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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투스 요세푸스 라브르(Benedictus Josephus Labre, 또는 베네딕토 요셉 라브르)는 1748년 3월 26일 프랑스 북부 아르투아(Artois) 지방의 아메트(Amettes)에서 부유한 농부의 열다섯 자녀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는 사제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기 위해 12살 되던 해에 에랭(Erin) 교구의 사제인 삼촌에게 보내졌다. 그곳에서 그는 라틴어, 문법, 수학 교육을 받고 신학교에 들어가 사제가 될 계획이었다. 1761년 9월 4일 그는 견진성사를 받으며 첫영성체를 했고, 16살까지 꾸준히 학업에 정진하며 남몰래 고행을 실천하였다. 그러던 중 삼촌의 사제관에 있던 성경과 성인전에 몰두하면서 트라피스트회 수도승이 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는 삼촌의 조언대로 부모의 허락을 받기 위해 아메트로 돌아갔으나 좀 더 나이가 들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씀을 듣고 다시 삼촌의 본당으로 왔다. 그가 18살이던 1766년 콜레라 전염병이 도시를 덮쳤을 때 그는 삼촌과 함께 환자들을 돌보는 데 힘썼다. 하지만 그해 9월에 삼촌이 콜레라로 선종하자 그는 11월에 부모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계속해서 트라피스트회 수도승이 되고자 노력했다. 그의 부모는 계속 반대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생각해 허락했고, 외삼촌 신부의 권유로 1767년 카르투지오 수도회에 입회를 신청하였다. 그런데 아직 스무 살이 되지 않아 서두를 필요가 없어 학교에 가서 먼저 그레고리오 성가와 철학을 공부하고, 그해 10월에 수련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몇 주 후에 건강 등의 문제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 뒤로도 몇 차례 여러 수도원에 입회를 시도했으나 나이나 건강 그리고 공동체 생활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 등으로 거부당했다. 그러면서 건강도 악화하였고, 결국 자신의 소명은 수도 성소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성 베네딕토 요셉 라브르는 병에서 회복되면서 차츰 자신의 성소가 무엇인지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작은 형제회 제3회에 입회한 그는 병중에 있을 때 서원했던 대로 청빈과 순례의 삶을 살고자 1770년 22살이 나이에 로마(Roma)로 순례를 떠났다. 중간에 부모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는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수도원에 입회할 예정이라 적었지만, 하루하루 구걸로 생활하며 맨발로 걸었던 로마로의 순례는 그의 마음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는 로마의 성 알렉시오(Alexius, 7월 17일)나 작은 형제회 제3회원으로 순례자의 모범이었던 성 로코(Rochus, 8월 16일)처럼 가족과 세속의 모든 것을 뒤로하고 세상 한가운데서 참회하는 순례자로서 주요 성지를 순례하며 사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수도자가 되려는 꿈을 포기하고 7년 동안 서유럽의 주요 성지와 성당 이곳저곳을 순례했는데, 이탈리아의 로레토(Loreto) · 아시시(Assisi) · 바리(Bari), 스위스의 아인지델른(Einsiedeln), 프랑스의 파레르모니알(Paray-le-Monial), 에스파냐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등지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무소유를 실천하는 순례자로서 어디를 가든 항상 맨발로 다녔고 누더기 망토와 몇 권의 책 외에는 재산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거지 행색이었기에 미친 사람으로 놀림을 받거나 중상과 비방을 당하기 일쑤였다. 순례자를 존경하던 중세와는 달리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순례자(방랑자)는 더는 환영받지 못했고, 조롱과 학대를 받거나 당국의 불신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게다가 머물 곳도 없어서 나쁜 날씨에도 노천이나 추녀 밑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을 하느님을 위해 봉헌하는 고통을 받아들였다. 그는 오랜 순례 중에도 몇 시간씩 성당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고, 며칠씩 외딴곳에서 기도하며 지내곤 했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6년을 매년 로레토 성지를 순례할 때 외에는 늘 로마에서 지냈다. 낮에는 주로 성당에서 기도하며 지냈는데, 특히 40시간 성체조배를 좋아해 그 신심이 시행되는 성당이면 어디든 찾아가 기도에 전념했고, 밤에는 콜로세움 폐허에서 새우잠을 잤다. 시간이 지나면서 로마 사람들도 이 거지에게 뭔가 특별한 점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콜로세움의 거지’로 불렸고, 귀한 집안 출신인데 죄를 지어 속죄하고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는 종종 기도 중에 탈혼에 빠지거나 공중 부양 등의 기적을 행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그러나 오랜 고행으로 건강을 해친 그는 1783년 성주간 화요일 내내 기도하며 보낸 후 다음날 수요일에도 성체조배를 위해 평소 가장 좋아하던 산타 마리아 아이 몬티(Santa Maria ai Monti) 성당에 갔다가 제대 앞에서 졸도하듯 쓰러졌다. 이를 본 자카렐리라는 인근 정육점 주인은 그를 측은히 여겨 자기 가게 뒷방으로 데려가 사제를 불러 병자 성사를 받도록 해 주었다. 성 베네딕토 요셉 라브르는 마음의 평화를 간직하고 그해 4월 16일, 35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임종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 시민들은 ‘성인이 돌아가셨다’라고 외쳤고, 그의 장례미사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였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그가 좋아하고 마지막으로 기도했던 성당에 묻혔는데, 그의 무덤에서 바로 많은 병자가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로마의 시민들은 경건함과 성체에 대한 헌신으로 유명했던 ‘새로운 프란치스코 성인’의 성덕을 잊지 않았고, 그의 고해 사제가 쓴 전기를 통해 그에 대해 더 많은 사람이 알게 되면서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성인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그는 1860년 5월 20일 교황 복자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시복되었고, 1881년 12월 8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 베네딕토 요셉 라브르는 노숙인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고, 서방 교회보다는 동방 교회에서 더 많이 알려진 순례자이자 방랑자로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보’가 된 그리스와 러시아의 성인들과 견줄만한 위대한 성덕을 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평소에 “이 세상에서 우리 모두는 천국을 향한 순례자”라고 했던 그의 말대로 교회미술에서 그는 순례자로서 지팡이와 묵주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주로 묘사된다. 옛 “로마 순교록”은 4월 16일 목록에서 로마에서 자기비하와 위대한 자발적 청빈으로 유명한 증거자 성 베네딕토 요셉 라브르의 천상 탄일을 기념한다고 전해 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성 베네딕토 요셉 라브르가 청소년 시절부터 고행의 삶을 갈망하여 누더기 같은 옷 한 벌만 걸치고 구걸로 끼니를 때우며 유명한 성지들을 순례하는 고된 여정을 떠났으며, 가는 곳마다 경건함과 고행의 모범을 보인 그는 로마를 순례 여정의 최종 목적지로 삼아 극도의 가난 속에서 기도에 전념하며 살았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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