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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 황무실 성지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박해 중에도 신앙을 꽃피운 내포교회의 중심지
지번주소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석우리 1013 
전화번호 (041)362-5947 , (041)363-5947
홈페이지 http://cafe.daum.net/3625945
전자메일 shd5947@hanmail.net
관련기관 신합덕 성당    
관련주소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굴미2길 40

성 위앵 루카 신부(1836-1866년)


성 마르티노 루카 위앵(Martin Luc Huin) 신부의 세례명은 마르티누스 루카(Martinus Lucas)이며, 한국 성은 민(閔)이다. 그는 1836년 프랑스 랑그르(Langres) 교구의 기용벨(Guyonvelle)에서 태어났다. 포도밭을 경작하던 그의 부친은 항상 그의 가문에서는 성직자와 수도자가 많이 배출되었음을 자랑하면서 9남매가 모두 훌륭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교육시켰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막내로 태어난 위앵은 1851년에 랑그르 소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856년 10월에 랑그르 대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861년 6월 29일 사제로 서품되어 랑그르 교구의 사제가 되었다.


그 후 그는 믈레(Melay)와 부아제(Voisey) 본당에서 보좌신부로 활동하면서도 선교사제의 꿈을 키우다가 마침내 1863년 8월 20일 교구장 주교의 허락을 받고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1864년 6월 13일에 자신이 전교해야 될 지방이 조선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기뻐하며 부모님에게는 물론 옛날 본당 신부님에게도 편지를 썼다고 한다.


1864년 7월 15일 위앵 신부는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신부,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 도리(Dorie, 金) 신부와 함께 전교지인 조선을 향해 파리(Paris)를 떠나 홍콩, 상해를 거쳐 1864년 11월 만주의 차쿠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조선과의 연락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아 한문과 조선어 공부를 하며 그 해 겨울을 지냈다. 그 이듬해인 1865년 5월 27일에 비로소 위앵 신부는 일행과 함께 충청도 내포 지방에 상륙하여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의 환영을 받으면서 조선에 입국하였다.


도착 후 위앵 신부는 6월 18일까지 다블뤼 주교와 함께 내포 지방에서 조선어 공부를 하며 지내다가, 그 후에는 내포 지방에서 20리쯤 떨어진 당진 합덕 지방의 세거리 공소로 떠났다. 위앵 신부는 1866년 2월에 벌써 교우들의 고해성사를 듣고 신자들을 가르칠 수가 있었다. 위앵 신부는 박해 직전까지 5백여 명에게 고해성사를 주었고, 15명 내지 20명에게 병자성사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몇몇 교우들에게 혼인성사도 집전해 주었다.


1866년 3월 12일 그는 다블뤼 주교의 편지를 받고 순순히 체포되어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Aumaitre, 吳) 신부와 함께 3월 19일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1866년 3월 30일 보령 수영 갈매못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내 마음에 아픈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이토록 젊은 나이에 죽는다는 것도 아니요, 이곳과 같은 처절한 장소에서 죽게 된 때문만도 아니라, 이 나라 불쌍한 백성들의 구령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죽게 되니 그것만이 마음 아플 뿐이오.” 그의 유해는 현재 절두산 순교 기념관 지하성당에 모셔져 있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이상 가톨릭 성인사전]



복자 원시장 베드로(1732-1793년)


원(元)시장 베드로(Petrus)는 1732년 충청도 홍주 응정리(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의 양인(良人)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몇 해가 지난 1788-1789년 무렵, 곧 56-57세가 되었을 때, 사촌 형인 원시보 야고보와 함께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시장’은 그의 관명(冠名)이다.


어느 날 원 베드로는 집을 떠나 1년 이상 다른 지방에 가서 생활하면서 교리를 공부하였다. 그동안 그는 ‘천주교 신앙이 수천 년 동안 목숨을 보전해 주는 약’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이후에는 집으로 돌아와 친척과 친구들에게 천주교의 주요 교리를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하느님의 은총이 그의 설명에 힘을 보태 주었고, 친척과 친구들은 마음이 움직여 하느님을 믿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때까지도 그는 세례를 받지 못하였었다.


본디 원 베드로의 성격은 사납고 야성적이어서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그러나 신앙을 실천해 나가는 동안 성격이 변하여 어떠한 일에서나 온화함을 보여 주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거나 이웃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는 데 열중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이름은 관장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관장은 포졸들을 보내 원 베드로와 원 야고보를 체포해 오도록 하였다. 이때 사촌인 원 야고보는 친구들의 권고에 따라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으나, 원 베드로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홍주 관아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내 원 베드로는 홍주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관장의 어떠한 강요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천주를 배반하거나 동료들을 밀고할 수 없으며, 교회 서적이 있는 곳도 말할 수 없다.”고 답변하였다. 관장은 화가 나서 형리들에게 주리를 틀고, 치도곤 70대를 치게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하느님과 부모님께 대한 본분과 천주교의 참된 도리를 설명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여러 달을 옥에 갇혀 있으면서 원 베드로는 자주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고 형벌을 받았는데,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포졸과 형리들에게 전교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교우가 그를 만나러 옥으로 찾아왔고, 이때 원 베드로는 그에게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동안 홍주 관장은 감사에게 모든 사실을 보고하였으며, 감사에게서 ‘원시장을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관장은 다시 원 베드로를 옥에서 끌어내 갖은 형벌을 가하였지만, 한결같은 그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관장은 마지막으로 혈육의 정에 호소해 보기로 하였다. 원 베드로를 기다리고 찾는 자식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식들 이야기를 듣고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는 제 마음을 크게 움직입니다. 그러나 천주께서 친히 저를 부르시니, 어찌 그 목소리에 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홍주 관장은 이 사건을 빨리 마무리 짓고자 하였다. 그래서 관례에 따라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음식을 가져다주도록 하고는, 죽을 때까지 매질을 하도록 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관장은 다른 방법을 생각한 끝에, 그의 몸에 물을 붓고 밖에 내다 놓아 얼어 죽게 하라고 명하였다.


원시장 베드로가 덮어쓴 물은 이내 얼음으로 변하였다. 그런데도 그는 오로지 주님의 수난만을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에게 바쳤으니, 그때가 1793년 1월 28일(음력 1792년 12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1세였다.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원시장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원시보 야고보(1730-1799년)


원(元)시보 야고보(Jacobus)는 충청도 홍주 응정리(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의 양인(良人) 집안 출신이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몇 해가 지난 1788-1789년 무렵, 곧 그의 나이 60세가 다 되어서야 사촌 동생 원시장 베드로와 함께 천주교 교리를 듣고 입교하였다. ‘시보’는 그의 관명(冠名)이다.


본디 성품이 어질고 순하며 정직하고 활달하였던 야고보는, 입교하자마자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키며 온갖 덕행을 실천하였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재산을 희사하였고, 금요일마다 금식을 하였으며, 이곳저곳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이름은 점차 인근 지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자, 홍주 관장은 포졸들을 보내 곧장 원 야고보와 사촌인 원 베드로를 체포해 오도록 하였다. 이때 원 야고보는 친구들의 권고에 따라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으나, 원 베드로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갖가지 혹형을 받은 뒤, 1793년에 순교하였다. 뒤에 이 소식을 들은 원 야고보는 사촌과 함께 순교의 영광을 얻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1795년 무렵, 원 야고보는 주 야고보 신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첩을 두고 있다는 이유로 주 신부에게 성사를 받지 못하자, 집으로 돌아가서는 바로 첩을 내보냈다.


이로부터 2년 후에는 정사박해가 충청도 전역을 휩쓸게 되었다. 이 와중에서 원 야고보도 1798년에 체포되어 덕산 관아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68세였다. 그러나 그는 갖가지 혹형에도 굴하지 않고, “천주를 섬기고 제 영혼을 구하고자 천주교를 봉행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런 다음 홍주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덕산으로 끌려와 몹시 두들겨 맞았으며, 형벌로 인해 두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1799년 원 야고보는 감사의 명령에 따라 병영(兵營)이 있던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가 덕산을 떠나는 날 아내와 자식과 친구들이 울면서 따라오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을 섬기고 영혼을 구하려면 인간의 본성을 따라가서는 안 되네. 모든 고통을 참아 낸다면, 기쁨 가운데서 주님과 착하신 동정 마리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네. 그대들이 여기에 있으면 내 마음이 흔들리니 돌아가게. 이성을 잃고 대사(大事)를 그르칠 수는 없네.”


청주에 도착하자마자 원 야고보는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를 당하였다. 관장은 그를 배교시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순교의 원의로 가득 찬 그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덕산에서 이미 두 다리가 부러졌던 원 야고보에게 다시 온갖 혹형이 가해졌으며, 그는 결국 이를 이겨 내지 못하고 말았다. 그때가 1799년 4월 17일(음력 3월 13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9세였다. 원시보 야고보가 순교한 뒤 그의 육체는 이상한 광채에 둘러싸인 것 같았으며, 이 광경을 목격한 50가족가량이 천주교에 입교하였다고 한다.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원시보 야고보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이보현 프란치스코(1773-1800년)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1773년 충청도 덕산 황모실(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의 부유한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부친을 여의었다. 그는 조금 고집스러운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데,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는 나이가 된 후에는 어떻게나 난폭하였던지, 아무도 그를 억제할 수 없었다.


20세가 조금 넘었을 때, 이 프란치스코는 고향 인근에 살던 황심 토마스에게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황심은 훗날 북경을 왕래한 교회의 밀사로 그의 아내는 바로 이 프란치스코의 누이였다.


진리를 깨닫고 얼마 안 되어, 이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소행을 고치고 본성을 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혼인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지만, 모친의 권유에 순종하려고 혼인을 하였다. 그런 다음 교리를 자유롭게 실천하고자 황 토마스와 함께 충청도 연산으로 이주해 살았고, 1795년에는 주 야고보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셔다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교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이 프란치스코의 열심은 날로 더해 갔다. 그는 보속과 고행에 열중한 나머지 산중에 들어가 힘들게 생활한 적도 있었다.


1797년의 정사박해로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자, 이 프란치스코는 박해를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가족과 동네 교우들을 격려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는 날마다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를 그들에게 들려주면서 “신앙을 고백하고 천국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마라.”고 권면하였다.


박해가 시작된 지 한두 해가 지난 어느 날, 이 프란치스코는 머지 않아 자신에게도 위험이 닥쳐오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 술을 대접하면서 ‘이것이 마지막 잔치’라고 말하였다. 과연 이틀 뒤에 포졸들이 연산 땅에 나타났고, 그는 곧바로 체포되어 그곳 관아로 압송되었다.


연산 관장은 포졸들에게 끌려온 이 프란치스코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확인한 뒤, 교우들과 교회 서적이 있는 곳을 대도록 하면서 배교를 종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배교를 거부하고, “만물의 대군(大君)이신 천주에 대해 말한 책을 관장에게 맡길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화가 난 관장은 포졸들을 시켜 그에게 혹독한 매질을 하게 한 다음 옥에 가두었다.


얼마 뒤 이 프란치스코는 충청 감사의 명에 따라, 그의 고향 덕산을 관할하는 해미 관장에게 이송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형벌을 받으면서도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사람들의 기원이 태초에 그들을 창조하신 천주께 있으니, 어찌 그분을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나절 넘게 이 프란치스코는 갖은 고문을 당하였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옥으로 끌려간 뒤에도 그는 기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고, 함께 갇힌 사람들을 격려하였다.


해미 관장은 할 수 없이 감사에게 이 프란치스코의 처분을 문의하였다. 그러자 감사는 ‘아무것도 자백하지 않으면 매를 쳐서 죽이라.’는 명령을 내려보냈고, 이에 따라 그는 다시 한 번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런 다음 관장이 사형 선고문을 내밀자, 기쁜 표정으로 거기에 서명하였다.


다음 날 아침, 이 프란치스코는 장터로 끌려 나가 혹독하게 매를 맞았다. 그럼에도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망나니들은 그를 넘어뜨린 뒤, 몽둥이로 불두덩을 짓찧어 죽게 하였다. 그때가 1800년 1월 9일(음력 1799년 12월 1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며칠 뒤에 교우들이 그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는데, 그토록 많은 형벌을 받았는데도 얼굴에는 웃음을 띠고 있었으며, 이를 직접 목격한 비신자들 여러 명이 입교하였다고 한다.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이보현 프란치스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조제프 암브로이즈 메스트르(Joseph Ambroise Maistre, 1808-1857년) 신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은 요셉. 한국 성인 이(李). 1808년 9월 19일 프랑스 안시(Annecy) 교구 앙트르몽(Entremont)에서 태어나 톤(Thones) 중학교에서 공부한 후 1832년 6월 16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 위진(Ugine) 교구의 보좌 신부로 임명되어 약 7년 동안 사목하다가, 31세 때인 1839년 6월 8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1840년 1월 15일 동료 베르뇌(Berneux, 張敬一) 신부와 함께 프랑스를 출발하여 9월 21일 마카오(Macao)에 도착한 메스트르 신부는, 정식 임지를 통보받기 위해 대기하던 중 임시로 마카오 주재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의 일을 임시로 도왔다. 또한 중국 신학생들과 그곳에 유학 와 있던 조선 신학생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과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등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한편 리브와(Libois) 신부로부터 조선 선교사로 임명받고 1842년 2월 15일 김대건과 함께 세실(Cecille) 함장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 에리곤(l’Erigone)호에 승선하여 마카오를 출발하였는데, 그해 7월 오송(吳淞)에 도착하였으나 프랑스 측의 원정 연기로 다른 방법을 모색하여야만 했다. 이에 그해 10월 상해(上海)로 간 메스트르 신부와 김대건은, 그곳에서 드라 브뤼니에르(de la Bruniere, 寶) 신부, 최양업 등과 합류하여 강남 대목구장 베시(Besi) 주교의 주선으로 중국 배를 타고 요동 반도의 태장하(太莊河) 해안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입국이 불가능해 보이자 김대건과 헤어져 1844년 1월 최양업과 함께 소팔가자(小八家子)로 귀환하였다.


1846년 1월 말 최양업과 함께 만주 훈춘(琿春)을 통해 함경도 국경으로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두만강 국경 마을에서 만주 관헌들에게 체포되었으나 이틀 만에 석방될 수 있었다. 다시 소팔가자로 귀환하여 신학생들을 가르치던 메스트르 신부는, 1846년 12월 말 다시 입국을 시도하기 위해 변문(邊門)으로 가던 중 김대건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들었다. 이에 그는 조선 교회에서 보낸 밀사들의 만류로 입국을 포기하고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가 이전된 홍콩으로 가서 입국의 기회를 기다렸다. 또 1847년 7월에는 라피에르(Lapierre) 함장이 이끄는 군함을 타고 최양업 부제와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고군산도(古群山島)에서 배가 난파되었다. 그곳에 남아 있으려 하였지만 결국 다시 상해로 되돌아온 메스트르 신부는, 1849년 초에도 중국 배를 타고 백령도(白翎島)를 통해 조선 입국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였고, 그해 11월 요동으로 가서 12월 3일 조선 입국을 시도했으나 최양업 신부만 입국하고 그는 실패하고 말았다. 1851년 초에는 조선에서 교우들을 보내 그의 입국을 돕게 하였으나 그것 역시 실패하였다.


이와 같이 메스트르 신부는 육로(陸路) 또는 해로(海路)를 통해 여러 차례 입국을 시도하였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결국 1852년 7월, 이미 1847년 고군산도에서 난파한 프랑스 군함의 잔해를 철거한다는 구실로 예수회의 엘로(Helot) 신부의 도움을 받아 서해안에 상륙할 수 있었는데, 이로써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여 입국을 시도한 지 10여 년 만에 그 목적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입국 후 곧바로 성사 집행 및 전교 활동을 시작한 메스트르 신부는, 1853년 2월 3일 제3대 조선 대목구장 페레올(Ferreol, 高) 주교가 사망하자 임시 조선 포교지의 장상직을 맡게 되었다. 그는 이미 중국에 있을 때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주교로 임명되었으며, 당시 조선에 파견 나와 있던 선교사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으므로 교회법에 따라 수석 신부로서 새로운 교구장이 부임하기까지 교구를 이끌어 나갔던 것이다. 또한 그는 방인 성직자 양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인식하고 1855년에 충남 제천(堤川)의 배론(舟論, 현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에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를 세웠다. 1856년 3월 만주교구의 보좌 주교로 활동하던 베르뇌 주교가 제4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됨에 따라, 그는 충청도 지역으로 전임되어 전교 및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온화하고 양순한 성품의 소유자로서 언제나 교우들로부터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지만, 계속되는 성사 집행과 전교 활동으로 인한 과로 때문에 쓰러져 회복하지 못한 채 50세 때인 1857년 12월 20일 충남 덕산(德山)의 황무실(현 禮山郡 古德面 好音里)에서 사망하였다.


그 후 메스트르 신부의 유해는 1863년 9월 황무실에서 사망한 동료 선교사 랑드르(Landre, 洪) 신부의 묘와 함께 1970년 4월 30일 구합덕 본당 경내로 이장되었다.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입국을 위해 오랫동안 고생을 하다 보니, 실제로 한국에서 사목한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한국 교회의 발전에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특히 성영회(聖嬰會) 창설이 특기할 만하다. 여러 지역을 순회 전교하는 가운데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는 고아들이 많은 현실을 감안하여 그들에 대한 구제 사업에 관심을 갖고 전개한 성영회의 기아 구제 사업은 한국에서는 최초로 시행된 고아 보호 운동으로서,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구체적인 사업 전개상 어려움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를 위해 성영회 본부에 재정적인 원조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는 우선 성영회의 창립 정신에 따라 버려져 죽어 가는 어린이들에게 세례를 주어 영혼을 구제하는 한편, 고아들을 모아 독실한 여교우들로 하여금 돌보게 하였다. 또한 점차 고아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어린아이의 경우에는 교우 가정에 맡겨 양육하게 하였고, 그들이 커서 자립할 수 있도록 생업에 필요한 기술 교육과 직업 알선까지 도모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적극적인 노력에 감화되어 새로 입교하는 이들이 증가하였으며, 이 구제 사업도 계속 여러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성영회의 고아 구제 사업은 메스트르 신부 사후에도 계속 전개되어 고아원으로 발전하였으나, 재정적인 어려움과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증대됨으로써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출처 : 편찬실, 한국가톨릭대사전 제4권]



쟝 마리 피에르 엘리아생 랑드르(Jean Marie Pierre Eliacin Landre, 1828-1863년) 신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은 요한. 한국 성인 홍(洪). 1828년 1월 5일 프랑스의 몽레알(Montreal)에서 태어나 26세 때인 1853년 12월 17일 오슈(Auch)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성직자가 되기를 희망하였던 그는 서품 후 소신학교 교사, 본당 보좌 신부 등을 거쳐 1856년 10월 5일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 후 한국 선교사로 임명된 랑드르 신부는, 1858년 3월 21일 프랑스를 출발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다가 1861년 4월 7일에야 겨우 한국에 입국하였다.



입국 후 충청도의 서부 지역에 파견되어 내포(內浦) 지역을 중심으로 사목하였으나, 전교 활동을 펼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중병에 걸려,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1863년 9월 16일 충청도 예산의 황무실(古德面 好音里)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그는 그의 사망지인 황무실에 묻혀 있었는데, 그보다 앞서 사망한 메스트르(Maistre, 李) 신부의 묘와 함께 1970년 4월 30일 구합덕(舊合德) 본당의 경내로 이장되었다. [출처 : 이유림, 한국가톨릭대사전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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