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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룻기: 내용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7-26 조회수3,581 추천수1

[김혜윤 수녀의 성서말씀나누기] 룻기 (3-7) : 내용 (1-5)

 

 

상실의 아픔 속에 필요한 것은 마지막 힘을 다한 용기와 겸손

 

사람이 가장 누추하고 비굴해지는 때는 「상실」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가 아닐까 한다. 지금껏 쌓아온 재산과 명예를 한 순간에 잃을까봐,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을 잃을까봐, 추한 현실을 못견뎌 하면서도 거기에서 선뜻 돌아서지 못한다.

 

그러나, 그런 상실과 절망의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마지막 힘을 다한 용기와 겸손, 자기 존중의 마음이 아닐는지….

 

서정주 시인의 「꽃밭의 독백」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그 어떤 상실 앞에서도 자신의 긍지를 지키는 것이 곧 삶을 지키는 길임을,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세상과 인생에 대해 가져야할 인간 본연의 자세임을 가르쳐 주는 구절이라 생각되었다.

 

연말과 신년 벽두를 강타한 동남아 지역의 해일은 사실 「그들만의 재앙」이 아니었다. 숨겨진 지뢰를 피하듯, 수많은 복병을 감수하고 살아가는게 우리의 삶이며 현실이기 때문이다.

 

결국, 아무 생각 없이 보내는 하루 하루는 하느님이 주신 최고의 기적이며 선물이라는 결론에 다시 이르게 된다.

 

갑작스레 해일이 덮치듯 모든 것을 「상실한」 여자들이 또 있었으니, 바로 나오미와 룻이다.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망가진 운명과 비관적 상황에서, 나약한 그녀들이 어떻게 자신과 가족의 운명을 지켜낼 수 있었는지, 그녀들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기로 하자.

 

 

구조와 내용

 

룻기는 다윗의 증조모 룻의 이야기이다. 저자는 그녀가 다윗의 할아버지 오벳을 낳게된 경위를 소개하고 있는데, 각 장(暲)은 장소적 배경과 등장인물에 따라 배열되어 있다. 그 구분을 그대로 따라가며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1장,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모든 설화나 소설이 그러하듯, 룻기의 첫 부분은 이야기가 시작되는 배경과 상황을 설명한다. 여기에서 특징적으로 부각되어 있는 주제는 「잃음」 혹은 「상실」이다. 「먹을 것이 없어서」 모압으로 이주하고, 거기에서 남편을 「잃고」, 두 아들마저 「잃은」 나오미의 모습이 부각되어 있기 때문이다.

 

 

1, 1~7(도입)

 

이 이야기의 배경은 「판관 시대」로 되어 있다. 구약성서의 많은 책들이 그 서두에 시간적 배경을 명시하고 있는데(아모 1, 1; 이사 1, 1 등), 이는 제시된 이야기가 실제로 그때에 저술되었음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소개될 이야기의 실제적, 역사적 「사실성」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러하다. 유다 베들레헴에 살고 있던 엘리멜렉은 심한 가뭄 때문에 부인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으로 이주하지만(1절), 머지않아 죽음을 맞게 된다(3절). 두 아들은 거기서 오르바와 룻이라는 모압 여인들과 결혼하는데(4절), 그들 이름이 상징하는 것처럼(정확하지는 않지만 큰 아들의 이름 말론은 「질병」을, 둘째 아들 킬론은 「황폐한」이라는 뜻을 가진다) 모두 젊은 나이에 죽는다(5절).

 

고대 근동, 특별히 이스라엘 부족사회에서, 집안의 남자들이 모두 죽었다는 것은, 남아있는 여성이 모든 것을 상실했음을 의미했다(출애 22, 21; 신명 24, 19~21 등).

 

남편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여인은 아들의 보호를 받게 되는데, 아들들마저 모두 잃은 나오미는 그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게 된다.

 

더욱이 이방국에서 살고 있었기에 국가와 민족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보호에서도 제외되는데, 이런 급작스런 불행에 결국 나오미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고자 한다(6절). 「빵의 집」이라는 의미를 가진 베들레헴에서 그녀는 정말 빵을, 즉 목숨을 얻을 수 있을까?

 

 

상실의 극복, 평화

 

교회가 「세계 평화의 날」로 제정한 1월 1일은 성모님의 축일(천주의 모친 대축일)과 병행되어 있다.「평화의 모후」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세계 평화의 주도적 역할을 하고 계신 성모님의 생애와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룻의 생애는 거창한 슬로건이나 정치적 담론과는 거리가 멀었다.

 

진정한 평화는 구호나 공적담론의 성토를 통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에 대한 존중과 그 삶을 인도하시는 하느님께의 경외를 통해서 실현되는 것임을, 그녀들은 자신들의 소박한 삶을 통해 조용히 증명해 준 것이다.

 

세기적 재앙이라고 하는 그 해일만 아니었다면 여전히 정감 있고 수줍은 눈빛을 가지고 있었을, 동남아시아 작은 섬의 그녀들의 눈물에서, 무서운 상실의 아픔을 읽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그들이 삶을 포기하지 말기를, 그리고 용기를 내어 자신의 운명과 화해하기를, 멀리서나마 기원해본다. [가톨릭신문, 2005년 1월 16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깊은 신뢰와 존중과 사랑은 세상 난관 극복하는 삶의 본질

 

나는 홍역을 앓은 적이 없다. 옛날이지만 예방접종을 꼼꼼히 해두신 신식 어머니를 둔 덕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커가면서는 사는게 온통 홍역이다. 새로운 사람, 사건, 환경을 만나기만해도, 매번 홍역을 치르는 듯한 심정이 되니 말이다.

 

나오미와 룻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그녀들」의 이야기라고 쉽게 방관하거나 타자화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녀들의 고통을 이제는 지켜볼 자신이 없어져서 일지도 모르겠다. 오늘 살펴볼 나오미의 결단에서는 사랑하는 이들을 자신의 고통에서 지키려는 어머니의 강인한 의지를 만나게 된다.

 

 

1, 8~21

 

대화체가 많이 사용되고 있는 룻기에서, 제일 먼저 말을 꺼내는 이는 나오미이다. 젊은 며느리들에게 재혼과 새로운 삶을 권유하며 친정으로 돌아갈 것을 부탁한다(9절). 8절의 히브리어 본문을 보면, 나오미가 친정을 「어머니의 집」으로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매우 색다른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구약성서는 친정을 「아버지의 집」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룻기 1, 8이외에, 「어머니의 집」은 창세 24, 38과 아가 3, 4에서만 등장한다). 이 표현은 며느리들 역시 아버지가 안계심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JBC, 555), 그 정확한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 11~13절에 등장하는 수사학적 질문들은, 며느리들만은 자신의 고통에서 제외시키려는 나오미의 의지를 뚜렷이 부각시켜준다.

 

특별히 이 부분은 며느리들을 『얘들아』(11절), 『아가』(12, 13절)로 부름으로써, 나오미가 이들을 더 이상 「며느리」로 간주하지 않고 「딸」처럼 대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나는 야훼께 얻어맞은 신세란다』라는 13절의 표현은 나오미가 자신의 고통을 얼마나 신학적으로 잘 정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데, 고통스런 현실을 원망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급작스러운 죽음이나 질병, 재앙을 죄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로 간주했던 이스라엘의 전통적 사고(신명기적 의식)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데, 그러한 「신명기적 사고」는 욥기를 해설할 때 충분히 설명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언급을 생략하기로 한다.

 

결국 오르바는 친정으로 돌아가고, 룻만 시어머니 곁에 남는다(14절). 대조되는 며느리들의 결정을 히브리 본문은 「돌아가다」(슈브)와 「남다」(다바크)라는 반의적 동사들을 통해 부각시키고 있다.

 

『네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고 다시 충고하는 시어머니에게 룻은 『어머니의 민족과 하느님을 따르겠다』고 대답하며, 『죽음밖에는』 그 어느 것도 자신과 시어머니를 떼어놓지 못할 것임을 단언한다(17절). 남편이 죽으면 시어머니와의 관계도 자동적으로 무산되는 것이 일반적 관행이지만, 룻은 나오미와의 관계를 다시 새롭게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나오미는 룻의 결심을 꺾지 못하고 베들레헴으로 향한다(18절).

 

귀향한 그녀를 보자 동네 여자들은 그녀가 정말 나오미인가? 어리둥절해 하는데(19절), 「나오미」라는 이름이 「사랑스러운 자」라는 뜻을 가지므로, 『그녀가 나오미인가?』라는 질문은 『그녀가 정말 기쁨과 사랑의 사람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된다.

 

이에 나오미는 더 이상 자신을 「나오미」(우아함과 사랑스런 자)라 부르지 말고, 「마라」(괴로운 자, 혹은 쓰라림을 가진 자)로 부를 것을 부탁한다.

 

1장의 마지막(22절)은 1장 전체의 내용을 정리하고(22절ㄱ), 2장에서 전개될 내용을 암시하는(22절ㄴ), 지능적 구조를 보여준다.

 

『베들레헴에 도착한 것은 보리를 거둬들일 무렵』이라고 제시함으로써, 고통과 기아에 시달렸던 그들의 운명이, 「빵의 집」 베들레헴에서는 「반전」을 맞게 됨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본질

 

논문을 쓸 때나 읽을 때 가장 많이 발견하는 단어는 「본질적」이라는 단어이다. 꼭 필요한 부분만을 검증해내는 장르가 논문이니, 이는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본질, 쓸데없는 것을 다 정리하고 최종적으로 남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삶의 본질」도 한가지이다. 쓸데없는 것을 다 털어내고 나면, 정말로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마르타에게 『꼭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라고 하지 않으셨던가(루가 10, 41). 21절에서 나오미는 하느님이 자신을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녀는 가장 소중한 것, 즉 「삶의 본질」을 얻어 돌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며느리 룻이야 말로 하느님께서 주셨던 가장 소중한 선물이며, 그들 사이의 깊은 신뢰, 존중, 사랑은 세상의 그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삶의 본질」이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내 옆에 있었는데, 정작 나만 깨닫지 못해온, 그래서 고마운 줄을 몰랐던, 내 삶의 본질을, 이제는 알아봐 줘야하지 않을까. [가톨릭신문, 2005년 1월 23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대화’와 ‘소통’이야말로 사랑에 이르는 길임을 제시

 

지독한 상실을 알고 있는 사람의 내면은 조용하고 고독할 수밖에 없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견고함과 강인함이 그를 무리에서 구별시켜 놓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보아즈는 그 많은 일꾼들 틈에서 유독 룻을 알아봐준다. 그 이후로 그는 그녀를 외면하거나 모르는 사람처럼 대할 수 없었다. 그녀의 착하고 맑은 영혼을 이미 보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시어머니의 생계를 책임져드려야 한다는 절박함이, 가난하지만 용기를 잃지 않는 견실함이, 고함치지 않고도 세상을 향해 절규하는 슬픔이, 그녀를 군중 속에서 유리시켜 놓았던 것일까.

 

 

2, 1~13(2장의 첫째 장면)

 

2장은 「보아즈」라는 새로운 남성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되며, 그와 룻의 첫 만남을 마치 영화를 보듯이 섬세하게 묘사해준다.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찾아간 보아즈의 밭에서, 룻은 양식 이상의 소중한 의미와 희망을 만나게 된 것이다.

 

1절은 보아즈를 등장시키면서 그를 『남편 쪽의 친척』이며 『엘리멜렉의 일가』라고 소개한다. 이는 룻이 재혼할 가능성이 남아있었음을 암시하는 일종의 복선인데, 구약시대 풍속의 하나였던 「시형제 결혼」과 관련된다.

 

시형제 결혼이란 일종의 법적제도로서, 후손 없이 죽은 남자의 부인이 남편측의 가장 가까운 친척과 결혼하여 거기에서 태어난 첫 아들을 죽은 자의 자식으로 삼는 제도이다(창세 38장; 신명 25, 5~10 참조).

 

물론 당시 이스라엘에서, 룻기가 제시하는 것처럼 이방 여인과의 결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었는지는 의문의 여지를 남긴다. 민수 25, 1; 신명 23, 4; 느헤 13, 1 등은 모압인들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편입되는 것을 철저하게 금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1절이 보아즈를 등장시키는 「도입」의 역할을 했다면 2장의 진정한 스토리는 2절부터 시작된다. 여기서도 대화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는데, 처음 말을 꺼내는 사람은 룻이다. 그녀는, 외국인이라 해도 양식을 거둘 수 없는 처지일 때, 남의 밭에서 떨어진 이삭을 줍는 것을 허용하고 있던 이스라엘의 법(레위 19, 9~10; 23, 22; 신명 24, 19)을 전제로, 아무 밭에라도 가서 먹을 것을 주워오겠다고 나오미에게 말한다.

 

베들레헴에 돌아와 특별히 할 일을 얻지 못한 룻은 극빈자들이 생계를 유지하던 방법으로라도 시어머니를 부양할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결국 나오미의 승낙을 받아 일을 하러가게 된 곳은 보아즈의 밭이었고(3절), 마침 그 날은 보아즈가 예루살렘에서 돌아와 일꾼들을 만나던 날이었다. 일꾼들과 인사를 나누던 중, 보아즈는 일꾼들 틈에 섞여 있던 룻을 보게 되고, 그녀의 신상을 관리인에게 묻는다(5~6절).

 

관리인은 그녀가 나오미와 함께 온 모압 여인이며, 『일꾼들이 거두면서 흘린 이삭을 줍게 해달라고 사정』했고, 『아침에 와서 지금까지 앉지도 않고 이삭을 줍고 있다』고 설명한다(7절).

 

이 언급을 보면, 관리인이 룻의 이름을 직접 소개하는 대신 「나오미의 가족」으로 소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그녀를 이스라엘적 신분의 사람으로 소개하려는 저자의 의도를 드러낸다. 이야기를 통해 보아즈는, 룻이 자신의 가문과 「관련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이는 앞으로의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단서로 작용한다. 물론 보아즈가 알게 된 이러한 「관련」을 룻은 아직 모르고 있는 상태이다.

 

룻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 보아즈는 그녀의 형편을 자상하게 배려해준다(8~9절). 특이한 것은 그가 룻을 『딸아』로 호칭한다는 것인데, 이는 룻을 경시하는 것도, 혈연관계를 전제한 호칭도 아닌, 그저 주인과 일꾼 사이의 호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와 남편을 잃어 그 어떤 보호에서도 제외된 그녀를 「딸」로 불렀다는 것은, 보아즈를 일종의 「책임을 져줄 존재」로 암시하려는 저자의 의도를 드러낸다.

 

룻은 주인의 뜻하지 않은 호의에 감사를 표하지만, 동시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 스스로가 고백하듯이 자신은 『한낱 이국여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10절). 보아즈의 배려에 감사하는 룻의 모습으로(13절) 2장의 첫 장면은 마무리 된다.

 

 

삶을 새롭게 읽어내는 법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이렇게 아름답게 묘사된 성서가 있었나, 할 정도로 룻기는 아름다운 대화로 가득하다.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는 주인공들의 태도는, 「대화」와 「소통」이야말로 사랑에 이르는 길임을 너무도 잘 제시해 주고 있다. 더욱이 룻은 이방인이었고, 분명한 아웃사이더였기에, 그리고 그러한 신분적 소외는 남편의 죽음이라는 극단적 단절을 통해 삶과 사랑에서까지의 소외로 이어졌기에, 이들의 대화는 더욱 따뜻하게 느껴진다.

 

절망스런 삶에서 새롭게 하느님의 희망을 읽어내는 법, 룻기가 제시해주는 대화와 소통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는지. [가톨릭신문, 2005년 1월 30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투쟁이 아닌 사랑과 배려로 상생(相生)의 터전 마련해야

 

일상은, 그것이 아무리 작고 사소한 일이라 해도, 하느님의 섭리로 가득 차있다. 룻의 경우도 그랬다. 어떻게 그 많은 밭들 중에서 우연히 찾아간 곳이 보아즈의 밭이었을까…. 이렇듯 우연속에 내재하고 있는 하느님의 섭리는, 동시에 진중한 경고로 작용되기도 한다. 그 사소함을 간과한다면 어마어마한 구원의 섭리를 놓치는 것이 되니까.

 

 

2, 14~23(2장의 둘째 장면)

 

룻기 2장의 두번째 장면은 「식사 때」로 그 배경이 옮겨지면서 시작된다. 보아즈는 그녀에게 직접 빵을 권하기도 하고(14절), 일꾼들에게 일부러라도 그녀에게 이삭을 흘려주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15~16절).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룻은 그날 있었던 일을 시어머니에게 소상히 이야기하는데(17~18절), 나오미는 그녀가 가져온 많은 소득물을 보고, 경작지의 주인에게 감사의 축복을 빌어준다(19~20절).

 

유사한 축복이 이미 보아즈로부터 그의 일꾼들에게 전해진 바 있으니(2, 4 참조), 결국 보아즈는 복을 빌어준 만큼 복 빌음을 받은 셈이 되는 것이다. 밭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룻이 말하자(19절), 나오미는 그가 그들의 가까운 친척이며, 후원자(고엘)가 될 수 있는 사람임을 알려준다(20절).

 

히브리어 「고엘」은 죽은 자를 대신해서 그의 모든 재산을 책임지고 보호할 의무(레위 25, 23~28; 신명 25, 5~10)를 지는 사람으로, 동시에 모든 것을 소유할 권한을 갖는다. 당시의 관행에서 본다면 여성은 일종의 소유물이었기에, 고엘은 집안의 여성을 책임지고, 동시에 그들을 소유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나오미는 룻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장소를 확보했음에 감사드리고(22절), 룻은 추수가 끝날 때까지 보아즈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것으로 생계를 꾸려나간다(23절).

 

 

3, 1~18

 

보아즈가 룻을 처음 만난 것이 그의 밭에서였다면, 3장에서 그는 이제 그녀를 한밤중, 자기 발치께에서 발견한다. 이 전통적 제스처를 통해 룻은 보아즈에게, 배우자로서의 의무를 간청하게 된다.

 

3장 역시 두 여인의 대화로 시작된다. 추수 때로부터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오미는 룻에게 중요한 제안을 한다. 보아즈와의 결혼에 대한 것으로(1~4절), 룻에게 몸을 단장하고 보아즈의 발치에 가서 누워 있으라고 지시한다(5~7절).

 

룻은 시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하는데(5~7절), 보아즈가 한밤중에 자기 곁에 누워있는 여자를 발견하고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너는 웬 여자냐?』(9절)라는 외침은 그의 놀라움을 잘 표현해준다. 룻은 자기 이름을 밝히고, 그의 옷자락으로 자신을 덮어달라고 청한다. 이는 자신을 배우자로 삼아달라는, 전통적인 프로포즈였다.

 

「겉옷을 덮는」 행위는 겉옷 소유자의 권리에 종속됨을 상징하는 것으로(1사무 18, 4; 1열왕 11, 29~31 참조), 이러한 상징과 「주님의 날개 밑」이라는 표현은 상통적 의미를 갖는다. 하느님의 겉옷(날개 밑)으로 들어가듯이 그분의 강력한 보호권 안에 있게 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룻의 용기 있는 제안에 보아즈는 야훼께 축복의 기도를 올린 후, 그녀가 나오미의 결정을 따라 준 것에 감탄한다. 그러나 자신보다 시형제 결혼에 더 적합한 친척이 있음을 알려주며, 그 사람이 권리를 포기할 경우, 기꺼이 보호자가 될 것임을 약속해준다.

 

주도면밀하고 자상한 보아즈는 그녀가 한밤중에 타작마당에 왔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면 안된다는 것을 가르쳐주며(14절), 나오미에게 가져다줄 선물(보리 여섯 됫박)까지 챙겨준다(15절).

 

집에 돌아와서 일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는 룻은 특별히 보아즈가 『시어머니께 빈손으로 돌아가서야 되겠느냐』(17절)고 말한 부분을 강조한다. 저자는 이 표현을 통해 나오미가 이제 더 이상 빈손의 여인이 아님을, 즉 룻과 보아즈를 통해 여생이 충만히 채워질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그가 오늘 안으로 이 일을 결말짓지 않고는 못 견딜 것』(18절)이라는 나오미의 말은 신속한 결말을 예고해준다.

 

 

상생(相生)의 원칙

 

새 국회가 출발될 무렵 모두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말은 「상생」(相生)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 교묘히 서식하고 있던 「적자생존의 원칙」을 발견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적자생존의 원칙에서 보자면, 평화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관념이요, 이상일 뿐이다. 동일한 시 · 공간 아래 살아가는 둘 혹은 다수사이의 정면충돌은 사실상 불가피한 것이며 그 과정을 통해 결정되는 승-패의 긴장은 이미 정해진 비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룻기는 「상생」이 결코 허상이 아님을 제시해준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건 투쟁이나 경쟁이 아니라, 사랑과 배려임을, 등장인물 서로에 대한 깊은 공감을 통해 확인시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신문, 2005년 2월 6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축복된 삶 보장받기 위해 각자 자리 굳건히 지켜야

 

오랜만에 수녀회 본원에 돌아오면 새삼 느끼게 되는 풍요로움이 많다. 우리 수녀회의 지청원자들과 수련자들은 아침 미사 후에, 수녀원 마당에서 체조를 한다. 체조라고는 국민체조 밖에 모르는 나에겐 젊은 수녀님들의 신식 체조도 새로운 것이지만, 그 다음에 틀어주는 음악이 낯익은 것이어서,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랄라 우리들의 소풍~, 랄라 줄을 맞춰서면~, 그렇게 시작하는, 초등학교 시절 모두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던 바로 그 추억의 노래(?)였다. 소풍날, 이라…. 하느님께서 주신 매일을, 마치 은총의 소풍날로 여기며 시작하는 후배들의 풋풋한 모습에서, 아무 생각 없이 시작하던 나의 하루를 반성할 수 있었다. 보아즈를 통해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된 룻의 하루하루도, 은총과 축복의 소풍날 같지 않았을까.

 

 

4장

 

보아즈는 룻에게 친족의 의무를 다하고 싶어 하지만, 법적으로 그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음이 일종의 장애로 등장한다. 4장은 이 부분의 해결을 위해, 다음날 아침, 법적소송을 제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보아즈는 성문 법정에서 이를 소송하는데(4, 1), 당시 「성문」은 마을의 모든 사법적 사건들이 처리되던 공적장소였다.

 

보아즈는 열명의 장로들 앞에서 「아무개」(새번역)라고 하는 친족에게, 예전 엘리멜렉의 토지를 매매할 것을 제안하는데(레위 25, 25; 예레 32, 7 이하 참조), 익명의 친척은 이를 쉽게 수락한다. 그러나 이어 보아즈는 엘리멜렉의 소유물 중의 하나였던, 과부가 된 며느리와도 결혼할 것을 제안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난색을 표한다(6절). 왜냐하면 룻과의 결혼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사들인 땅을 룻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에게 다시 양도해야함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고인의 이름을 그의 소유지 위에 세워주어야 하네』(5절)라는 보아즈의 말은, 나오미로부터 사들인 땅을 매입자 자신이 소유하지 않고, 다시 그 가문의 것으로 넘겨야함을 상기시킨다. 수지가 안 맞는 거래임을 깨달은 익명의 친척은 권리를 신속히 포기한다(6절). 이렇게 하여 「고엘」이 가지는 권리와 의무는 모두 보아즈에게 돌아간다.

 

이러한 양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친척은 보아즈에게 신을 벗어주는데(8절), 흥미로운 것은 본문 자체가 이에 대한 해설을 달고 있다는 점이다(7절). 이는 룻기가 상당히 후대에 저술된 작품임을 암시한다. 당시의 독자들도, 이 상징적 제스처가 무슨 의미인지 몰랐기에 이를 상세히 설명해 줄 필요가 있었음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어떤 조약이나 협정이 개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질 때, 요즘처럼 악수를 하거나, 조약서를 작성하는 대신, 신발 한 켤레를 서로 교환함으로써 이를 증거 했다. 신발은 지배와 소유를 상징했기에(시편 60, 10 참조) 신을 벗어주는 행위는 소유권의 양도와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이어 보아즈는 룻과도 결혼할 의사가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10절). 증인으로 참석했던 원로들은 이제 보아즈에게 축복의 기도를 빌어주며, 이스라엘 역사에서 시형제 결혼을 통해 큰 업적을 남긴 여인들(라헬과 레아의 관계, 다말 이야기 등)처럼 하느님 앞에 축복된 삶을 꾸려나가기를 기원해준다(11~12절).

 

13절, 드디어 그들의 결혼은 성사된다. 룻은 이제 더 이상 가난한 이방 여인이 아니라 지방의 유지, 보아즈의 아내가 된 것이다. 그런데 정작 본문이 강조하고 있는 인물은 나오미이다.

 

룻은 다윗의 조부 오벳을 낳았다는 보도를 끝으로 더 이상 등장하지 않고, 나오미의 「인생역전」만이 장황하게 서술되기 때문이다(14~17절). 본문은 「빈손」으로 시작되었던 나오미의 불행이 하느님의 축복으로 「가득 채워짐」을 제시한다. 먹을 것이 없던 그들에게 음식이 보장되었고, 보호자가 없던 그들에게 배우자도 생겼으며, 무엇보다도 남편과 아들을 「잃었던」 나오미는 이제 자손을 「얻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가장 적절한 축복을 베풀어 주신 것이다.

 

 

자기 자리를 참아내기

 

이 세상에서 가장 무능한 사람은, 자기 자리를 「참지」 못하는 사람일 수 있다. 어머니로서, 며느리로서, 각자를 규정해 주는 자리를 무던히 참아낼 것…. 남편이 죽고 모든 것이 절망적이었을 때조차, 룻이 흔들리지 않고 그 불행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자리(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신원의식 때문이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룻의 이러한 과감한 용기와 인내는 나오미의 강건함과 사랑에서부터 기원했다. 그만큼의 훌륭한 표양으로 시어머니로서의 자리를 참아 내지 않았다면 룻이 정말 그녀 곁에 남아 있었을지 의문으로 남기 때문이다.

 

룻기 초반부에 유독 반복되고 있는 히브리 단어는 「돌아가다」(슈브)이다. 각자가 자기 신분으로 「돌아가」 그 자리를 잘 「참아낼 때」, 소풍날 같은 매일 매일의 축복은 보장되는 것이리라. [가톨릭신문, 2005년 2월 20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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