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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노(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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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브루노 (Bruno)
축일 10월 6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설립자, 은수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032?-1101년
같은이름
성인 기본정보

   성 브루노는 1032년경 독일 쾰른(Koln)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좋은 교육을 받은 것 외에 알려진 사실은 거의 없지만 문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전해진다. 쾰른의 성 쿠니베르토(Cunibertus) 학교를 거쳐 프랑스 랭스(Reims)의 주교좌성당 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1055년경에 쾰른으로 되돌아와서 사제품을 받았고, 다시 1056년에 랭스로 가서 대성당 학교에서 문법학과 신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는 주교좌성당 참사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대성당 학교의 교장으로서 1074년까지 거의 20년 가까이 재직하였다. 이때 그가 가르친 제자 중 한 명이 훗날 교황 복자 우르바노 2세(Urbanus II, 7월 29일)가 되었다. 그는 또한 교황 성 그레고리오 7세(Gregorius VII, 1073~1085년 재위)의 개혁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교회 쇄신과 성직자들의 생활을 개혁하고자 힘썼다.

   그런데 1067년에 성직매매로 마나세(Manasses de Gournay)가 랭스 교구의 대주교로 임명되는 일이 발생했다. 성 브루노는 앞장서서 이를 비판하고 주교좌에서 사임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마나세는 성 브루노를 비롯한 반대 세력들을 회유하거나 위협하기도 했지만 아무런 소용없었다. 게다가 교회 재산을 사유화해서 많은 비판을 받아 결국 파면되고 말았다. 성 브루노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1076년 쾰른으로 피신했다가 마나세가 파면된 후인 1080년에 랭스로 돌아왔다. 그동안의 모습을 눈여겨본 교구의 성직자들과 교구민들은 성 브루노를 랭스의 새로운 대주교로 추천했으나 그는 이를 극구 사양하였다. 그즈음 그는 세속을 떠나 고독 속에서 가난과 참회의 관상 생활을 하는 은수자로 살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는 1082년 2명의 동료와 함께 랭스를 떠나 몰렘(Molesme)의 성 로베르토(Robertus, 4월 17일)를 찾아가 그의 지도하에 은수 생활을 시작했다. 성 브루노는 스승의 조언을 받아 1084년에 6명의 동료와 함께 그르노블(Grenoble)로 이주하여 적막한 알프스 산속에 은수처를 마련했다. 그르노블의 주교이자 그의 제자인 성 후고(Hugo, 4월 1일)는 샤르트뢰즈(Chartreuse)라는 장소를 성 브루노에게 제공해주었다. 이곳은 해발 1,067m에 자리한 골짜기로 험준한 산들로 둘러싸여 인적이 없는 곳이었다. 성 브루노와 동료들은 이곳에 경당과 개인 은수처를 만들고 성 베네딕토(Benedictus)의 규칙을 엄격히 준수하며 엄격한 침묵 생활을 실천했다. 이것이 카르투지오회(Ordo Carthusians)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극도의 가난을 실천하며 기도와 묵상, 노동과 성경 필사 작업을 했다. 성 브루노는 시편과 성 바오로(Paulus)의 편지들에 대한 주석을 쓰기도 했다.

   1090년 성 브루노는 옛 제자였던 교황 복자 우르바노 2세의 부름을 받고 로마(Roma)로 갔다. 교황의 명령에 순명해 6년 만에 은수처를 떠난 성 브루노는 이후 교황의 고문으로서 성직자들의 생활 개혁 등 교회 내의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데 협력했다. 얼마 후 성 브루노는 그를 이탈리아 남부 레지오 칼라브리아(Reggio Calabria) 교구의 대주교로 임명하려는 교황을 설득해 다시 은수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다. 제자들과 함께 로마를 떠나 칼라브리아(Calabria)에 정착한 성 브루노는 샤르트뢰즈에서와 같은 생활을 시작했다. 그들의 생활에 감명받은 시칠리아섬(Sicilia Is.)의 영주 로제(Roger) 백작으로부터 라 토레(La Torre)의 땅을 기증받아 이곳에 ‘라 토레의 성모 마리아 은수처’를 설립하였다. 성 브루노와 동료들은 각자 독립된 은수처에서 침묵과 고독 속에 지내다가 매일 아침 · 저녁 기도 시간에 성당에서 만났고, 대축일에만 함께 모여 식사를 했다. 그들의 주요 일과 가운데 하나는 성경 사본의 필사였다.

   성 브루노는 1101년 7월 27일 교황 파스칼 2세(Paschalis II, 1099~1118년 재위)에게 자신이 설립한 수도회의 생활 방식을 인가받았다. 그리고 그는 10월 6일에 라 토레 수도원의 분원인 보스코(Bosco)의 산 스테파노(San Stefano) 은수처에서 선종해 그곳에 묻혔다. 그의 유해는 1122년에 라 토레의 성모 마리아 수도원으로 옮겨졌고, 1193년 다시 보스코의 산 스테파노 성당에 안치되었다. 공적인 명예를 거부하는 카르투지오회의 규칙에 따라 성 브루노에 대한 공식적인 시성식은 거행하지 않았다. 다만 레오 10세(Leo X) 교황이 1514년 구두로 그를 성인품에 올리며 카르투지오회 내에서 성 브루노에 대한 공적인 공경 예절을 거행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1623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Gregorius XV)에 의해 축일이 10월 6일로 정해졌고, 1674년에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가 보편 교회에서 성 브루노의 축일을 기념하도록 했다. 교회 미술에서 성 브루노는 보통 흰 수도복을 입고 해골과 책, 십자가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옛 “로마 순교록”과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모두 10월 6일 목록에서 카르투지오회의 설립자인 성 브루노 신부에 대해 기록하였다.♣

참고자료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상) - '성 브루노 사제',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429-432쪽.
  • 요셉 봐이스마이어 외 저, 전헌호 역, 교회 영성을 빛낸 수도회 창설자: 중세교회 - '브루노와 카르투시오 수도회', 서울(가톨릭출판사), 2001년, 17-55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6권 - '브루노',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1998년, 3732-3734쪽.
  • 헤수스 알바레스 고메스 저, 강운자 편역, 수도생활 역사 II - '카르투지오회', 서울(성바오로), 2002년, 84-96쪽.
  •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성브루노 사제', 서울(성바오로), 2002년, 253-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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