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이명서 베드로(Petrus)는 충청도의 어느 열심한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박해를 피하여 이리저리 다니다 보니 자연 고향을 등지게 되었고, 나중에는 완주군 구이면 고소대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고소대 사람이라고도 한다. 그는 1866년에 다시 전주 성지동으로 이사하여 살았는데, 온순한 성품과 착한 마음씨를 지녔고 예의범절이 깍듯하며 착하고 어진 사람으로도 널리 알려졌으나 가슴앓이로 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성지동 신자들이 다가올 박해를 예상하고 한 자리에 모였을 때 그는 “사세가 그렇게 다급하게 되었다면 빨리 피해야지요, 나는 병 때문에 피하지 못할 처지이고 천주님의 안배에 의지할 따름입니다. 필요하시다면 천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내 병은 영원히 낫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순교할 뜻을 밝혔다. 그러나 1866년 12월 5일 저녁에 포졸들이 이 베드로의 집을 덮치자 심경이 달라진 그는 생에 대한 미련이 남아 포졸에게 애걸하였으나, 옆에 있던 조화서의 말을 듣고 “내 아까는 무서워서 그랬지만 사실은 나도 신자올시다” 하고 말하였다. 이리하여 그도 전주로 끌려가 감사 앞에서 문초를 받았다. 가슴앓이 환자인 줄 알면서도 감사는 죄수의 손발과 머리를 묶어 고정시켜 놓고 등허리를 난타하였다. 배교하라는 감사의 말에 그는 “수십 번을 죽는다 해도 천주교를 따를 것이오.”라고 하면서 배교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마침내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우리의 소원이 이렇게 빨리 이루어지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하고 기뻐하였고, “오늘 치명하면 곧장 천국에 들어가 진복자들이 될 것입니다. 이 행복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며 기뻐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는 전주 숲정이 형장에서 1866년 12월 13일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고, 이때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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