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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 솔뫼 성지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탄생지
지번주소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108 
도로주소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솔뫼로 132
전화번호 (041)362-5021
팩스번호 (041)362-5524
홈페이지 http://solmoe.or.kr
전자메일 solmoe1821@hanmail.net
문화정보 사적 제529호(김대건 신부 생가 유적)
솔뫼에서 탄생하거나 관련된 천주교 순교자 및 성인
 
솔뫼에서 태어나시거나 사신 분들 중에 순교가 확실한 분들은 김진후(증조부), 한현(종조부), 제준(아버지), 데레사(한현의 딸), 손연욱(데레사의 남편), 제항(종조부 희현의 아들), 제교(종증조부 귀조의 손자), 김대건 신부님, 진식, 근식(숙부 제철의 아들들), 조씨(종조부 희현의 손자며느리) 등 11분이고, 그밖에도 순교하신 것으로 추정되는 분은 김택현(할아버지), 희현(막내 작은 할아버지), 선식(막내 작은 아버지 제철의 아들) 등 3분입니다. 이렇게 김 신부님의 가문은 시조 66世(중조 16世)부터 69世(중조 19世)까지 4대에 걸쳐 순교하셨습니다. 이 분들 중 현재까지 성인품에 오르신 분은 김제준(이냐시오)과 김 데레사, 그리고 김대건 신부님 등 세 분입니다.
 
 
성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1796-1839년)
 
성 김제준 이냐시오는 1814년에 순교한 김진후 비오(Pius)의 손자이며, 1846년에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부친이다. 그는 이미 여러 차례의 박해로 시련을 당한 서민의 집에서 태어나 충청도 면천 솔뫼라는 산골에서 살았다. 그 후 내포의 솔뫼로 거처를 옮겨 새살림을 시작하고, 아내 우르술라와의 사이에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1846년에 참수를 당한 최초의 조선인 신부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이다. 신심이 두터웠고 매사에 성실했던 그는 만사를 주님의 섭리에 맡긴다는 자세로 살았기 때문에, 아들이 전교 신부들에게 선택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에도, 온 가족이 당하게 될 무서운 형벌과 환난을 오로지 주님의 안배와 섭리에 맡기고 아들을 보냈다.
 
아들이 떠난 후 그는 관헌들의 추격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기해년 9월 중순 그의 사위의 인도를 받은 배교자 김여상이 포졸을 이끌고 그의 집으로 몰려왔다. 증인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기운이 장사여서 대여섯 사람쯤은 해 치울 수 있었으나 조금도 반항하지 않고 포승을 받았다고 한다. 포도청으로 붙잡혀간 이냐시오는 사학을 신봉한다는 죄와 자기 아들 안드레아를 국법을 거슬러 조선을 떠나 마카오에 가게 하였다는 죄, 즉 국사범이라는 중죄를 가해 혹독한 형벌을 당하였다. 그는 이러한 형벌을 견디지 못하여 결국 배교하였다.
 
그러자 옥에 있는 신자들이 그의 죄가 대단히 크다는 것과 배교한대도 석방될 수 없다고 이야기해 주며, “석방되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마십시오. 당신은 의심 없이 처형될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돌려 당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재판관 앞에 나가 배교하겠다고 한 말을 취소하고 순교자로 세상을 마치도록 하십시오.” 하고 거듭 권고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는 형조에 출두하여 배교한 것을 취소하니, 이어 세 차례나 혹형을 당하였지만 다시는 마음을 굽히지 아니하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아들 김대건 신부의 장한 모습도 보지 못한 채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하니 때는 1839년 9월 26일이요, 나이는 44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김 데레사(1796-1840년)
 
성녀 김 테레사(Teresia, 또는 데레사)는 충청도 면천 고을에 살던 김대건 신부의 당고모이다. 그녀의 조부 김진후 비오(Pius)는 1814년에 해미에서 순교했고, 부친인 김종한 안드레아(Andreas, 또는 김한현 안드레아)는 1816년에 대구에서 순교했던 순교자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박해를 피하여 이리저리 피해 다녔기에 그녀가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어쨌든 그녀는 단아하고 자선심이 많은 처녀였다. 열일곱 살이 되어서 손연욱 요셉에게 출가하였는데, 단란한 생활 가운데서 여러 자녀를 낳아 모두 하느님을 경외하도록 교육을 시켰다.
 
그러던 중 1824년에 남편이 체포되어 해미 감옥에서 순교하자, 계속해서 정절을 지킴으로 모범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난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으로 만족하지 않고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을 할 정도로 고행에 전심하였다. 당시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게 되자 신부의 처소를 보살필 사람을 구하였는데 김 테레사가 적임자로 뽑혀 정정혜 엘리사벳과 함께 이를 기쁘게 받아들여 열심히 일하였다.
 
유 신부가 조선을 떠난 후 김 테레사는 앵베르 주교의 처소를 보살피는 사람으로 일하던 중 박해가 일어났다. 그녀는 위험이 닥쳐왔을 때에도 피신하지 않고 있다가, 여러 신자들과 함께 7월 19일에 붙잡혀 오라로 결박을 당한 채 옥에 갇혔다. 김 테레사는 옥에서 고문과 갖가지 괴로움을 당하였지만, 배교하거나 신자들을 고발하거나 선교사들의 피난처를 말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태형 300대의 고통을 꿋꿋한 자세로 참아 받았다. 김 테레사는 여섯 달 동안이나 옥중에서 고초를 겪은 후, 마침내 교수형의 선고를 받았다. 형리들은 그녀의 목에 끈을 감고 양쪽에서 오랫동안 잡아 당겨 끈의 양쪽 끝을 말뚝에 단단히 감아놓았다. 이리하여 김 테레사는 44세를 일기로 순교의 영광을 차지하였으니, 때는 1840년 1월 9일이었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1821-1846년)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는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 마을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대건의 아명은 재복(再福)이고 이름은 지식(芝植)이라고 하는데, 그의 집안은 열심한 구교 집안이다. 김대건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Pius)와 아버지는 순교로써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다. 신앙 깊은 순교자의 집안에서 성장한 김대건은 굳센 기질과 열심한 신덕으로 충실히 생활하던 중, 16세 때인 1836년에 모방 신부에 의해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가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 프란치스코는 병사하였으므로, 남은 두 신학생만이 훌륭히 학업과 성덕을 닦았으나 나이가 25세에 이르지 못하여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 무렵 파리 외방 선교회가 조선 교구를 담당하여 주교와 신부를 조선에 입국시켜 전교하고 있는 중이었으나, 조선이 외국과 수호조약을 맺지 않아 종교자유가 없었음으로 프랑스 루이 필립 왕이 파견한 함대의 세실 제독이 그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나섰다. 김대건은 세실 제독의 통역관이 되어 조선이 들어갈 메스트르 이 신부와 함께 에리곤 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세실 제독이 갑자기 조선 항해를 중지하게 되어 김대건은 혼자 육로로 본국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변문에 이르러 조선 사절단의 일원인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본국 소식을 자세히 듣게 되었는데, 성직자를 비롯하여 아버지와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입국을 서둘러 그해 12월 29일 혼자 의주 변문을 거쳐 입국하였으나 중도에서 본색이 탄로날 위험이 생겨 다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김대건은 백가점(白家店)과 소팔가자(小八家子)에 머물며 메스트르 신부로부터 신학을 배우고,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 고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다시 입국을 시도하여 고 주교와 함께 변문으로 왔으나 김 부제 혼자만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1845년 4월 주교와 신부를 맞이하기 위하여 상해에 갔다가 그 해 8월 17일 그곳의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 고 주교 집전으로 사제품을 받아 조선교회의 첫 사제가 되었다. 이어 8월 24일 상해에서 30리 떨어진 횡당(橫堂) 신학교 성당에서 다블뤼 안 신부의 보좌를 받으며 첫 미사를 집전하였다.
 
같은 달 31일 고 주교와 다블뤼 안 신부를 모시고 라파엘호라 명명한 작은 목선을 타고 상해를 출발하여 1845년 10월 12일에 충청도 나바위라는 조그마한 교우촌에 상륙하였다. 김 신부는 선교활동에 힘쓰는 한편 만주에서 기다리는 메스트르 이 신부를 입국시키려고 애썼으나, 의주 방면의 경비가 엄해서 고 주교는 바닷길을 알아보라고 지시함으로, 백령도 부근으로 갔다가 순위도에서 1846년 6월 5일 밤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김 신부가 황해 감사 김정집의 심문에서 자신은 조선에서 출생하여 마카오에서 공부했음을 토로하자 황해도 감사는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이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하여 중신회의를 열고 서울 포청으로 압송케 하였다. 일부 대신들은 김 신부의 박학한 지식과 외국어 실력에 탄복하여 배교시켜 나라의 일꾼으로 쓰자고 하는 의견도 있고 해서 배교를 강요했으나, 김 신부는 도리어 관리들을 교화시키려고 하자 사학의 괴수라는 죄목을 붙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는 사제생활 1년 1개월만인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 김 신부의 나이는 26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이상 가톨릭 성인사전]
 
 
복자 김진후 비오(1739~1814년)
 

충청도의 내포 평야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면천의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태어난 김진후(金震厚) 비오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요, 1816년에 순교한 김종한 안드레아의 부친이다. 족보에는 그의 이름이 ‘운조’(運祚)로 기록되어 있다.

김 비오가 천주교 신앙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맏아들이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에게서 교리를 전해 듣고는 이를 형제들에게 전하면서였다. 당시 김 비오의 나이는 50세가량이었다.

그러나 김 비오는 처음부터 천주교 교리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는 세상의 권세와 쾌락에 대한 관심 때문에 은총의 부르시는 소리를 들을 여유가 없었다. 특히 그는 감사 밑에서 작은 관직 하나를 얻게 되자, 자식들의 권유를 강하게 물리쳤다.

이후에도 김 비오의 자식들은 부친을 개종시키려고 꾸준히 노력하였다. 그러면서 그의 영혼은 점차 예수 그리스도께 기울어지게 되었고, 마침내 관직을 버리고 비신자 친구들과의 관계도 끊어 버리게 되었다. 그는 열심히 신자의 본분을 지켜 나감으로써 어른으로서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김 비오는 1791년의 신해박해 때에 처음으로 체포되어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그는 이후에도 네다섯 차례나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곤 하였다. 또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는 다시 체포되어 배교를 뜻하는 말을 하고는 유배형을 받았지만, 얼마 뒤에 귀양에서 풀려났다.

집으로 돌아온 김 비오는 1805년에 다시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되었다. 그가 천주교 신자답게 행동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관장 앞에서도 서슴없이 신앙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의 박해가 공식적인 것이 아니었으므로, 김 비오는 사형 판결을 받지 않은 채 오랫동안 옥에 갇혀 지내야만 하였다. 그 동안 그는 점잖고 품위 있는 성격으로 해미의 관리와 옥리들에게 존경과 대우를 받게 되었고, 드러내 놓고 신자의 본분을 지킬 수도 있었다.

이렇게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김 비오는 모범적인 인내심으로 옥중 생활의 고통을 참아 냈으나, 이미 생명의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그는 1814년 12월 1일(음력 10월 20일)에 옥중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아무리 신앙으로 인내심이 강하다고 할지라도 고통스러운 옥살이를 견디기 어려운 나이였다.

김진후 비오가 병으로 죽었는지, 굶주림이나 또 다른 고통으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생전에 받은 박해와 옥중에서 보여준 신앙생활 때문에 온 교회가 그를 기리게 되었다는 사실만이 전해올 뿐이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김진후 비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순교자 손연욱(孫~) 요셉(?~1824)

 
성녀 심 데레사의 남편.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태어났다. 1817년 10월(음) 덕산(德山)의 배나다리(현 지명은 禮山郡 揷橋邑 龍洞里 三區)에서 마을교우 30여명과 함께 체포되어 해미진영(海美鎭營)으로 압송되었고 해미진영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였다. 그 후 6,7년간 해미진영의 옥(獄)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관장의 허락을 얻어 옥 근처인 개인집에서 동생과 함께 살던 중 1824년 어느 날 새벽, 철야기도와 삼종기도를 바친 후 선종하였다. 그가 체포되고 10년간의 옥살이 끝에 1927년 옥사했고, 아내 김 데레사는 1840년 1월 9일에 순교, 1984년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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