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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 배티 성지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최양업 신부의 사목 중심지이자 순교자들의 본향
지번주소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471 
도로주소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배티로 663-13
전화번호 (043)533-5710
팩스번호 (043)533-5721
홈페이지 http://www.baeti.org/
관련기관 양업 교회사연구소    
관련주소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배티로 663-13
문화정보 충청북도 기념물 제150호
1997년 봉헌된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 성당 맞은편 오솔길을 따라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천혜의 피신처라 할 수 있는 배티는 충북 진천군과 경기도 안성시가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위치한 깊은 산골이다. 현재 진천에서 배티를 거쳐 안성으로 넘어가는 도로가 말끔하게 포장돼 있고, 좌우의 경부 고속도로와 중부 고속도로 그리고 둘을 연결하는 평택 제천 고속도로가 성지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이 지역은 서쪽으로 안성, 용인, 서울, 남쪽으로는 목천, 공주, 전라도 그리고 동쪽으로는 문경 새재를 지나 경상도로 이어져 박해 시대에는 내륙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처럼 각 지역과 쉽게 연결되면서도 깊은 산골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1830년부터 본격적으로 교우촌이 형성돼 왔고 최양업 신부가 이 지역을 근거로 전국을 다니며 사목 활동을 해 왔다. 배티 인근의 교우촌으로는 은골, 삼박골, 정삼이골, 용진골, 절골, 지구머리, 동골, 발래기, 퉁점, 새울, 지장골, 원동, 굴티, 방축골 등 배티를 포함해 모두 15곳이나 된다.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위치하고 있는 배티는 동네 어귀에 돌배나무가 많은 배나무 고개라서 ‘이치(梨峙)’라고 불렸고 이는 다시 순 우리말로 ‘배티’라고 불리게 됐다.
 
박해시대 배티로 넘어가던 비밀통로였던 삼박골 입구의 표지판.배티 인근에는 명승지와 성지들이 많이 있어 시간과 여건이 허락된다면 함께 둘러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안성에서 미리내 성지를 거쳐 용인 민속촌과 자연농원 또는 죽산 칠장사를 거쳐 양지에 있는 골배마실과 은이 성지를 갈 수 있다. 또 남쪽으로는 유관순 기념관과 독립 기념관 그리고 온양 온천이나 현충사를 가는 것도 가능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배티를 가기 위해서는 우선 진천으로 가서 백곡을 거쳐 양백리로 가는 시내버스를 이용하거나 안성에서 석남사로 가는 시내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백곡 공소가 있는 백곡에서 배티까지는 약 4km 정도이므로 도보로 순례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진천에서 18km 정도 지점에 ‘삼박골 비밀 통로 순교자의 묘’라는 푯말이 나오는데 그 중간에 백곡 공소가 길 왼쪽에 서 있다. 여기에는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윤 바르바라와 박 바르바라의 묘가 있는데 이들은 친시누이올케 관계이다. 순례객은 여기서부터 순교선조들의 향기를 조금씩 느낄 수 있다.
 
‘삼박골 비밀 통로’라는 푯말을 지나 조그마한 다리를 건너면 산으로 올라가는 오솔길이 나온다. 여기서 배티까지는 약 2km 정도로 걸어서 40분 정도가 소요된다. 이 길은 박해 시대에 배티로 넘어가던 비밀 통로였는데 무성한 수풀 사이로 난 좁다란 길은 믿음 하나로 험한 산길을 마다하지 않던 당시 선조들의 가쁜 숨결을 느끼게 한다. 삼박골은 베르뇌 장 주교와 페롱 권 신부가 박해를 피해 은신했던 교우촌으로 현재 공소는 없어지고 순교자 이 진사의 부인과 딸의 묘소만이 남아 있다.

성지 입구의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성당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순교현양비가 먼저 순례자들을 맞는다.
 
푯말이 서 있는 곳에서 안성 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드디어 배티 성지가 나온다. 입구 들머리에는 2012년 4월 15일 축복식을 가진 고딕 양식의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성당이 넓은 광장과 함께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성당 맞은편에는 아담한 배티쉼터도 새로 마련되었다. 성당 오른쪽으로 오르막 길에 들어서면 ‘순교 현양’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먼저 순례객을 맞는다.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꺾지 않았던 선조들의 굳은 정신이 단단한 비석을 통해 느껴진다.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과 산상제대 사이에 조성된 십자가의 길.100m 정도 올라가면 왼쪽으로 1997년 6월 봉헌된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이 있고, 그곳에서 시작되는 오솔길에는 적당한 간격으로 십자가의 길 14처가 세워져 있는데 특이하게도 각 처가 모두 하나씩의 커다란 맷돌에 새겨져 있어 순교자들이 겪어야 했던 박해의 육중한 무게를 보여주는 듯하다.
 
14처가 끝나는 곳에는 자연석 그대로의 제대와 함께 나무 밑동을 그대로 잘라 만든 야외 성당이 있고 산기슭에는 성모 마리아상이 서 있다. 제대 위의 촛대 역시 14처와 마찬가지로 맷돌로 만들어져 있고 제대 앞과 주위에는 나무 등걸로 이루어진 좌석들이 늘어서 있다.
 
최양업 신부가 머물던 사제관과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성모상을 지나 2시간 정도 소요되는 등산로를 넘어야 한다. 이것이 어려울 경우에는 성지 입구로 다시 내려와 배티 고개를 향해 약 400m 정도 올라가면 길가 오른쪽에 '최양업 신부 성당터'라고 쓴 입간판이 서있는데, 이곳에서 103위 성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우측에 최양업 신부가 여름 장마철이면 머물던 성당 겸 사제관이 말끔하게 복원되어 있다.

최양업 신부 성당터에 성당 겸 사제관으로 사용한 초가집이 복원되었다. 이 초가집은 조선대목구 신학교로도 사용되었다.1년에 5,000리에서 7,000리까지 걸어 다니며 심할 때에는 한 달에 겨우 나흘밖에 못 잤다는 최양업 신부는 전국을 앞마당처럼 다니다가도 장마철에는 여기에 머물며 “천주가사(天主歌辭)”를 집필했고 기도서인 “성교공과(聖敎功課)”를 번역했다. 그러나 그가 기거하며 성당과 사제관으로 사용하던 두 칸짜리 옛 초가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었다.
 
1999년 최양업 신부가 머물렀던 성당 및 사제관 터를 확인한 후 그 부근에 있던 농가를 매입해 철거하고, 2001년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한 후 최양업 신부 동상도 세웠다. 이 집은 이미 1849년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다음해 다블뤼 신부(후일 제5대 조선 대목구장)가 설립하여 페낭 신학교 유학생을 준비시키는 조선교구의 소신학교로 사용했었고, 최양업 신부뿐만 아니라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제들의 사제관과 성당으로도 활용했었다.
 
여기서 잘 포장된 배티 고개 길을 따라 900m 정도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면 ‘14인 순교자 묘역 입구’라는 푯말이 서 있다. 이곳은 배티에 숨어 신앙생활을 하던 선조들이 포졸들에게 잡혀 안성으로 끌려가다 집단으로 순교한 곳이다. 이곳에는 모두 14기의 무명 순교자 묘가 있다. 이 외에도 배티 성재골에 6인 무명 순교자의 묘가 있으며, 신원이 알려진 순교자 묘로 백곡 공소에 2기, 인근 교우촌에 6기가 더 있어 배티 인근에는 총 28기의 순교자 무덤이 산재해 있다.
 
배티에서 안성으로 넘어가는 고개길에 있는 14인 무명 순교자 묘역.배티를 중심으로 진천 일대에서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 때에 60여 명의 순교자가 났는데, 그 가운데 교회 순교록과 관변 기록에 그 순교 행적이 전해지는 순교자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8명을 포함하여 모두 34명에 이른다. 나머지는 배티 일대에 이름 없는 묘소들로 산재해 있다.
 
청주교구는 이처럼 유서 깊은 배티 성지를 성역화하고 한국교회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영성을 본받고 현양하기 위해 최양업 신부 사제 서품 150주년을 맞은 1999년 양업 교회사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연구소는 우선적으로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신부의 선교 활동과 신앙에 대한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현양 활동과 시복시성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2002년 12월 3일 ‘양업 영성관’(피정의 집)을 신축해 봉헌식을 거행했으며, 복원된 최양업 신부 옛 성당 입구에 103위 순교 성인 계단과 양업 영성관 입구의 시복시성 대상 순교자 묵주알 계단도 함께 조성하였다. 양업 영성관은 지상 2층 규모로 3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어 개인이나 가족 단위의 피정이 가능하다. 또한 청주교구는 2009년 교구 내의 대표적 성지인 배티와 연풍을 잇는 84.6km의 도보성지 순례길을 마련하여 순례객들을 돕고 있다.

최양업 신부 성당터에 복원된 초가집. 이 초가집은 성당, 사제관, 조선대목구 신학교 등으로 사용되었다.최양업 신부 성당터에 설치된 최양업 신부 동상과 십자가의 길.

2011년 3월 4일 배티 성지의 ‘조선교구 신학교지’와 ‘무명 순교자 14인 묘소’ 그리고 ‘삼박골 모녀 순교자 묘역’ 등 3개소가 충청북도 기념물 제150호로 지정되면서 진천군 및 충청북도의 지원을 받아 본격적인 성지개발에 들어갔다. 2011년 4월 15일 성지 들머리 주차장의 조립식 강당이 있던 자리에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성당 건립을 위한 기공식을 가졌고, 2012년 4월 15일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고딕 양식 기념성당을 완공해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이어 2012년 10월 10일에는 최양업 신부의 일대기와 박해시대의 역사와 신앙 선조들의 삶을 보여줄 최양업 신부 박물관 기공식을 가졌고, 2014년 4월 11일 첨단 정보통신기술을 접목해 순례자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 최양업 신부 박물관 축복식을 가졌다. 그리고 같은 해 최양업 신부 성당터에 십자가의 길 14처를 새로 조성하고, 복원된 성당 겸 사제관으로 사용된 초가집 마당에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 복녀 이성례 마리아 흉상을 새로 제작해 설치하였다. 또한 
배티 일대에 산재한 15개의 박해시대 교우촌을 산길로 잇는 배티 순례길 조성 및 삼박골 피정센터 등도 추진하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5년 5월 26일)]

2014년 축복식을 갖고 개관한 최양업 신부 박물관.
배티 성지 인근의 교우촌 안내도.
 
 
최양업 신부와 배티의 무명 순교자
 
최 신부는 이후 경상도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약 2년 동안 배티의 동골을 사목 거점으로 삼아 서양 선교사들이 다니기 어려운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오지의 교우촌들을 순방하였다. 그리고 휴식 기간에는 다시 이곳에 들러 이웃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하거나 동생들을 돌보았으며, 사목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신자들을 위해 "천주가사"를 저술하였다.
 
최양업 신부 성당터 입구. 오르막길은 103위 성인 계단으로 조성되었다.실제로 최 신부의 사목 순방은 고난 속에서 이루어졌다. 전국을 안마당 드나들 듯이 하면서 교우촌을 찾아 수십, 수백 리를 걸어야만 했고, 때로는 신자 한 두 집을 방문하기 위해 인적이 드문 골짜기를 올라가야만 하였다. 또 어느 해에는 밀고자 때문에 한겨울에 신자 집에서 쫓겨 나와 맨발로 산야를 헤맨 적도 있었다. 이러한 그의 삶은 곧 그리스도의 수난을 따르려 한 순교자적인 삶이었다.
 
원컨대 지극히 강력하신 저 십자가의 능력이 저에게 힘을 응결시켜 주시어, 제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게 하시기를 빕니다. … 우리의 모든 희망은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고,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죽고 함께 묻히는 것이 소망입니다(최양업 신부의 1846-1847년 서한 중에서).
 
이처럼 그는 조국 땅을 밟은 뒤 11년 6개월 동안 온갖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사랑하는 신자들을 위해 쉬지 않고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과로와 장티푸스로 1861년 6월 15일 경상도 문경에서 선종하였으니, 만 40세의 한창 때였다. 그의 시신은 문경 부근에 가매장되었다가 그 해 10월 말 신학교가 있던 제천 배론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이로써 최양업 신부는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백색 순교자'로 거듭나게 되었으니, 배티 일대는 이러한 최 신부의 신앙과 땀이 배어 있다는 두 번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복원된 최양업 신부 성당 겸 사제관 터의 초가집 내부. 미사를 봉헌하는 최양업 신부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배티 성지가 지니고 있는 세 번째 의미는 순교자들의 고향이라는 점이다. 현재 이곳 배티 골짜기에는 순교자들의 무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으며, 그중에는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들이 섞여 있다. 특히 오반지(바오로)의 경우는 순교 후 친척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에 안장하였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무덤 소재지를 밝혀 내지 못하고 있다.
 
한편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뒤에는 프티니콜라 신부가 1858년부터 1862년까지 이곳 배티에 거처를 정하고 충청, 경상, 경기, 강원 일부의 교우촌을 순방하였다. 이어 칼래 신부가 삼박골에 와서 인근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곤 하였는데, 그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문경에서 쫓겨 삼박골, 북면의 소학골을 거쳐 내포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나서야 마침내 오랜 박해가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제 신자들은 피신처에서 나와 새 복음의 터전을 닦아 나갔다. 배티, 용진골, 삼박골은 공소로 승격되었고, 배티에는 교리 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 신자들이 새로운 생활 터전을 얻기 위해 하나 둘 이곳을 떠남으로써 어느 교우촌은 단 한 명의 신자, 단 하나의 가옥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도 이 일대는 순교자들의 보금자리요, 최양업 신부나 선교사들의 고난 어린 발자취가 스며 있는 곳임에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오늘도 최양업 신부의 현양 운동에 동참하려는 신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니, 이를 통해 그분의 삶과 신앙이 길이 남게 될 것이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7월호]
 
배티 성지 순례 안내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모바일용 요약 설명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천혜의 피신처라 할 수 있는 배티는 충북 진천군과 경기도 안성시가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위치한 깊은 산골로 박해 시대 내륙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이런 지리적 특성으로 1830년부터 본격적으로 교우촌이 형성돼 왔고 최양업 신부가 이 지역을 근거로 전국을 다니며 사목 활동을 했습니다. 성지에는 1997년 봉헌된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과 오솔길을 따라 각각의 맷돌에 새겨진 14처, 그리고 2002년 봉헌된 ‘양업 영성관’(피정의 집)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성지에서 내려와 배티 고개를 향해 조금 올라가면 최양업 신부가 머물던 사제관 겸 성당이 있습니다. 1년 내내 도보로 전국을 다니며 사목하던 최양업 신부가 장마철에는 이곳에 머물며 “천주가사”를 집필했고 기도서인 “성교공과”를 번역했습니다. 1999년 최양업 신부의 성당 및 사제관 터를 확인한 후 그 부근의 농가를 헐고 2001년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했습니다. 이 집은 이미 1849년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다음해 다블뤼 신부가 설립한 조선교구의 소신학교로 사용됐던 곳입니다.

배티 고개 길을 따라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면 배티에 숨어 신앙생활을 하던 선조들이 포졸들에게 잡혀 안성으로 끌려가다 집단으로 순교한 14인의 무명 순교자 묘역이 있습니다. 배티를 중심으로 진천 일대에서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 때에 60여 명의 순교자가 났는데, 그 가운데 순교 행적이 전해지는 순교자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8명을 포함해 모두 34명에 이릅니다. 나머지는 배티 일대에 무명 순교자 묘소들로 산재해 있습니다. 청주교구는 배티 성지의 성역화와 최양업 신부의 영성을 본받고 현양하기 위해 1999년 양업 교회사연구소를 설립했으며, 2012년 4월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성당 봉헌식, 2014년 4월 11일 최양업 신부 박물관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최양업 신부 박물관은 첨단 정보통신기술을 접목해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꾸며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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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미사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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