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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 부엉골(범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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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설명 배론 신학당의 꿈을 이어
지번주소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 581 
전화번호 (031)885-2031
팩스번호 (031)884-5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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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메일 yeoju@casuwon.or.kr
관련기관 여주 성당    
관련주소 경기도 여주시 우암로 5
예수 성심 신학교의 사제양성 교육
 
<사진설명>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재학생들. 앞줄 가운데는 1899년부터 1933년까지 무려 40년간 한국인 사제양성에 힘을 쏟은 기낭(Guinaand) 교장신부이고, 가운데줄 오른쪽에서 3번째는 훗날 한국인 최초로 주교가 되는 노기남이다.
 
 
본 논문은 힘을 모아 한국인 사제를 양성하려는 초기교회의 분위기 속에서 그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고찰한다. 초기부터 1942년까지, 특히 예수성심신학교의 사제양성 교육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룬다.
 
논문준비 과정에서 기왕의 연구에서 이용하지 못했던 자료들을 적극 찾아내어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예수성심신학교 출신 사제들의 학적부와 회고록 등을 주되게 활용하였음을 밝혀 둔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이자 근대학교는 1855년에 창설된 배론(舟論) 성요셉신학교다. 이는 메스트로 신부가 창설한 것으로, 1856년 3월 입국한 푸르티에 신부가 곧장 신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학생들을 지도했다. 1861년 프티니콜라 신부가 부임함에 따라 상급반 학생들은 푸르티에 신부가, 하급반은 프티니콜라 신부가 각각 담당했다.
 
이들은 병인박해(1866년)로 신학교가 폐쇄될 때까지 신학생들을 지도했다. 배론 성요셉신학교가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임은 1935년 조선일보에 보도된 기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병인박해를 거치면서 신부 및 신자 선생들이 순교함에 따라 신학생들은 자연 해산되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일부는 순교하였지만 일부는 이후에도 생존했다. 유 안드레아 · 권동 요한 · 박 비리버 3인이 그 가운데 속하는데, 이들이 각각 '배론학당' 혹은 '배론신학교'에서 신품(神品)공부를 하였다고 했으므로 당시 신학생으로 확인되는 인물들 중의 일부이다.
 
기록에 따르면 유 안드레아와 권동 요한은 병인박해 당시 순교했지만 박 비리버는 이후에도 생존했음이 분명하다. 특히 박 비리버는 병인박해 이후에도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드러냈는데 이는 그를 직접 만나 라틴어로 의사소통을 했던 독일상인 오페르트가 남긴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유 안드레아는 무려 6년 동안 신품공부를 하였다고 했으므로, 그는 언어와 일반교양 영역은 물론 철학을 거쳐 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일례로 당시 페낭신학교에 유학 중인 신학생들이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나이 어린 신학생들은 한문, 그리고 다른 학생들은 라틴어를 공부했음을 들 수 있다.
 
따라서 배론 성요셉신학교에서 6년간이나 공부했다는 유 안드레아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게 한문 · 라틴어 등 언어영역은 이미 마치고 나서, 일반교양 영역과 철학 단계를 거쳐 신학을 공부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 권동 요한의 경우 주목할 것은 4품(品)까지 받았고, 고향 수원에 돌아가서 '훈학(訓學)'을 했다는 점이다. 4품이라고 하면 7품인 사제품(司祭品) · 6품인 부제품(副祭品) · 5품인 차부제품(次副祭品)의 바로 밑 단계인 시종품(侍從品)을 말한다. 그가 했다는 '훈학'에는 천주교 교리에 대한 훈도(訓導)가 우선 포함되었을 것이고, 성요셉신학교에서 배운 한문 등의 어학 영역 외에도 역사·지리 등 서양인 신부에게 배운 근대적 지식이 내포되었을 것이다.
 
셋째, 박 비리버는 라틴어를 써서 독일인과 의사소통을 했다는 점인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간단한 인사 정도를 건넨 것이 아니라 정확히 문장을 써서 의사표현을 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라틴어를 단어 나열이 아닌 문장으로 완성하여 의미를 전달하는 수사학(修辭學)을 배워 실용적으로 구사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두말할 나위 없이 배론 신학교에서 익힌 것이다.
 
따라서 배론 성요셉신학교에서 행해진 교육의 내용은 크게 분류하면 언어 · 교양 · 종교 영역이었다고 추론된다. 서양 근대 학문을 체득한 서양인 신부가 이를 직접 가르쳤기 때문에 배론 성요셉신학교는 근대 학교로서의 면모를 충분히 갖추었다고 판단된다.
 
이후 종교의 자유 분위기가 조성되자 소신학교 개교를 준비하여 1885년 10월 28일에 부흥골 예수성심신학교를 개교하기에 이른다. 이 사실은 당시 우리나라에 와서 활동 중이던 프랑스 외교관 지 코크르당(G. Cogordan)이 본국 정부에 보고한 문서에도 나타난다.
 
그는 보고서에 "마라발 신부는 1885년에 건립되어 수도에서 3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신학교의 운영을 담당하고 있는데, 현재 7명의 신학생이 있습니다. 그 외에 17명의 조선인 청년들이 페낭에 있는 외방전교회 소신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라고 기록했다.
 
그러다가 1887년 3월에는 용산 함벽정(函碧亭)으로 옮겼는데, 이것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다. 이때에는 대신학교와 소신학교를 겸했다. 이후 페낭신학교에서 수학 중이던 신학생들을 모두 귀국시켜 함께 교육시켰다.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사제양성 교육의 초기는 1887년부터 1900년까지로, 그때는 페낭신학교 출신자의 사제서품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페낭에서 신학교를 다니던 학생들이 돌아와 공부를 마치고 사제품을 받은 것은 1896년이다. 이때 국내에서 비로소 3명의 새 사제가 처음 배출됐다. 이들은 페낭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교육 기간이 단축됐다.
 
중기로 구분한 1900년부터 1928년까지는 신학생 수의 증가와 권위주의적 교육의 시기다. 이때의 특징은 첫째, 신학생 수가 증가하고는 있었지만 기복이 심했다는 점이다. 둘째, 건물 규모는 신학생 중가에 따라 성당과 교사가 자연히 증축되었지만 교육의 질은 오히려 퇴보하는 경향을 보였다. 셋째,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들의 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학교 운영이다.
 
후기로 구분되는 1928년부터 폐교를 당한 1942년까지는 대 · 소신학교의 분리와 교육의 내실화 시기로 정리된다. 1928년에 대신학교와 소신학교가 분리되어 대신학교는 용산에 그대로 남고, 소신학교는 남대문상업학교(후일 동성상업학교, 현 동성고등학교)에서 중등교육 과정을 이수하게 되었다.
 
1933년에 이르러 처음으로 14명의 학생이 소신학교를 졸업하고, 용산신학교에 입학했다. 그에 따라 대신학교에도 새로운 학업 분위기가 조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만큼 교육 내용도 내실을 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신학교는 여전히 법적으로 미인가 상태였는데, 이는 교회가 신학교의 자유로운 교육을 지향하기 위해서였다. 이 점은 "경향잡지"(1946년 12월호 65쪽)에 게재된 기록에서 확인된다.
 
"일본 제정은 서울 구용산에 예수성심신학교가 인가도 받지 않고 신자 청소년들을 모아 교육하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으나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에 짐짓 모르는 체하여 묵인하여 왔다. 신학교 당국에서도 정식으로 학교인가를 받고 보면 여러 가지 까다로운 제한을 받게 되어 신학교로서의 자유로운 교육을 시키기 어렵다 하여 짐짓 인가를 신청하지도 않고 그대로 내려왔다.
 
혜화동 신학교 역시 창립 당초부터 동성상업학교 을조(乙組)로 하여 동교 기숙사를 겸한 것처럼 외면으로 행세하면서 내면으로 신학교 교육을 베풀고 있었으니 이 역시 그때 시국형편에는 여러 가지로 순편하고 유리한 방책이었다. 이 역시 학무국에서 모르지는 안았으나 짐짓 눈감아 두었던 것이다."
 
적어도 법적으로는 미인가 상태였던 대신학교는 1942년 2월 총독부로부터 폐교 통지를 받고 결국 폐교하고 말았다. 한국인 최초로 노기남 신부가 주교품에 오르는 것을 보고 일제가 교회 간섭을 노골화했기 때문이다.
 
당시 인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폐교는 천주교회가 조선 총독부의 시책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려진 조치였으며, 특히 노기남 신부가 주교로서 바로 그 전 달 즉 1월에 서품을 받게 되자 이에 대한 견제와 압박을 가하기 위해 내려진 것이었다. 이 점은 노기남 주교의 회고록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리하여 용산 대신학교의 신학생들은 폐교 조치가 내려진 다음 달인 3월부터 덕원신학교로 옮겨 공부를 계속했다. [노용필, 가톨릭대 인간학연구소 전임연구원, 평화신문, 2003년 6월 29일, 정리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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