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사적지 목록

교구 성지명     지역명     내용 검색

전주교구 > 대승리(전동 성당 발상지)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여기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는가?
지번주소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신원리 276 
전화번호 (063)230-1071
팩스번호 (063)230-1177
홈페이지 http://www.jcatholic.or.kr
전자메일 chonju@catholic.or.kr
관련기관 전주교구 사목국    
관련주소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기린대로 100
전동 성당과 한국 최초의 순교자
 
전동 성당 앞마당 한편에 있는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복자상.전주시에 자리잡고 있는 전동 성당은 세 가지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선 박해 후 전주 지역의 사목을 맡게 된 보두네 신부가 1889년부터 대승리(완주군 소양면)를 중심으로 사목을 하다가 1891년에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옴으로써 '전주 본당'(지금의 전동 본당)이 시작된 곳이다. 다음으로 이 자리에는 1914년에 호남 최초의 로마네스크식 성당이 건립되었으며, 이 성당은 1981년에 사적 제288호로 지정되면서 그 보존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일대는 1791년의 신해박해 때 한국 천주교회 최초로 순교 터가 된 곳이기도 하다. 현재 대승리에는 '전동 본당 발상지'라는 기념석이 세워져 있다.
 
지금의 전동 성당 터에서는 1791년 11월 13일(양력 12월 8일)에 한국 천주교회 최초로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이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물론 이보다 앞서 1785년의 명례방 사건으로 이벽(요한)이 집안의 박해를 받은 후에 병으로 사망하였고, 김범우(토마스)가 형조의 아전들에게 체포되어 유배를 당한 뒤 배소에서 사망하였지만, 자료 부족으로 아직까지는 이들의 순교를 증명할 수가 없다. 특히 윤지충과 권상연은 초기의 신자로서는 드물게 교회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고,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뒤 혈세(血洗)를 받았으니, 전주교구에서 이들을 하느님의 종으로 선발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윤지충은 진산 장고치(현 금산군 벌곡면 도산리)에서 태어나 막현리(현 진산면 막현리)로 이주해 살던 남인 계열의 유명한 집안 출신으로, 조선 시대의 국문학 대가로 알려진 윤선도가 바로 그의 6대 조부이다. 그리고 권상연은 윤지충의 이종 사촌으로 공주 탄방(현 대전시 탄방동)에 살다가 막현리로 이주해 온 집안 출신이었으며, 경기도 양근의 유명한 신자였던 정약종(아우구스티노)과 정약용(요한) 형제는 윤지충의 고종 사촌 형이었다. 윤지충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바로 정씨 형제들과의 학문 교류 덕택이었고, 권상연이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은 윤지충 덕택이었다.

2011년 12월 사제관 뒤편에 2개 동으로 새로 건립되어 축복식을 가진 한국 최초 순교자 기념관이 보인다. 왼쪽 건물은 성심 유치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1787-1788년 무렵에 세례를 받은 후 그 동안 배워 오던 학문 대신에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중하였다. 그러던 중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상 제사 금지령을 하달하자 신주를 폐하였고, 다음해 윤지충의 모친(권상연의 고모)이 선종하였을 때는 전통 상례(喪禮)를 폐지하고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정성껏 장례를 치렀다. 당시는 이처럼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전통 상례나 제사를 폐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던 때였다. 그러므로 집안 사람들은 물론 이웃과 친지들은 이러한 행위를 묵과하지 않고 널리 알렸으며, 마침내는 지방의 관장과 조정에서가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신해년의 '진산 사건'이었다.
 
사건이 확대되면서 윤지충과 권상연은 잠시 몸을 피하였으나, 윤지충의 숙부가 체포되자 도리없이 피신처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윤지충 일기"에 따르면 그들은 일단 진산에서 문초를 받은 후 10월 29일에 전주로 압송되어 여러 차례 형벌과 문초를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어 11월 8일 조정에서는 윤리강상죄(倫理綱常罪)를 적용하여 그들에게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내렸으며, 11월 13일에는 오가는 행인들이 많은 전주 남문(풍남문) 밖에서 형을 집행하였다.

전동 성당 입구 정원 전경. 담 너머로 경기전이 자리하고 있다.
 
저들은 천주만 있는 줄 알고 임금과 어버이가 있는 줄을 모르며, 신주는 평일에도 부모와 조부모가 살아 계신 것처럼 섬기기 위한 것인데, 신주는 한 조각 쓸모 없는 나무토막이라고 불태워 없애고도 조금도 후회함이 없습니다. 제사를 폐한 일도 그러하거니와 매를 치며 자백을 받을 때에도 유혈이 낭자하였지만 신음 소리 한마디 없이 언제나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여 임금의 명령이나 부모의 명령은 어길지라도 천주의 가르침만은 비록 극형을 당한다 할지라도 결코 배반할 수 없다'고 하면서 칼날 아래 주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이만채 편, "벽위편" 및 "정조실록" 참조).
 
윤지충과 권상연이 전주 감영에서 형벌을 받으면서 마지막으로 순교를 각오하고 대답한 말이다. 훗날 이러한 순교 의지에 대한 표현은 순교자들에게 하나의 표어처럼 되어 버렸다. 순교한 뒤 그들의 시신은 막현리 인근에 묻혔고, 그들이 남긴 유물은 신자들에게 치유의 은사를 이루는 기적의 도구처럼 여겨져 여러 사람이 지니고 다녔다 한다. 또 이로부터 4년 뒤인 1795년에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는 전라도 땅으로 내려가다가 이곳을 지나면서 "성교를 공부하여 성인품에 이르게 된다면, 마땅히 두 사람의 무덤 위에 천주당을 세워야 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까지 그 무덤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120여 년 뒤 그들의 순교 터인 전주 남문 밖에 아름다운 성당이 들어서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뿐이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11월호]


전동 성당 : 순교 1번지에 우뚝 선 신앙의 요람
 
건축은 '인간을 담을 그릇을 빚는 작업'에 흔히 비유되고 있다. 아름다운 건축물들은 그 생김새가 서로 달라도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인간과 자연 그리고 건물 공간이 서로 거슬리지 않고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교회 건축물 중에서 이런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 바로 전주교구 전동 성당이다.
 
착공에서 봉헌까지 23년이 걸린 전동 성당은 비잔틴 풍의 돔을 올린 로마네스크 양식을 하고 있다. 1981년 사적 제288호로 지정되었다.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동 1가에 있는 전동 성당은 도심 한가운데 있으면서 녹음이 우거진 정원으로 시민들에게 쉼터를 제공해 주고 있다. 사적 제288호로 지정돼 있는 전동 성당은 또 로마네스크와 비잔틴 양식이 혼합된 건물로 한국의 교회 건축물 중 곡선미가 가장 아름답고 웅장하며 화려한 건물로 손꼽히고 있다.
 
또 주위에 경기전(조선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셔 놓은 곳, 사적 제339호)과 풍남문을 끼고 있어 한국의 전통 건축 양식과 외래 건축 양식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전동 성당은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영화인들과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에게 촬영지로 사랑받고 있으며, 음악 공연장으로도 각광받고 있다. 강재규 감독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촬영장으로 사용됐고, 많은 관객의 눈물을 자아냈던 영화 ‘약속’의 마지막 장면 중 주인공 박신양과 전도연이 둘만의 결혼식을 올리던 곳도 바로 전동 성당이었다.

전동 성당은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들인 윤지충(바오로, 1759-1791), 권상연(야고보, 1751-1791)이 순교한 자리에 세워졌다. 이들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유교식 조상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워 참수형을 받았다. 이런 이유로 전동 성당에 들어서면 오른편 정원에 ‘한국 천주교 순교 1번지’라고 새겨진 선돌이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908년 전동 성당 공사를 시작한 초대 주임인 보두네 신부 흉상.전동성당 터는 또한 ‘호남의 사도’로 불린 유항검(아우구스티노, 1754-1801)과 김유산(토마스, 1761-1801)이 순교한 곳이자 유항검의 동생 유관검과 이우집, 윤지충의 아우 윤지헌이 성직자 영입을 위해 북경 주교에게 서양의 큰 배를 조선에 몰고 와달라고 요청한 ‘대박청래’ 사건을 일으킨 죄로 처형된 곳이기도 하다.
 
전동 본당 초대 주임인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보두네 신부는 20세기 초 전동 성당을 지을 때에 일제 통감부가 전주에 신작로를 닦으며 풍남문 성벽을 헐자 이 성벽 돌과 흙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풍남문 성벽 돌을 가져다 성당 주춧돌로 사용했다. 유항검을 비롯한 전동 성당 터에서 치명한 순교자들의 목을 효수했던 성벽의 돌을 성당 주춧돌로 사용함으로써 이곳이 순교지일 뿐 아니라 ‘신앙의 요람’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전동 성당은 서울 명동 대성당 내부 공사를 마무리했던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1908년에 착공됐다. 초대 주임 보두네 신부는 17년 동안 매입한 5000평의 대지에 교우들이 낸 성당 신축기금과 자신이 절약해 모은 돈, 그리고 안원오(프란치스코) 회장과 김찬일(아우구스티노) 회장이 기부한 돈을 모두 합쳐 5만원이라는 거액으로 공사를 시작했다.

중국인 벽돌공 100여명이 동원돼 전주성을 헐은 흙을 사용해 벽돌을 직접 굽고, 석재는 전북 익산의 황등산에서 캔 화강석을 말 네 필이 끄는 마차로 운반해 왔고, 목재는 오늘의 치명자산을 매입해 벌목하여 사용했다.

공사 기간 동안 전주 시내에 사는 신자들은 물론 진안, 장수, 장성 등지에 사는 교우들이 밥을 지어먹을 솥과 양식을 짊어지고 와 손마디와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히고 어깨에 혹이 생기도록 자원 부역을 했다. 신자들의 희생적 노력 끝에 공사를 시작한 지 만 7년 만인 1914년에 전동 성당 외형공사를 모두 마쳤다.

명동 대성당과 같이 공중 회랑과 많은 창을 통해 자연 채광을 살린 성당 내부.초대 주임 보두네 신부는 성당 완공을 못보고 1915년 5월 이질에 걸려 57세로 선종했다. 그래서 성당 내부 공사는 제2대 본당 주임인 라크루 신부에게 맡겨졌다. 라크루 신부는 193평에 달하는 성당 내부공사를 1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묵묵히 진행하여 마침내 1931년 6월18일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 주례로 성전봉헌식을 거행했다. 이처럼 전동 성당은 착공에서 성전봉헌까지 23년이라는 대역사 끝에 완성된 성당이다.

전동 성당은 정면 중앙 종탑부와 양쪽 계단에 비잔틴 풍의 뾰족 돔을 올린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이다. 특히 12개의 창이 있는 종탑부와 8각형 창을 낸 좌우 계단의 돔은 전동 성당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대표적 상징물로 꼽히고 있다. 또 페인트칠을 하지 않은 성당 내외벽은 적색과 회색의 벽돌색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색채의 조화가 인상적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그리고 내부 공간도 서울 명동 대성당과 똑같이 공중 회랑과 많은 창으로 만들어 육중한 벽체에 비해 자연 채광으로 상대적으로 내부 공간이 밝도록 꾸며놓았다.

교회 건축물 전문가인 김정신 교수(단국대 건축공학과)는 “전동성당은 전체적으로 종탑부 돔이나 석조 기둥 등 비잔틴 요소를 혼합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으로 외관의 세부 기법, 따뜻한 느낌을 주는 내부 공간 등 여타 유명 성당을 능가하는 건물”이라고 평했다.
 
전쟁 화재 수난 딛고 시민 휴식처로 자리 
오래된 건축물은 그 세월만큼 다양한 흔적을 갖고 있다. 때론 그 흔적이 ‘전설’이 되어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한국 천주교회 순교 1번지에 우뚝 서 100여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전주 전동 성당도 세월의 흔적만큼 모습을 달리해 왔고, 성당을 찾았던 사람들의 기쁨과 희망, 탄식과 슬픔을 간직해 오고 있다.
 
프랑스인 마리아 앙리에트가 봉헌한 전동 성당 종은 1915년 8월 24일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 주례로 축복식을 갖고 종탑에 설치됐다. 경향잡지(제9권)는 당시 종 축복식 광경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예수성심상 뒤로 보이는 중앙 종탑과 좌우의 돔은 전동 성당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대표적 상징물이다.“주교께서는 80여명 교우에게 견진성사를 주시고 이어 성체강복을 하신 후에 종을 달아 삼종을 치니 소리 기묘하고 웅장하야 사람의 마음을 크게 움직이는지라 여러 교우들이 흔히하고 용약하야 일제히 삼종을 외우고 이제부터는 이곳에 귀막힘과 같이 지내던 외교인들도 성교회 소리에 많이 감화하야 천주의 영광이 하늘에서 이룸같이 땅에서도 또한 이루어지기를 바라더라.”
 
종이 사라질 위기도 있었다. 1942년 일제가 전동성당 종을 공출하려 하자, 당시 보좌였던 오기선 신부가 “만일 적이 공습했을 때 전기나 통신이 끊어지게 되면 성당 종을 쳐서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고, 또 매일 울리던 종이 울리지 않으면 사람들이 불안해 할 것”이라고 말해 위기를 모면했다. 나바위와 수류 성당을 비롯해 전주 시내 개신교회의 종은 모두 공출당했으나 오 신부의 임기응변으로 전동 성당 종만 공출을 면할 수 있었다. 지금은 매주일 오전 10시 30분 교중미사 때만 전동 성당의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
 
1937년 4월 13일 전주 교구가 설립되면서 주교좌성당으로 승격된 전동 성당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트럭 정비소로 사용하기 위해 제대와 성당 내부를 파괴해 첫 수난을 겪었다. 이후 전동 성당은 1988년 10월에 일단의 괴한에 의해 방화사건이 발생, 성당 동편 2층 회랑이 전소되는 두 번째 수난을 당했다.
 
이 방화사건은 지금도 미궁에 빠져 있지만 전동 성당은 당시 전북지역 민주화의 성지로 시민들에게 사랑받고 있던 곳이어서 지금도 시민들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짓이라고 믿고 있다.
 
전동 성당은 한국전쟁 이후 1955년 공산군에 의해 파괴된 십자가의 길 14처 복구공사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여러 차례 보수 공사를 해왔다. 1973년에는 성당 마룻바닥을 철거하고 인조석으로 개조를 했으며, 1975년에는 유리창을 개수하기도 했다.
 
1988년 화재사건 이후 제22대 본당주임으로 부임한 김봉희 신부는 1992년부터 대대적 전동 성당 보수공사를 진행했다. 성당 바닥은 대리석으로, 부식된 벽돌은 새 벽돌로 교체됐다. 성당 양측 벽면 18개의 창문은 유리화로 단장했고, 화재로 전소됐던 2층 회랑을 복원했다. 또 성당 담을 허물고 그 자리를 꽃길로 조성해 시민들이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도록 개방해 놓았다.
 
성당 마당의 성모자상.전동 성당 양측 벽면 18개 창 가운데 신자석을 감싸고 있는 12개의 색유리창은 전주교구사를 설명하고 있다. 이 창에는 103위 한국 순교 성인 중 전주 숲정이와 서천교에서 순교한 한원서 베드로, 손선지 베드로, 이명서 베드로,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조화서 베드로, 조윤호 요셉, 정원지 베드로 7명의 성인과 본당 주보인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1801년 순교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유관검, 그리고 동정부부 순교자인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본당 초대주임 보두네 신부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또 제대 주위에는 예수의 탄생과 수난, 부활, 승천, 성령강림, 성모승천을 보여주는 색유리가 설치돼 있다.
 
성심여자중고등학교와 접한 성당 왼편 담장 쪽에는 한국 천주교회 첫 순교자인 윤지충 · 권상연의 순교 동상이 서 있었다. 1993년 3월에 건립된 이 순교자상은 윤지충이 십자가를 들고 서 있고, 권상연이 목에 칼을 차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방주 모양의 좌대 위에 설치돼 있다. 마르코 조각실에서 제작한 이 순교자상은 현재 성당 오른편 담장 안쪽, 풍남문이 바라보이는 사거리쪽으로 이전 설치되었다.
 
성당 정문에서 오른쪽 꽃담에는 ‘한국 천주교 순교 1번지’라고 새겨진 선돌이 있다. 이 순교비에 새겨진 글은 전주교구 가톨릭 미술가회 지도신부인 현유복 신부가 썼다. 그리고 그 옆으로 초대주임인 보두네 신부 흉상과 이전 설치된 순교자상이 있다.
 
성당 마당 왼쪽에는 1977년에 봉헌된 루르드 성모 동굴 성모상이 있으며, 성당 뒷편에는 미리내 천주성삼 성직수도회에서 제작한 ‘피에타상’이 안치되어 있다. 또 1992년에 지하 103m에서 끌어올린 지하수로 만든 급수대는 신자들로부터 ‘치명생수’라고 불리면서 사랑받고 있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78호로 지정된 사제관. 추후 유물 전시관으로 변모할 예정이다.전동 성당 사적공원화 사업  전동 성당과 사제관(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78호)을 중심으로 한 성당 부지 1만 1544㎡가 사적공원으로 거듭난다. 2006년부터 진행되고 있는 성당 보수사업의 후속 사업으로 이뤄지고 있는 전동 성당 사적공원화 사업은 문화재인 성당과 사제관을 제외한 부대시설들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는 형태로 추진된다.
 
주요 문화재인 성당의 훼손 방지 및 보존을 위해 시작된 보수사업은 성당 벽돌의 부식 원인이 되는 주변 시설 정비 및 도로와 경계를 이루는 성당 담장 정비에 역점을 두었다. 이와 함께 성당 유리창 색유리화를 전면 보수하는 작업도 병행해 현재 색유리화 보수 작업은 완료된 상태다. 이병호 주교가 제안한 성경말씀 등을 토대로 마르크 수사(떼제 공동체)와 김겸순 수녀(노틀담 수녀회)가 작업했다.
 
전동 성당 사적공원 조성 사업의 핵심은 사제관을 보수하고 주변 부대시설을 공원화에 맞춰 대폭 정비하는 일이다. 전동성당 축성식 때 함께 완공된 사제관은 성당을 짓는 데 사용한 것과 같은 벽돌로 지어진 2층 건물인데 갈수록 부식이 심화되고 있었다. 사제관 옆 교육관 및 유치원으로 사용되는 건물을 비롯한 부대시설들이 채광 및 통풍(通風)을 막고 있어서 생긴 현상이었다. 전동 성당은 기존의 교육관과 유치원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 매입한 사제관 뒤편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2층의 한국 최초 순교자 기념관을 2개 동으로 건립하여 2011년 12월 11일 축복식을 가졌다. 사제관과 같은 양식으로 건립된 기념관 내에는 전시실과 부설 성심유치원, 회합실, 소성당 등이 들어섰다.
 
전동 성당 외부.계속해서 전동 성당은 지방문화재인 현 사제관을 이전하고, 이를 보수 단장해 국가문화재로 승격한 후 유물전시관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대신 새 사제관이 성당 뒤편에 신축되고 있다. 또한 성당 바로 옆에 위치한 성심여자중학교 이전 사업이 완료되는 대로 현 학교 건물을 철거해 전동 성당 주변 전체를 사적공원화하는 사업을 펼칠 예정이다.
 
이렇듯 사적공원화 사업이 모두 완료되면 전동 성당은 인근 풍남문(보물 제308호)과 성당 맞은편의 경기전(사적 제339호)을 비롯해 한옥마을, 오목대와 한벽루, 치명자산 성지까지 연계되어 성지순례와 역사문화 체험이 어우러지는 중심축을 이루게 될 것이다.
 
전동 성당의 사적공원화 사업은 특히 한국의 첫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됨으로써 그 의미를 더하게 되었다. 전동 성당과 치명자산 성지의 상징성에 시복식의 의미가 더해져 세계적인 성지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출처 : 평화신문, 2003년 6월 22일, 29일 리길재 기자 & 2009년 7월 5일 이창훈 기자의 기사 일부 수정 편집(최종수정 2015년 11월 6일)]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