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그때 그 자리]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신 곳은? “총독 플로루스(64-66년)는 궁전에 머물렀다. 그 다음 날 그는 궁전 앞쪽에 재판석(be-ma; 마태 27,19 참조)을 마련하고 거기에 앉았다. 수석 사제들과 귀족들, 저명한 시민들이 그 앞으로 모여 와 섰다. 플로루스는 그들에게 자신을 모욕한 자들을 넘기라고 명령하였다”(요세푸스, 《유다 전쟁사》, 2권 14장 8-9). 환상의 단짝, 이천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내다. 한겨레가 함께 기뻐하고 때로는 숨죽이며 경탄했다. 김연아 선수의 멋진 연기 앞에서. 그리고 기대하였다. 영광의 절정에 머무르지 말고 새로운 경지를 열어 보여 주기를. 헌데 환상의 단짝이라 믿었던 그와 오서 코치가 갑작스레 갈라섰다. 사 년여 만에. 1990년 11월, 예루살렘 옛 도성에서 남쪽으로 3km쯤 떨어진 평화의 숲에서 작업하던 불도저가 우연히 고대의 무덤 동굴을 건드렸다. 발견된 석회석 유골함 열두 개 중 여섯 개는 이천 년 동안 전혀 손을 타지 않았다. 그중 하나의 유골함에 예순 살 정도의 남자, 유아, 어린이 두 명 등 여섯 명의 유골이 담겨 있었다. 장식과 조각이 매우 뛰어난 이 유골함의 한쪽에는 ‘카야파의 아들 요셉(Yehoseph bar Qayapha)’ 다른 쪽에는 ‘카파(Qapha)의 아들 요셉’이라는 아람어 글자가 휘갈겨 있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의 유다 대사제 요셉 카야파(카야파는 가문 이름인 듯)인가? 헤로데 임금이 대사제를 처음 지명한 기원전 35년부터 성전이 파괴된 기원후 70년까지 재임한 대사제 27명(28회 교체) 중 가장 오래, 무려 18년이나 자리를 지킨 그 놀라운 인물인가? 진위는 계속 논란 중이지만 긍정하는 이가 적지 않다. 1961년 지중해변의 카이사리아를 발굴하던 고고학자들이 극장 유적지에서 비석 파편을 발견하였다. 4세기쯤 뒤집어진 채 극장의 계단으로 사용된 이 비석은 깨어져 있어 단지 네 줄의 글씨, 서른한 글자만 확인할 수 있었다. 라틴어로 쓰인 그 내용은 ‘누구의 티베리움(Tiberium, 티베리우스 황제를 기리는 건물인데 정체는 불확실하다)을 유다 총독 빌라도가 봉헌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최초로 빌라도의 이름 전체(폰티우스 필라투스)와 그의 직위가 고고학으로 처음 드러났다. 우리가 흔히 총독이라 부르는 본시오 빌라도의 공식 직위는 프레펙투스(Praefectus)였다. 로마의 속주는 원로원에 속한 속주와 황제에게 속한 속주로 나뉘고, 그것도 규모와 중요도에 따라 또 나뉘었다. 시리아처럼 크고 중요한 속주에는 원로원 의원급의 인물이 집정관을 대리한 총독(Proconsul)으로 파견되지만, 유다처럼 작은 속주에는 기사 계급에서 행정관을 파견했다. 그들의 직위 중 프레펙투스는 군 지휘관의 성격이 강하고, 프로쿠라토르(Procurator)는 세금 징수를 비롯한 일반 행정 권한을 더 많이 보유하였다. 5대 유다 총독인 빌라도는 시리아 총독의 지휘 감독을 받는 프레펙투스였다. 빌라도와 카야파 대사제는 통치 파트너로 10년 이상 호흡을 맞추었다(카야파 18-36년; 빌라도 26-36년). 둘 다 가장 길게 재임한 점으로 보아(대사제와 총독의 평균 재임 기간은 4년), 둘이 환상의 단짝을 이뤄 매우 조심스럽게 때로는 잔혹하게 문제에 대처하며 유다 사회를 통제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 예로, 빌라도가 찍어 낸 주화에는 유다인의 종교심을 건드릴 로마 황제의 흉상이나 황제의 신적 신분을 알리는 문구가 전혀 없다. 나자렛 사람 예수에 관한 재판도 유다 사회의 안정이란 기본 맥락에서 진행되었으리라(요한 11,50 참조). [성서와 함께, 2010년 10월호, 이용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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