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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위대한 선교사 사도 바오로3: 탄생지 킬리키아의 타르수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1-02-09 조회수3,484 추천수1

[동녘에서 서녘까지, 위대한 선교사 사도 바오로] (3) 탄생지 킬리키아의 타르수스


"나는 유다 사람으로 타르수스의 시민이오"

 

 

작가노트 : 바오로 사도의 출생지 타르수스 지역의 산들은 거대하고 원시적인 골기를 갖고 있다. 이 험난한 준령을 걸어서 전도했다니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그분의 담대함과 열정은 이 웅대한 자연의 기운을 타고났음을 빛으로 상징했고, 산 위의 길들은 험난한 전도의 길을 상징한다. 또한 어린시절 유다인 라삐들의 교육을 받으며 자란 성소적 분위기를 표현했다.

 

 

내가 피시디아의 대주교이자 시디와 안탈리아의 주교직에 선출된 2008년에는 바오로 사도 탄생 2000주년을 기념하는 전 세계 그리스도교인들의 축제가 한창이었다.

 

그 당시 정교회 총대주교청은 바오로 사도를 기념하는 국제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그 학술회의는 바오로 사도가 활동했던 도시 콘스탄티노플에서 시작해 에페소와 페르기-안탈리아로 계속 이어져서 개최됐다. 안탈리아에서 마지막 국제회의가 끝난 후에 한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들에서 온 회의 참석자들은 바오로 사도가 1차 전도 여행기간 중에 거쳐간 해안도시 안탈리아로부터 시작해 바오로 사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성지순례를 했다.

 

 

국제 교류의 중심지 타르수스

 

이제부터 바오로의 탄생지인 킬리키아의 타르수스를 찾아 순례를 시작해보기로 하자. 배가 동부 지중해를 항해해 메르시나 항구에 도착하면 도시 위로 우뚝 솟은 타우로스산이 보인다. 타르수스는 해안에서 불과 20km 거리에 있기에 흰 눈에 덮인 이 높은 산의 수많은 산봉우리들이 보는 이들을 압도하며 다가오는 듯하다. 산봉우리들에서 쏟아져 내린 물은 계곡에 생명을 주고 거대한 원시의 산은 말없이 거기에 서 있다.

 

타우로스산처럼 바오로 사도의 영적 세계도 그 분의 드높은 정신과 열정, 그 예언적 깊이와 결단력과 함께 거기에 우뚝 서 있다. 소아시아를 여러 차례 오가며 복음을 전하고 유럽을 그리스도교화했던 이 담대한 선구자는 어떤 분이었을까? 타르수스와 예루살렘이라는 두 도시가 그분의 성장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나는 유다 사람으로, 킬리키아의 저 유명한 도시 타르수스의 시민이오"(사도 21,39). 이는 바오로 사도가 로마총독에게 처음 잡히셨을 때 하신 말씀이다.

 

타르수스는 국제교류의 중심이며 두 개의 문화가 경계를 이루는 옛 도시로서 서쪽의 그리스-로마 문화와 동쪽의 셈족과 바빌로니아 문화가 만나는 곳이다. 역사가 스트라본(B.C 64~A.D 21)에 따르면 바오로 사도 시대의 타르수스는 교육과 철학 분야에서 아테네나 알렉산드리아보다 훨씬 우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수많은 스토아 철학자 중 첫손에 꼽히는 아테네도로스는 타르수스 출신으로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의 명성은 대단해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그를 스승으로 택했고 죽을 때까지 자신의 고문으로 삼았다. 아테네도로스의 윤리 교육은 그리스도교 교리로 연결된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신은 우리 각자의 양심입니다. 신이 당신을 보고 계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 살아 가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당신 말을 듣고 있는 것처럼 신과 대화하십시오."

 

이러한 사상들은 바오로가 살았던 타르수스에서 회자되고 교육됐다. 바오로는 그곳에서 그리스 철학을 충분히 공부했고 많은 구절들을 기억에 담아두었다가 설교나 서신에 사용했다. 로마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키케로도 타르수스의 로마 지방 총독을 지낸 적이 있다.

 

바오로는 그리스식 교육을 받고 그리스 언어를 쓰고 그리스식 사회생활로 특징되는 환경에서 살았으며 어린 시절부터 그리스어를 잘 배웠기에 모국어처럼 말할 수 있었다.

 

 

상류계층에 속한 바리사이파

 

바오로의 부친은 옷감을 파는 부유한 상인이었고 천막 제조 공장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바오로는 어렸을 때부터 천막 제조 기술을 배웠던 것이다. 그는 상류계층에 속했고 그와 그의 아들 바오로는 로마시민권을 가질 수 있었다. 종교적인 면에서 보면 그의 부친은 바리사이파로서 바오로 역시 이 종파에 속했다.

 

그의 유다식 이름은 사울이며 유다회당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다. 로마 시민으로는 그리스화된 이름 바오로로 등록해 놓았다. 신약성경에서 두 이름이 함께 쓰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스어가 공용어였던 그 시대에 바오로를 세계 만방의 사도가 되도록 예정하셨던 주님께서는 그가 그리스 교육이라는 도구를 갖추도록 예비했던 것이다. 후에 바오로 사도 자신도 그를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갈라 1,15) 전도의 봉사를 위해 예비하셨던 주님 섭리를 감사히 여겼다.

 

타르수스에는 유다인의 회당 즉 시나고그가 잘 형성돼 있었다. 바오로의 부친은 민족과 종교에 대한 신념이 투철해 아들에게 히브리 원전으로 성경을 배우게 했다. 바오로는 학교에서는 그리스어로 된 칠십인역성경(Septuagint)을 배웠다. 그들은 집과 유다정착촌 밖에서는 그리스어로 말했다.

 

유다인 사회에서는 아이가 다섯 살이 되면 신명기 5장과 6장에 쓰여 있는 율법(토라)의 중요한 계율들과 대축제에서 찬양하게 될 시편 113~118편을 배우게 된다. 어린 사울은 여섯 살에 회당의 학교에 가서 민족 역사를 배우고 그 다음 해에는 삼손의 영웅담이나 다윗왕의 승리담 같은 성경에 나오는 역사를 배웠을 것이다. 열 살이 되던 해에는 라삐들의 수많은 금기사항들과 그보다 더 많은 의무사항들을 기록해 놓은 「언약」(言約)>(미스나)을 배워야 했을 것이다. 그 계명들이 어린 바오로의 영혼을 얼마나 억압했던가는 로마서 7장 9절에서 11절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탈무드」 경전은 열다섯 살에 배웠다.

 

 

열다섯 살 때 예루살렘으로 유학

 

사울의 부유한 부친은 아들에게 최상의 교육을 시키기를 원해 열다섯 살 소년을 예루살렘의 성전 신학교로 보냈던 것 같다. 율법교사가 되기 위해 갔던 이 학교의 교장은 당시 모든 라삐들 가운데 최고로 존경 받았던 가말리엘이었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 교사로서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사이였다"(5,34).

 

바오로는 처음 체포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변론할 때 이 사실을 자랑스럽게 말한다. "나는 유다 사람입니다.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지만 이 도성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사도 22,3).

 

현명하고 사려 깊은 가말리엘 곁에서 공부하는 동안 구약성경을 체계적으로 온전하고 명확하게 공부하고 해석하는 세 가지 방법을 익힌다. 열네 편의 그의 서신들을 보면 전형적이고 상징적인 방법과 적절하고 당시대에 맞춰 적용하는 방법과 알레고리(비유법)를 사용하고 있다.

 

성경은 사울을 매혹시켰다. 그는 두 개의 언어로 성경을 외웠다. 그의 서신들은 구약성경의 인용구를 많이 담고 있는데 대략 200개의 절들로 추산된다. 성경은 그의 정신을 살찌워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그는 성경을 세상의 가장 큰 보물로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바오로는 그의 복음을 구약에 의존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받은 계시에 의존하고 있다. 그가 성령의 인도로 구약을 해석하고 성경의 신비한 해석의 도움을 받아 성경의 실제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이 사실을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갈라 3,24)고 증명하고 있다.

 

이처럼 현자인 사도는 신도들의 정신적인 교육을 위해 구약성경의 가치를 무시하거나 제외시키려는 사람들에게 답변하고 있다.

 

구약성경을 깊이 알고 성령의 인도로 올바른 해석을 함으로써 이산 유다인들(디아스포라 히브리인들)을 그리스도의 교회로 이끌었던 것이다.

 

[평화신문, 2011년 1월 23일, 글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대주교, 그림 정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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