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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도 3세(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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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페르디난도 3세 (Ferdinand III)
축일 5월 3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활동지역 카스티야(Castilla)
활동연도 +1252년
같은이름 페르디난두스, 페르디난드
성인 기본정보

   성 페르디난두스 3세(Ferdinandus III, 또는 페르디난도 3세)는 1198/9년 또는 1201년 여름에 중세 후기 에스파냐 북서부에 있던 레온 왕국(Kingdom of Leon)의 알폰소 9세(Alfonso IX) 왕과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카스티야의 알폰소 8세 왕의 장녀인 베렝가리아(Berengaria)의 아들로 살라망카(Salamanca) 교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사촌인 포르투갈의 테레사(Teresa)와 첫 번째 결혼을 했는데, 근친이란 이유로 교황으로부터 무효 선언을 받았다. 그래서 1197년에 베렝가리아와 다시 결혼했는데, 그녀 또한 가까운 친척이었다. 그들은 성 페르디난도 3세를 비롯해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1204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Innocentius III)에 의해 근친 간의 결혼으로 무효화되었다. 그 후 베렝가리아는 알폰소 9세를 떠나 자녀들과 함께 아버지의 고향인 카스티야 왕국으로 돌아갔다. 1214년 카스티야의 알폰소 8세가 사망하자 그의 열 살 된 아들인 엔리케 1세(Enrique I, 1214~1217년 재위)가 왕위를 계승하였고, 그의 누이인 베렝가리아가 섭정을 맡았다. 엔리케 1세 왕이 1217년 갑작스러운 사고로 목숨을 잃은 후 베렝가리아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곧 자신의 권리를 아들인 성 페르디난도 3세에게 양도하여 1217년에 성 페르디난도 3세가 카스티야 왕국의 왕이 되었다.

   성 페르디난도 3세가 왕이 된 후 어머니는 그의 조언자로서 왕권을 지키는데 헌신하였다. 성 페르디난도 3세는 어머니의 도움으로 카스티야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의 음모와 반란에 맞서 왕권을 지켰고, 반란 세력의 처벌보다는 온화한 성품으로 반란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힘썼다.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한 그는 1219년 11월 30일 독일 남서부 슈바벤(Schwaben)의 필립 왕의 딸인 베아트릭스(Beatrix) 공주와 결혼하였다. 그는 행복한 결혼 생활 속에서 일곱 아들과 세 명의 딸을 두었다. 그의 통치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업적은 ‘재정복’이었다. 그는 카스티야 왕국을 통합한 후 30여 년의 통치 기간 중 무어인들과 싸움에 헌신하였다. 그의 목표는 에스파냐 전체를 이슬람의 세력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었다. 그는 1224년에 원정을 시작해 인근 지역을 정복하며 우베다(Ubeda), 코르도바(Cordoba), 카디스(Cadiz) 그리고 끝내는 1248년에 세비야(Sevilla)에서 무어인들을 몰아내고 안달루시아(Andalusia) 지방 대부분을 회복함으로써 ‘안달루시아의 정복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1230년에 아버지인 알폰소 9세가 사망한 후 성 페르디난도는 두 명의 이복 누이에게 종신 영지를 제안하고 왕위를 계승하여 1231년 두 왕국을 평화롭게 통합하여 ‘카스티야 레온 왕국’(Corona de Castilla)을 세웠다. 그리고 1236년경 베아트릭스 왕비가 사망한 후 1237년 부르고스(Burgos)에서 잔 드 담마르탱(Jeanne de Dammartin, 또는 잔 드 퐁티외[Jeanne de Ponthieu])와 재혼하였다.

   성 페르디난도 3세는 계속되는 재정복 전쟁을 통해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무어인들을 쫓아내고 무슬림 세력으로부터 탈환한 도시에 그리스도인들을 다시 정착시키고 도미니코 수도회와 작은 형제회의 수도자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교구들을 복원하는 데도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학식이 높은 톨레도의 대주교 로드리고 히메네스를 재상으로 모셔 행정을 이끌었고, 부르고스 대성당(Burgos Cathedral)을 재건했으며, 1243년에는 중세 시대 가장 크고 중요한 대학 중 하나인 살라망카 대학교를 확장하여 설립하였다. 또한 세비야의 이슬람 사원을 성당으로 개조하는 등 수많은 교회 건축을 후원하였다. 위대한 왕이자 무적의 장군이었지만 성 페르디난도 3세는 관대하고 모범적인 신앙인이었다. 그는 무슬림이나 유대인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도 그들에 대한 잔혹 행위를 금지하고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며 수도승들을 통해 그들의 개종을 장려하였다. 그가 세속적인 승리와 영광에 도취하지 않고 겸손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앙심과 성모 마리아에 대한 특별한 신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훌륭한 통치자이자 청렴하고 겸손하며 정의로운 임금으로 에스파냐에서 큰 존경을 받았다.

   성 페르디난도 3세는 아프리카 해안까지 내려가 무슬림에게 억류된 수많은 그리스도인 노예들을 해방하려는 소망을 갖고 원정을 준비하던 중 중병에 걸렸다. 그는 겸손하게 고해성사를 받고 세고비아(Segovia) 주교에게 노자성체를 받은 후 1252년 5월 30일 선종하였다. 임종을 앞두고 그는 아들인 알폰소 10세(1252~1284년 재위)를 축복하며 정치 생활과 사생활 모두에서 항상 하느님을 생각하며 살라고 당부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그가 작은 형제회의 수도복을 입은 채 거행되었고, 아들에 의해 세비야의 산타 마리아 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ia de la Sede, 옛 이슬람 모스크)에 안장되었다. 그는 현재 가톨릭교회에서 성인으로 공경받는 유일한 에스파냐 군주이며, 도덕적 순수성 · 영웅적 업적 · 관대함과 온유함 · 백성에 대한 봉사 정신에 있어서 탁월한 그리스도교 왕의 모범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에 대한 공경을 세비야에서 시작하여 에스파냐 전역과 보편 교회로 확대되어 나갔다. 교황청 성인 시성부의 시성 목록에 따르면, 그는 1655년 5월 31일 교황 알렉산데르 7세(Alexander VII)의 공경 승인을 통해 시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가톨릭 백과사전 및 기타 자료에서는 1671년 2월 4일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가 그를 성인품에 올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교회 미술에서 성 페르디난도 3세는 왕관을 쓰고 가슴에 십자가를 단 기사의 모습으로, 손에는 주로 그가 사용하던 로베라(Lobera) 검과 왕권을 상징하는 보주(寶珠)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또는 말을 타고 무어인들과 싸우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또한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정복한 도시들을 상징하는 열쇠와 십자가 깃발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도 표현된다. 옛 “로마 순교록”은 5월 30일 목록에서 에스파냐 세비야에서 카스티야와 레온의 왕인 성 페르디난도 3세가 뛰어난 덕행으로 성인의 칭호를 얻었으며, 신앙 전파에 대한 열정으로 널리 알려진 그가 무어인들을 정복한 후 지상의 왕국을 떠나 행복하게 천상 세계로 갔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에스파냐 세비야에 카스티야와 레온의 왕으로서 현명한 통치자이자 예술과 학문에 조예가 깊으며 신앙 전파에 힘쓴 성 페르디난도 3세가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참고자료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성 페르디난도 3세 왕',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416-419쪽.

사진/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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