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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쿠스 카라치올로(Franciscus Caracciolo, 또는 프란치스코 카라치올로)는 1563년 10월 13일 이탈리아 중부 아브루초(Abruzzo) 지방의 빌라 산타 마리아(Villa Santa Maria)에서 태어나 아스카니오(Ascanio)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 돈 페란테 카라치올로(Don Ferrante Caracciolo)는 나폴리(Napoli)의 유명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빌라 산타 마리아의 영주였고, 그의 어머니 이사벨라 바라투치(Isabella Barattucci) 또한 테아노(Teano)의 귀족 출신이었다. 그래서 성 아스카니오 카라치올로는 어린 시절부터 귀족 신분에 걸맞은 교육을 받았고, 온유하고 정직한 성품을 지닌 평범한 귀족 청년으로 자랐다. 그런데 22살이 되던 1585년에 나병으로 여겨지는 심각한 피부병에 걸려 생명마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만약 병이 나아 건강을 회복하면 하느님께 자신의 삶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는데, 그 뒤로 기적적으로 빠르게 회복되었다. 그는 자신의 서원을 지키고자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나폴리의 산 도메니코 마조레(San Domenico Maggiore) 수도원에 들어가 사제가 되기 위한 신학 공부를 하고 1587년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후 그는 노예로 잡혀가는 사람들에 대한 돌봄과 사형수들이 거룩한 죽음을 준비하도록 영적인 도움을 주는 ‘정의의 백의(白衣) 사제단’(Bianchi della Giustizia)에 가입하였다. 그 무렵 제노바(Genova)의 귀족 출신으로 사제가 된 조반니 아고스티노 아도르노(Giovanni Agostino Adorno)가 1588년에 사목활동과 엄격한 규율을 결합한 새로운 사제회를 설립하기로 하고, 나폴리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Santa Maria Maggiore) 수도원 원장인 파브리치오 카라치올로(Fabrizio Caracciolo)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리고 그에게 추천받은 신부에게 동참을 권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우연히 같은 이름을 가진 성 아스카니오 카라치올로에게 그 편지가 잘못 전해졌다. 하지만 편지 내용에 감동한 성 아스카니오 카라치올로는 이를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고 아도르노 신부를 찾아가 동참의 뜻을 밝혔다. 결국 이들 셋은 나폴리 근처 카말돌리회의 수도원에 가서 40일간 피정을 하며 새로운 수도회의 규칙을 작성했다. 그 후 성 아스카니오 카라치올로와 아도르노 신부는 동료 사제 10명을 더 모아 교황의 승인을 얻기 위해 로마(Roma)로 갔다. 그들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에게 영감을 받아 새로운 수도회를 ‘작은 수행 성직자 수도회’(Ordo Clericorum Regularium Minorum, C.R.M.)로 명명하고 1588년 7월 1일 교황 식스토 5세(Sixtus V)에게 승인을 받았다. 이 수도회는 관상과 활동을 동시에 추구하면서 청빈 · 정결 · 순명의 세 가지 서원과 함께 네 번째 특별 서원을 하는데, 그것은 수도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고위직에 취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요 의무 중 하나로 회원들이 성체 조배를 계속 이어가며 금욕과 고행을 실천하도록 규정하였다. 아도르노 신부는 첫 번째 원장으로 선임되었고, 이듬해 4월 9일 성 아스카니오 카라치올로와 함께 종신서원을 했다. 이때 성 아스카니오 카라치올로는 수도명으로 프란치스코를 선택했다. 수도회의 공동 설립자가 된 성 프란치스코 카라치올로와 아도르노 신부는 나폴리 교외의 한 집을 수도원으로 정하고, 이어서 아도르노 신부가 이전에 대사로 있었던 에스파냐에 진출하고자 했다. 하지만 에스파냐 정부 당국이 수도원 건립 허가를 내주지 않아 결국 이탈리아로 돌아와야 했다. 귀국 길에 제노바에서 배가 난파되어 굶주림과 탈진으로 거의 죽을 지경까지 갔다가 겨우 해안에 도착해 나폴리로 돌아왔다. 성 프란치스코 카라치올로는 중병에 걸렸다가 겨우 회복되었지만, 수도회 관련 업무로 로마에 다녀온 아도르노 신부가 1591년 마흔 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성 프란치스코 카라치올로는 마지못해 그의 뒤를 이어 1593년 3월 9일 수도회의 초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교황 식스토 5세가 하사한 나폴리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알라 피에트라산타(Santa Maria Maggiore alla Pietrasanta) 성당을 수도원으로 사용하며 주로 감옥과 병원에서 사도직을 수행하였다. 총장이 된 후에도 그는 다른 수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방 청소나 침대 정리, 주방 일 등을 솔선하여 행하였다. 또한 고해소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신자들에게 영적인 도움을 주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거리에 나가 구걸하기도 했다. 성체에 대한 깊은 신심을 지녔던 그는 자주 밤을 새워 성체 조배를 했고, 수도회에 지속적인 성체 조배를 도입하였다. 그는 1595년과 1598년에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Felipe II)와 펠리페 3세(Felipe II) 왕의 보호 아래 수도회를 설립하기 위해 두 차례 에스파냐를 방문하여 마드리드(Madrid), 바야돌리드(Valladolid), 알칼라(Alcala)에 수도원을 세웠다. 7년 동안 총장으로 봉사하던 그는 과로와 건강 악화로 인해 총장직을 사임하고 산타 마리아 마조레 수도원의 원장 겸 수련원장 직무를 맡았다. 그는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의 주교직 제의를 끝까지 사양하고 수도 생활에 정진하다가 1607년에 모든 직무에서 내려와 요양하며 기도 생활에 전념하였다. 나폴리 수도원의 작은 방에서 지내던 그는 성 필립보 네리(Philippus Neri, 5월 26일)가 캄포바소(Campobasso) 근처 아뇨네(Agnone)에 세운 오라토리오 공동체를 작은 수행 성직자 수도회의 신학원으로 사용하라는 제의를 받고 그곳으로 향하는 길에 로레토(Loretto)에 들러 성가정 성당(Basilica della Santa Casa)에서 하룻밤을 기도하며 보냈다. 그가 성모 마리아에게 도움을 청하며 기도했을 때, 아도르노 신부가 환시 중에 나타나 그가 곧 죽을 것임을 알려주었다. 건강한 모습으로 아뇨네에 도착한 그는 곧 열병에 걸려 고생하면서도 수도회 회원들에게 규칙에 충실할 것을 간절히 호소하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 그리고 1608년 6월 4일 성체 성혈 대축일 전야에 “가자, 천국으로 가자!”라고 외친 후 44살의 나이에 선종하였다. 그의 시신은 나폴리로 옮겨져 산타 마리아 마조레 알라 피에트라산타 수도원 성당에 묻혔다. 성 프란치스코 카라치올로는 1769년 6월 4일 교황 클레멘스 14세(Clemens XIV)에 의해 시복되었고, 1807년 5월 24일 교황 비오 7세(Pius V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는 1838년에 나폴리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고, 1844년에 그의 유해를 나폴리의 산타 마리아 디 몬테베르지넬라(Santa Maria di Monteverginella) 성당으로 옮겨 모셨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성광(聖光, Ostensorium)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주로 묘사되는데, 이는 그의 성체 신심과 지속적인 성체 조배를 수도회에 도입한 것을 상징한다. 옛 “로마 순교록”은 6월 4일 목록에서 아브루초 지방 아뇨네에서 나폴리의 명문 카라치올로 가문 출신으로 작은 수행 성직자 수도회를 설립하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놀라운 사랑과 성체에 대한 신심을 전파하려는 열렬한 소망으로 가득 찼던 성 프란치스코 카라치올로 신부를 기념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가 나폴리에서 공경받고 있고, 교황 비오 7세에 의해 성인 목록에 올랐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몰리세주(Molise州)의 아뇨네에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놀라운 애덕에 감동해 작은 수행 성직자 수도회를 설립한 성 프란치스코 카라치올로 사제가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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