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 등 세 소년을 택하여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에게 필요한 덕행을 가르치는 한편, 당시의 상황 하에서 조선 내에서의 교육이 불가능했기에 1836년 12월 2일에는 이들을 ‘마카오’로 보내어 정식으로 신학을 배우도록 하였다.
 
이듬해 1월 15일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모방 신부는 곧 양평 지방으로 내려가 전교하는 동시에 조선어를 다시 배워 조선어로 성사를 주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미 몸이 쇠약해져 있었고, 그래서 결국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 포교를 하던 중 열병에 걸려 서울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상태가 절망적이었기 때문에 샤스탕 신부로부터 병자성사까지 받았으나 3개월 후에 겨우 회복되었다. 1837년 말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자, 1839년까지의 선교사들의 활동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기해년에 이르러 조정에서는 다시 천주교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선교사들도 그 대상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앵베르 주교의 권유로 자수하여 홍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를 당하여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1803-1839년)
 
성 쟈크 오노레 샤스탕(Jacques Honore Chastan) 신부의 한국 성은 정(鄭)씨이고, 이름은 본명인 야고보를 한문으로 음차하여 아각백(牙各伯)이라 하였다. 그는 1803년 10월 7일 프랑스 디뉴(Digne) 인근에 있는 마르쿠(Marcoux)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양떼 지키는 일로 부친을 도왔다. 그는 1823년에 신학교에 들어가 3년 만에 성품성사를 받고, 이듬해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교육을 받고 프랑스를 출발하였으나, 얼마동안 중국에 입국하지 못하고 말레이 반도의 페낭 신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하던 중, 브뤼기에르(Bruguiere) 주교가 조선 대목구의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파견된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동행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마카오’를 거쳐 중국 본토를 여행하는 동안에 그는 조선에 입국하여 있던 모방(Manbant, 羅) 신부로부터 입국의 안내를 적은 편지를 받았다. 1836년 말 조선의 교우 정하상, 조신철, 이광렬 등의 안내를 받아 변문을 통과한 후, “나는 천주의 영광을 위하고 사람들의 구원과 특히 나의 구원을 위하여 일을 할 것이므로 어떤 일이라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나는 기회가 오면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통을 감수할 힘을 주님께 기대합니다.” 하며 자신의 기쁨을 토로했다. 상복 차림을 하고 15일 동안을 걸어서 서울에 도착한 샤스탕 신부는 모방 신부를 만나 자신들의 봉헌과 희생의 각오를 새롭게 하였다.
 
샤스탕 신부는 서울에 머물면서 조선어의 초보를 배우기 시작하고, 2개월가량 성찰규식을 외운 다음 조선말로 백 명가량의 신자들에게 첫 고해성사를 줄 수 있었다. 그 후 샤스탕 신부는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성무집행을 계속하였다. 그동안 샤스탕 신부는 모방 신부와 함께 열심히 노력한 결과 1837년 한 해에 영세자 1천 2백 37명, 고해자 2천 78명, 영성체한 사람이 1천 9백 50명이라는 숫자를 기록하였다.
 
이윽고 기해년에 이르러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었다. 샤스탕 신부는 되도록이면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면서 맡은 바 업무를 수행하던 중, 1839년 기해박해로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체포되고 이어 자수를 권고하는 주교의 편지를 은신처에서 받았다. 앵베르 주교의 권고를 따라 그는 모방 신부와 함께 9월 6일 관청에 자수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9월 21일 성 마태오(Matthaeus) 축일에 새남터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샤스탕 신부의 나이는 35세였다.
 
샤스탕 신부와 다른 두 선교사들의 시체는 20여 일 동안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다가, 신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노고산에 안장되었다. 그 후 그들의 유해는 1843년에 발굴되어 삼성산에 안장되었다가 시복 수속이 진행된 1901년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로 옮겨졌고, 같은 해에 다시 명동 성당 지하묘지로 옮겨졌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1821-1846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는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 마을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대건의 아명은 재복(再福)이고 이름은 지식(芝植)이라고 하는데, 그의 집안은 열심한 구교 집안이다. 김대건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Pius)와 아버지는 순교로써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다. 신앙 깊은 순교자의 집안에서 성장한 김대건은 굳센 기질과 열심한 신덕으로 충실히 생활하던 중, 16세 때인 1836년에 모방 신부에 의해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가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 프란치스코는 병사하였으므로, 남은 두 신학생만이 훌륭히 학업과 성덕을 닦았으나 나이가 25세에 이르지 못하여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 무렵 파리 외방 선교회가 조선 교구를 담당하여 주교와 신부를 조선에 입국시켜 전교하고 있는 중이었으나, 조선이 외국과 수호조약을 맺지 않아 종교자유가 없었음으로 프랑스 루이 필립 왕이 파견한 함대의 세실 제독이 그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나섰다. 김대건은 세실 제독의 통역관이 되어 조선이 들어갈 메스트르 이 신부와 함께 에리곤 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세실 제독이 갑자기 조선 항해를 중지하게 되어 김대건은 혼자 육로로 본국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변문에 이르러 조선 사절단의 일원인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본국 소식을 자세히 듣게 되었는데, 성직자를 비롯하여 아버지와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입국을 서둘러 그해 12월 29일 혼자 의주 변문을 거쳐 입국하였으나 중도에서 본색이 탄로날 위험이 생겨 다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김대건은 백가점(白家店)과 소팔가자(小八家子)에 머물며 메스트르 신부로부터 신학을 배우고,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 고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다시 입국을 시도하여 고 주교와 함께 변문으로 왔으나 김 부제 혼자만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1845년 4월 주교와 신부를 맞이하기 위하여 상해에 갔다가 그 해 8월 17일 그곳의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 고 주교 집전으로 사제품을 받아 조선교회의 첫 사제가 되었다. 이어 8월 24일 상해에서 30리 떨어진 횡당(橫堂) 신학교 성당에서 다블뤼 안 신부의 보좌를 받으며 첫 미사를 집전하였다.
 
같은 달 31일 고 주교와 다블뤼 안 신부를 모시고 라파엘호라 명명한 작은 목선을 타고 상해를 출발하여 1845년 10월 12일에 충청도 나바위라는 조그마한 교우촌에 상륙하였다. 김 신부는 선교활동에 힘쓰는 한편 만주에서 기다리는 메스트르 이 신부를 입국시키려고 애썼으나, 의주 방면의 경비가 엄해서 고 주교는 바닷길을 알아보라고 지시함으로, 백령도 부근으로 갔다가 순위도에서 1846년 6월 5일 밤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김 신부가 황해 감사 김정집의 심문에서 자신은 조선에서 출생하여 마카오에서 공부했음을 토로하자 황해도 감사는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이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하여 중신회의를 열고 서울 포청으로 압송케 하였다. 일부 대신들은 김 신부의 박학한 지식과 외국어 실력에 탄복하여 배교시켜 나라의 일꾼으로 쓰자고 하는 의견도 있고 해서 배교를 강요했으나, 김 신부는 도리어 관리들을 교화시키려고 하자 사학의 괴수라는 죄목을 붙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는 사제생활 1년 1개월만인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 김 신부의 나이는 26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현석문(玄錫文) 가롤로(1797-1846년)
 
성 현석문 카롤루스(Carolus, 또는 가롤로)는 1801년에 순교한 현계흠 베드로(Petrus)의 아들이고, 기해박해 때에 순교한 현경련 베네딕타는 그의 누님이며, 서울의 중인 계급 출신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 김 테레사(Teresia)와 아들 은석이도 기해박해 때 순교하였다. 그의 생애는 한마디로 선교사와 교우들을 위한 삶이었다. 주문모 신부의 순교 이후 조선 땅에 성직자가 한 명도 없을 때, 그는 유진길, 정하상 및 조신철 등과 의논하여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였다.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를 영입하기 위하여 중국에도 다녀왔고, 샤스탕(Chastan, 鄭) 신부의 복사로서 항상 수행하던 중에 기해박해가 일어났다.
 
이때 그는 자수하려고 하였으나, 선교사들이 만류하며 오히려 살아남은 신자들을 돌보아 주는 것이 좋겠으니 숨어 다니며 세심한 주의로써 포졸들의 손에 잡히지 않게 하라고 권하자 이를 따랐다. 앵베르 범 주교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조선교회를 현 카롤루스에게 맡겼다. 그래서 그는 주교의 뜻에 어긋남이 없도록 임무를 다하기 위해 이재영이라고 하는 가명을 사용하고 다니면서, 새 신자들을 격려하고 권면하는 한편 각지로 돌아다니며 얻은 것으로 가난한 이를 도와주고, 흩어진 신자들을 모아 포졸들의 수색이 거의 없는 마을로 인도하는 등 동분서주하며 맡은 바 직책을 성의껏 수행하였다.
 
또 앵베르 주교가 수집했던 “기해일기”를 다른 동료들과 함께 보완하여 순교자의 전기를 완성하였다. 또 신자를 북경에 보내어 선교사들과 연락을 맺어 보려고 애썼으며,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부제 때에 여러 가지 위험을 무릅쓰고 상해로 길을 떠났을 때에도 함께 수행하였다. 서울로 돌아와서 김 신부가 거처하던 석전동의 집을 자기 명의로 등기하였는데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행위였다. 김 신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그 집을 버리고 다른 집을 사들여 전교자금과 성물들을 사포서동의 새 집으로 옮겼다.
 
이렇게 한지 며칠 뒤에 포졸들이 그를 잡으려고 전에 살던 집을 습격하였지만 헛수고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사할 때에 현 카롤루스를 도와주고 그 후에도 2, 3명의 신자들을 새집으로 안내한 일이 있었던 짐꾼들이 사실대로 고발하여 곧 포교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때 그곳에 와 있던 김임이 테레사, 이간난 아가타, 정철염 카타리나(Catharina), 우술임 수산나 등도 함께 붙잡히게 되었는데, 이때가 1846년 7월 15일이었다. 이리하여 현 카롤루스는 중대한 반역 죄인으로 군문효수를 선고받아 9월 19일 새남터에서 49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1814-1866년)
 
성 시메온 프랑수아 베르뇌(Simeon Francois Berneux) 주교의 한국명은 장경일(張敬一)이다. 그는 1814년 5월 14일 프랑스 르망(Le Mans) 교구의 샤토 뒤 루아르(Chaeau-du-Loir)에서 평범한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장간 일을 하던 부친의 신앙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으나, 모친은 신앙심이 깊은 부인으로서 모든 사랑을 쏟아 아들을 가르쳤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고 또 신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본당 신부가 학교에 보내어 공부하던 중, 1831년에 르망 교구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여 1837년 5월 30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어 그는 신학교에서 교수생활과 지도신부의 역할을 담당하던 중 외국 선교사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837년 7월 15일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이어서 그는 두 명의 젊은 사제와 함께 1840년 6월 26일 필리핀의 ‘마닐라’에 도착하였다. 그는 1841년 1월 16일 ‘통킹’(Ton King, 현 북베트남)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는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으나, 1843년 3월 프랑스 함대 사령관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같은 해 8월 23일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그 해 10월경에 그가 만주 주교로 물망에 오르게 되자, 그는 중국어 공부를 하면서 그 후 10여 년간 모든 열성을 다해 전교 임무를 완수하면서 현명하게 교구를 이끌어 갔다. 그러나 1849년에 요동 지역에 박해가 일어나자 상해로 피신했다가 만주로 다시 돌아왔다. 1854년 8월 5일 교황 비오 9세(Pius IX)는 그를 조선 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Ferreol, 高) 주교의 후임으로 제4대 조선 교구장에 임명함과 동시에 조선 입국을 명령하였다. 이에 그는 두 신부와 함께 두 달 동안 숨어서 조선 입국을 준비하던 중, 다행히 조선의 교우 홍봉주의 안내로 상복을 입고 미투리를 신은 후 중국을 출발하여 4일 만에 서울에 당도하였다.
 
그는 입국하자마자 상복을 입고 경기도 지방의 60여 개 공소를 돌아보았다. 1년 후인 1857년 한국 최조의 성직자 회의를 열어서 기도서의 개편과 직무를 분담하였으며, 11년 간 한국에서 선교하였던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의 부주교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이 성직자 회의의 결과로 그는 1857년 8월에 “장 주교 윤시 제우서”(張 主敎 輪示 諸友書)라는 사목 서한을 발표하면서, 그 당시 한국 교회가 내외적으로 직면했던 여러 가지 법규와 제도 등의 문제들을 규명하면서 한국 교회의 입장을 과시했다. 또한 배론에 신학생을 양성하기 위한 신학당을 세웠으며, 교회서적이나 출판물을 저술, 정리하여 대량으로 출판하였다. 그래서 교세가 날로 확장되었고 교우 수도 증가하였다.
 
1864년 국경 북쪽에 러시아 상선이 나타나서 통상을 요구하자 대원군은 베르뇌 주교에게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를 물리치겠다는 제의를 해왔다. 그러나 러시아가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이 사건이 해결되자, 대원군은 태도를 바꾸어 쇄국정책을 강행하면서 1866년 초에 병인년 대박해를 일으켜 그동안 활약했던 성직자들과 신자들 수천 명을 한꺼번에 학살하였다.
 
1866년 2월 23일 다섯 명의 포졸들이 주교 댁을 급습하여 베르뇌 주교를 체포한 후 포도청으로 끌고 갔다. 같은 달 27일 대원군과 형조 재판관들은 베르뇌 주교를 끌어내어 갖은 신문을 다하면서 발목과 무릎을 조여 주리를 틀고, 나무걸상 형틀 뒤로 두 팔을 제쳐 매어 놓고서는 큰 곤장대로 매질을 가했다. 이즈음에 도리(Dorie, 金) 신부와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 그리고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신부도 체포되어 의금부에 갇히게 되었다.
 
이윽고 1866년 3월 6일 베르뇌 주교 일행은 참수형을 선고받고, 다음날 서로 머리를 맞대고 묶인 채 감옥에서 끌려나와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향하였다. 이때 장 주교는 “우리가 한국에서 죽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고!” 하면서 기뻐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이들 얼굴에는 희색이 넘쳐흘렀다. 사형장은 한강의 새남터 강변이었는데, 이미 3천 명의 군졸들이 천막을 쳐놓고 죄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교사들이 도착하자 둘씩 무릎을 꿇게 하고 양쪽 귀를 화살로 내리 꿴 다음, 이들 얼굴에 백회를 뿌림으로써 모든 처형 준비를 다 갖추었다.
 
사형집행 선언문의 낭독이 끝나자 여섯 명의 희광이가 날뛰고 소리를 지르며 돌다가 베르뇌 주교의 목을 칼로 내리쳤다. 베르뇌 주교의 목이 두 번째로 내려친 칼날에 땅에 떨어지니, 한 병졸이 그 머리를 포도대장 앞에 갖다 보인 다음 높이 군문효수로 매달았다. 이때 순교한 선교사들의 시체는 3일 후 교우들이 와서 그곳 부근인 왜고개에 정성껏 장례를 지내고 모셨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도리 헨리코 신부(1839-1866년)
 
성 피에르 앙리 도리(Pierre Henri Dorie) 신부의 세례명은 베드로(Petrus)이고, 한국 성은 김(金)이다. 그는 1839년 9월 23일 프랑스 뤼송(Lucon) 교구 내에 있는 생 틸레르 드 탈몽(Saint Hilaire de Talmont)의 한 농가에서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염전과 농사일을 하는 가난한 부부였다. 이들 부부는 가난했으나 신심이 깊었고 또 평화스럽게 가정을 꾸며갔으므로 도리는 건전하고도 행복한 가정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곳의 보좌신부가 그에게 관심을 두어 부모의 승낙을 얻어 도리를 신학교에 입학시키려고 추천하였다. 그래서 그는 소신학교에서 8년간 수학한 후 1860년 뤼송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1862년 8월 23일에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그의 건강 상태를 알고 있던 부모나 본당신부는 이를 극구 말렸다. 그러나 그는 “어머님! 외국 선교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저에게 있어 진실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8년 동안이나 이 소명에 대하여 제 맘속에서 생각해 왔었습니다. 하느님이 저의 마음속에 말씀하셨으니, 저는 그분께 순명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여 승낙을 받고, 1864년 5월 21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6월 15일 조선의 선교 신부로 결정되었다. 그래서 그는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신부,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 위앵(Huin, 閔) 신부와 함께 1864년 7월 15일 파리(Paris)를 출발하여 마르세유(Marseille)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홍콩, 요동, 백령도를 거쳐 충청도 내포 지방에 도착하였다. 이때가 1865년 5월 27일이었다.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경기도 용인 손골(孫谷里)에서 한국말을 배우면서 그곳 교우들과 함께 지냈다. 마침 1866년 2월 병인년 대박해의 소식과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의 체포 소식을 들은 지 며칠 후 그 자신도 체포되고 말았다. 포졸들은 ‘하우고개’에 있던 볼리외 신부를 체포하고, 같은 날 산등성이 하나 너머에 있던 도리 신부를 체포해서 서울로 압송하였다. 이렇게 해서 의금부 옥에서 도리 신부는 베르뇌 주교와 다른 동료 신부들을 만났다.
 
3월 5일 문초에서 관리들이 본국에 송환하겠다고 하자 그는 “이 나라에 머무는 동안 말을 배웠으니, 죽었으면 죽었지 돌아가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결국 베르뇌 주교와 같은 날 사형선고를 받고, 역시 같은 날 베르뇌 주교와 여러 동료 신부들과 함께 사형 집행일인 3월 7일 의금부 옥에서 새남터 형장으로 끌려갔다. 목격했던 한 교우의 증언에 의하면 “도리 신부는 눈을 내리뜨고 참된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 순교자로서의 당당함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도리 신부는 이날 순교자들 중에서 맨 마지막으로 처형되었는데, 두 번째 내리치는 칼날 아래 순교의 영광을 천상 제단에 바쳤다. 그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의 시신 역시 다른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 현재 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신부(1838-1866)
 
성 시몽 마리 앙트완 쥐스트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Simon Marie Antoine Just Ranfer de Bretenieres) 신부의 세례명은 유스투스(또는 유스토)요, 한국 성은 백(白)이다. 그는 1838년 2월 28일 프랑스 디종(Dijon) 교구 관할인 샬롱쉬르손(Chalon-sur-Saone)에서 브르트니에르 남작과 안나(Anna de Montcoy)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형이 이미 8년 반 전에 사망한 터였으므로 태어나자마자 장남이 되었다. 그의 부모는 매우 신심 깊은 어른이었기에 자녀들의 신앙생활을 늘 뒷바라지하였다.
 
그러던 중 1859년에 브르트니에르는 파리(Paris)에 있는 성 쉴피스(Sulpice)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후 1861년 7월 25일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로 편입하였다. 그는 1864년 5월 21일 성품성사를 받았고, 첫 미사를 지낼 때에 순교의 특은을 기도하였다고 한다. 1864년 장상이 조선 선교를 명하자 그는 “이 나라가 바로 내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곳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 위앵(Huin, 閔) 신부, 도리(Dorie, 金) 신부 등과 함께 본국을 떠나 홍콩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조선 입국을 위해 상해, 요동 등을 거쳐 많은 고난을 겪은 끝에 충청도 내포 지방에 상륙하여 마침내 1865년 5월 27일 조선 땅을 밟았다. 그들이 서울에 있는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와 연락할 방도를 찾던 중, 마침 다블뤼(Daveluy, 安敦伊) 부주교의 집에 화재가 나서 바로 그곳 내포 지방에 피신해 있었기 때문에, 다블뤼 부주교의 안내로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베르뇌 주교를 대면한 후 정의배 회장 집에 거처를 정하였다. 그는 한국말을 배우며 베르뇌 주교를 도와서 밤을 이용하여 전교활동을 막 시작하여 80명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40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런데 1866년 2월경 뜻하지 않은 대박해가 일어났다. 2월 23일에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자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곧 지방에 있는 모든 동료 성직자들에게 이 놀라운 박해 소식을 인편을 통해 알리고, 24일에는 그도 체포될 각오를 하고 신발을 신은 채로 마지막 미사를 올렸으며, 25일에는 정의배 회장이 체포되었고, 27일에는 이선이의 고발과 안내로 브르트니에르 신부도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결박을 당하지 않은 채 순순히 포도청으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옥사장에게 “나는 조선 사람인 여러분들의 영혼을 구해주려고 나왔으므로 주님을 위해 기꺼이 죽겠소.”라고 하여 베르뇌 주교가 갇힌 의금부로 이송되었다.
 
대원군은 브르트니에르 신부에게 별로 문초나 심문을 하지 않은 채 그냥 형벌을 가하게 하였다. 3월 5일 문초에서 관리들은 그에게 “차마 죽일 수 없어 본국에 돌려보내 주려는데 어떠한가?”라고 하자 그는 “이 나라에 와서 해를 넘겼습니다. 이 나라 풍습에 익어 이곳에서 여생을 즐기려 하는데 어찌 돌아갈 마음이 있겠습니까? 생사에 구애를 받아 변심하지 않으렵니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하였다.
 
드디어 그는 베르뇌 주교와 같은 날인 1866년 3월 6일 사형선고를 받고, 이튿날 7일에 사형 집행 장소인 새남터로 향하였다. 그리고 새남터에 도착하여 귀에 화살을 꽂고, 조리 돌리는 등의 형벌을 받으면서 사형절차를 기다리는 중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심한 갈증 때문에 물을 청하니 동정심 많은 한 병졸이 물을 주려고 하였다. 그때 다른 병졸 하나가 “곧 죽여야 할 죄인에게 물을 주어서 무엇 하겠는가?” 하면서 그 물을 땅바닥에 쏟아버렸다.
 
끝으로 그는 베르뇌 주교와 마지막 대화를 나눈 다음 베르뇌 주교의 참수 광경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런 후 드디어 그의 차례가 되어 네다섯 번 내리친 칼날에 참수되어, 그가 어릴 때부터 갈망해오던 순교자들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이때가 1866년 3월 7일이고,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1840-1866년)
 
성 베르나르 루이 볼리외(Bernard Louis Beaulieu) 신부의 세례명은 베르나르두스(Bernardus, 또는 베르나르도)이고, 한국명은 서몰례(徐沒禮)이다. 그는 1840년 10월 8일 프랑스 보르도(Bordeaux) 교구의 랑공(Langon)에서 베르나르와 마리 데지레(Marie Desiree)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부친은 결혼 5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모친은 아들을 낳자 성모님께 봉헌하였다. 그는 여섯 살 되던 해에 공민학교에 들어갔고, 일곱 살부터 복사를 하였으며, 아홉 살이 되던 1849년 10월에 고향의 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해에 그는 중국 사천(四川)에서 전교한 경험이 있는 한 선교사 신부로부터 중국의 사정을 듣고는 동양 전교에 대한 열망을 품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857년에 보르도 대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이듬해에 모친을 여읜 후 전교를 향한 그의 마음은 더욱 열렬해졌다. 그러나 그는 교회법상의 연령 미달로 사제 서품을 받지 못하였으며, 보르도 교구의 교구장인 대주교는 누구든지 교구를 떠나지 않도록 종용하고 있다가 뜻밖으로 그에게 전교를 위한 출국의 허락해 주었다. 그래서 그는 곧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1864년 5월 21일에는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같은 해 6월 15일에 조선의 전교 신부로 임명되었다. 1864년 7월 15일에 프랑스 파리(Paris)를 출발한 볼리외 신부는 도리(Dorie, 金) 신부,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신부, 위앵(Huin, 閔) 신부와 함께 1865년 5월 27일 조선의 내포 지방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미 조선에 입국하여 있던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와 조전 교우들의 환영을 받았다.
 
같은 해 6월 그는 경기도 광주 지방에 있는 뫼논리(현 경기도 성남시 운중동의 山畓里)라는 교우촌에서 본격적인 사목활동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그는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장제철이라는 교우 집에서 조선말을 열심히 공부했다. “이토록 잘 전교할 수 있는 지방에 오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라고 행복하게 말했으며, 고해성사를 들을 정도로 한국말에도 능숙해졌다. 이때 배교자인 이선이가 뫼논리에 볼리외 신부가 살고 있다고 실토하였기 때문에 그는 장제철의 집을 떠나 광주 산답리 이 요셉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 후 베르뇌 주교가 볼리외 신부의 조선말 실력과 열심함을 감안하여 충청도 지방으로 그의 임지를 정해 주려고 하던 참에, 그는 임지에 가보기도 전에 처음에 기거했던 집 주인 장제철과 이선이의 밀고로 포졸들에게 발각되어 마침내 1866년 2월 27일에 도리 신부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 다음날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에 바로 연행된 후 곧바로 심문을 받았다. 이리하여 볼리외 신부는 마침내 베르뇌 주교와 도리 신부 그리고 브르트니에르 신부 등 동료들과 함께 새남터의 형장에서 희광이의 세 번째의 칼을 맞고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이때가 1866년 3월 7일이었고,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이상 가톨릭 성인사전]
 
 
프티니콜라 신부(1828-1866년)
 
순교자 프티니콜라(Michel Alexandre Petitnicolas)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로 한국성(韓國姓)은 박(朴)이다. 1828년 8월 21일 프랑스 생 디에(Saint-Die) 교구의 코앵시(Coinches)에서 출생. 샤텔 쉬르 모젤의 소신학교를 거쳐 생 디에 교구의 대신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1850년 1월 20일, 차부제(次副祭)로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했으나 그해 10월 병 때문에 외방전교회를 나와 1852년 생 디에 교구 소속으로 사제 서품을 받고 라블린 본당 보좌신부로 1년 동안 사목하였다. 그러나 1853년 6월 다시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인도, 홍콩 등지에서 포교하다가 1856년 3월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 푸르티에(Pourtie, 申) 신부와 함께 한국에 입국, 충청도지방에서 사목하였고 1862년부터는 배론신학교의 교수로 재직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로 신학교 교장 푸르티에 신부와 함께 배론에서 체포되어 이 해 3월 1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당하여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대성당으로 옮겨졌다.
 
 
푸르티에 신부(1830-1866년)
 
순교자 푸르티에(Jean Antoine Pourthie)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로 한국명은 신요안(申妖案)이다. 1830년 12월 20일 프랑스 알비(Albi) 교구의 ‘발랑스 앙 알비즈와(Valence en Albigeois) 지방에서 출생. 1854년 6월 11일 알비 교구 소속으로 사제서품을 받고 즉시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1855년 중국 귀주(貴州) 지방의 선교사로 파견되었으나 포교지가 한국으로 변경되어 1856년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와 함께 상해(上海)를 거쳐 해로(海路)로 한국에 잠입, 충청도 배론[舟論]의 성 요셉신학교 교장으로 한국인 신학생 양성을 위해 일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신학교 교수 프티니콜라 신부, 신학교 주임 장주기(張周基, 요셉)와 함께 체포되어 그해 3월 1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로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출처 : 이상 한국가톨릭대사전]
 
 
성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1845-1866)
 
성 우세영 알렉시우스(Alexius, 또는 알렉시오)는 세필이라고 불렸는데, 황해도 서홍 땅에서 대대로 선비생활을 하던 양반집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난 그는 16세가 되던 해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그는 우연히 만난 김 요한이라는 전교회장을 통해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삶의 의의와 보람을 느끼게 되어 천주교에 입교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벼슬길을 외면한 채 집을 나와 몇몇 예비신자들과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찾아갔다. 그를 만나본 베르뇌 주교는 그의 학식과 신앙과 열성은 대견스러우나 아직 나이가 어리고 주위 환경이 너무 어려워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 선뜻 세례를 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간청하였고, 결국 그는 정의배 마르코(Marcus) 회장의 인도를 받아 알렉시우스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즉시 집으로 돌아갔다.
 
막상 집으로 돌아와 보니 천대가 대단할 뿐 아니가 수개월 동안 계속되는 저주와 악담까지 참아 받아야만 했고, 마침내 남의 구설수에 오르기가 두렵고 부끄럽다는 이유로 그를 감금하기까지 하였지만, 그는 모든 것을 양순함과 인내로써 잘 이겨냈다. 그 후 그는 “차라리 네가 집에 없으면 죽은 것으로 여겨 위안이 될지 모른다.”는 부친의 말을 듣고, 집을 떠난 서울의 정 마르코 회장 집에 일 년 동안 머물며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집안 식구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면서 한편으로는 교리서 번역과 십이단 편찬에 전력하였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아버지도 아들이 믿는 천주교에 관심을 보였으므로, 그가 차근차근 천주교 진리를 설명해 드린 결과 온 가족들과 이웃 등 20여명이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가 있었고, 정부에 대한 고발 소동이 일어나자 하는 수없이 모든 가산을 버리고 평안도 논재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 후 1866년 정초에 알렉시우스는 정 마르코 회장을 찾아가 세배를 하였는데, 포졸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그와 정 회장을 잡아갔다. 처음 심문과 고문은 잘 참아 받았으나, 두 번째에는 위협에 못 이겨 배교하였다. 그러나 곧 참회와 식음을 전폐하는 극기를 통해 마음을 다시 굳히고 포도청으로 나아가 옥중에 있는 베르뇌 주교에게 지난 일들을 사죄받았다. 이윽고 그는 평온한 마음을 되찾고 용덕을 더욱 발휘하여 모든 고문을 잘 참아 견디었으며, 혹심한 곤장과 많은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 신앙을 용감하게 고수하여 기다리던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 이윽고 우 알렉시우스는 1866년 3월 1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고, 이때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정의배(丁義培) 마르코(1795-1866년)
 
성 정의배 마르코(Marcus)는 서울 창동의 어느 양반집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천성이 어질고 진실하며 행동이 신중하였다. 그러나 그의 집은 유학을 숭상하였기에 오로지 사서오경을 외우며 과거공부에만 전념하였다. 과거 공부를 마친 후 서울의 어느 서당에서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며 살다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자식도 없이 홀로 생활하였다.
 
1839년에 그는 우연한 기회에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와 모방(Manbant, 羅),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순교하는 모습을 새남터에서 보게 되었다. 이역만리 낯선 땅에 와서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를 전하며 모욕과 멸시와 학대를 달게 받고 있으니 그들은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바라고, 누구를 사랑하는 것인가? 자기들을 죽이려고 날뛰며 악의에 찬 조소를 퍼붓는데 오히려 웃는 낯으로 불쌍히 여기지 않는가? 이처럼 그의 의문은 끝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천주교 서적을 구해 읽기 시작하였고, 자기가 닦아온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제껏 나는 천주교 신자가 되면 착한 일을 할 수 없는 자로 보았었지만, 이제 알고 보니 진정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천주교 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영세 입교하여 조선 교회의 훌륭한 일꾼이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1845년에 입국한 페레올(Ferreol, 高) 주교는 그를 전교회장으로 임명하였는데, 죽는 날까지 모든 열성과 신심을 다해 임무를 수행했기에 ‘산 성인’이라 할 정도로 신자들을 잘 이끌고, 예비자들을 잘 준비시키며, 병자들을 방문하고, 먹을 것조차 없어 고생하면서도 버려진 고아들을 데려다가 도와주기도 하였다. 그의 생활은 매우 검소하였는데 그에게 값진 옷이라곤 한 벌도 없었고, 군데군데 깁고 또 기운 헌 옷을 입었고, 조금 들다가 그만 밥상을 물리곤 하였다. 그는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신부를 자기 집에 모셔 들여 조선말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는 자주 “순교한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로다. 반면 자기 집에 앉아 안일하게 죽는 것은 진정 두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1866년 2월 25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처음에는 감옥에 갇혔으나 의금부로 넘겨졌고, 3월 5일에는 사형선고가 내려졌고, 같은 달 11일에 처형되었다. 사형 길에 나선 정 회장은 눈을 내리 뜨고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이윽고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가 1866년 3월 11일로 바로 그의 72회 생일날이었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이상 가톨릭 성인사전, 그림출처 : 새남터 성지 홈페이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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