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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마르코 복음서 다시 읽기11: 겟세마니의 제자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1-06-01 조회수4,409 추천수1

[마르코 복음서 다시 읽기] (11) 겟세마니의 제자들

 

 

14,43-50 읽기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8,27-10,52 참조)에서도 ‘예수님의 정체’와 ‘예수님을 뒤따르기’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마침내 11,1-11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은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들은 군중과 함께 환호한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시며 활동하신다. 11,22-24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힘에 대하여 가르치시고, 11,25에서는 용서에 대하여 가르치신다. 12,43-44에서는 생활비를 모두 봉헌한 가난한 과부를 모범으로 제시하신다. 제자들은 여전히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데 반해 과부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한다. 13장의 종말론적 말씀에 이어 14,1부터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가 시작된다. 특히 이 이야기에서 제자들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우리가 자세히 읽을 본문은 겟세마니에서 예수님이 체포되시는 14,43-50이다.

 

“그러자 곧,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다가왔다. 그와 함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보낸 무리도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왔다. 그분을 팔아넘길 자는, ‘내가 입 맞추는 이가 바로 그 사람이니 그를 붙잡아 잘 끌고 가시오.’ 하고 그들에게 미리 신호를 일러두었다. 그가 와서는 곧바로 예수님께 다가가 ‘스승님!’ 하고 나서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손을 대어 그분을 붙잡았다. 그때 곁에 서 있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그의 귀를 잘라 버렸다. 예수님께서 나서시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강도라도 잡을 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나왔단 말이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지만 너희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리된 것이다.’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

 

① 단락 나누기

 

14,32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겟세마니(Geqshmaniv)로 간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따로 데리고 가셔서 기도하신다. 14,33-42에는 예수님의 기도와 자고 있는 세 제자들에 대한 말씀이 세 차례 언급된다. 14,43에서는 같은 장소인 겟세마니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곧 유다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타난다.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한다. 14,51-52은 새로운 등장인물인, 알몸으로 달아난 어떤 젊은이에 관한 장면이다.

 

따라서 14,43-50은 겟세마니라는 공간적 배경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체포 사건에 관한 본문으로 문학적 단일성을 가진다.

 

② 본문 자세히 읽기

 

본문의 전반부인 14,43-47에서 사건을 주도하는 등장인물은 유다이다. 배신자 유다가 등장한 것은 예수님께서 아직 겟세마니에서 말씀하고 계실 때이다. 유다는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ei?tw'n dwvdeka)”(43절)로 소개된다. 이 표현은 유다의 배신 장면인 14,10과 최후의 만찬 장면인 14,20에서 유다를 소개할 때도 동일하게 사용된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유다가 ‘열둘’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여기서 우리는 제자의 부정적 모습을 발견한다. 제자들 중에서도 특히 ‘열둘(dwvdeka)’ 중의 하나인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그분을 체포하려는 사람들을 안내한다. 유다가 동행한 이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보낸 무리”(43절)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8,31; 11,27; 14,53; 15,1에서도 동일하게 소개된다.

 

유다는 예수님에게 와서 ‘스승님(rJabbiv)’이라고 인사하고 입을 맞춘다. 여기서 우정의 표현인 입맞춤이 배신의 신호가 된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손을 대어 그분을 붙잡았다”(46절). 이어서 14,48-49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서술된다. 그분은 벌어지는 일을 성경과 관련시키신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부정적 모습에 둘러싸여 계신다. 즉 14,43-46에는 배신자 유다의 행동이 묘사되고 14,50에는 다른 모든 제자의 부정적 모습이 표현된다. 겟세마니에서 예수님께서 체포되시자 “제자들은 모두 그분을 버리고 달아났다(kai; ajfevnte?aujto;n e[fugon pavnte].” 여기서 ‘모두(pavnte)’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 “너희는 모두 떨어져 나갈 것이다”(14,27)를 회상케 한다.

 

그리고 제자들의 행동을 표현하는 동사는 “버리다”와 “달아나다”이다. 특히 ‘버리다(ajfivhmi)’ 동사는 마르코 복음서 안에서 제자들의 “예수님을 뒤따르기”와 관계된다. 첫 네 제자를 부르신 본문인 마르 1,16-20에서 이 동사는 두 번 사용된다. 18절에서 시몬과 안드레아는 그물을 버리고(ajfevnte) 예수님을 뒤따랐다. 그리고 20절에서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버리고(ajfevnte)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이와 같은 의미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인 10,28에서 베드로는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ijdou; hJmei'?ajfhvkamen pavnta kai; hjkolouqhvkamevn soi)”고 말한다. 여기서도 ‘버리다(ajfivhmi)’와 ‘뒤따르다(ajkolouqevw)’ 동사가 함께 사용된다.

 

이와 같이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뒤따랐다. 그들은 이전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예수님과의 친교(communion)를 선택하여 그분과 공동체(community)를 형성하였다. 갈릴래아에서 시작된 예수님과 제자들의 친교와 공동체는 예루살렘에서, 정확히 말해 겟세마니에서 예수님이 체포되시는 순간에 결정적 파국을 맞게 된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뒤따랐던 제자들이 마침내 그분마저 버린다. ‘예수님을 뒤따르기’와 그분과의 친교를 위한 조건으로 제시된 동사 ‘버리다’가 겟세마니에서는 그분과의 관계 단절을 표현한다. 1,18.20과 10,28에서 제자들의 긍정적 모습을 표현하는 동사 ‘버리다’가 14,50에서는 부정적 모습을 여실히 드러낸다.

 

③ 문맥 살피기

 

이제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라는 문맥에서 제자들의 몰이해와 부정적 모습을 살펴보기로 하자.

 

14,1-2에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민다. 14,3-9에는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일을 서술한다. 어떤 여자가 값비싼 순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자 몇 사람이 불쾌해하며 나무랐다. 제자들도 그 여자가 행한 행동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14,6-9에서 그 행동의 의미를 설명하신다. 14,10-11에서는 유다의 배신이 묘사된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그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려고 수석 사제들을 찾아갔다. 유다는 돈을 받기로 하고 결국 예수님을 넘기고 만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파스카 만찬을 준비하고(14,12-16 참조) 그분과 함께 최후의 만찬에 참석한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의 배신을 예고하신다(14,18 참조). 그러자 유다와 열 한 제자가 차례로 “저는 아니겠지요?”(14,19)라고 묻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시고(14,20-21 참조), 이 말씀이 본문에서 이루어진다. 유다는 결국 거짓말을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중에 성찬례를 제정하시고(14,22-25 참조) 제자들과 함께 올리브 산으로 가신다. 거기에서 베드로가 세 번이나 당신을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예고하신다. 그러자 베드로는 두 번이나 강하게 부정한다(14,27-31 참조). 29절에서 베드로는 “모두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고 말하고, 31절에서는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결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고 한다. 곧이어 복음사가는 “다른 이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14,32-42에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실 때 세 제자, 곧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하고 잠들어 버렸다(14,33.37.40 참조).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고 배반하지 않겠다고 장담했던 이들이다. 특히 마르코 복음서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사람은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셨던 제자들이다.

 

그들은 1,16-20에서 처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사람이다. 그리고 13,16-17에 따르면 세 사람은 열두 사도의 명단에서 첫 자리를 차지한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5,37 참조)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실 때(9,2 참조) 세 제자만 데리고 가셨다. 13,3 이하에서 예수님께서는 안드레아와 함께 세 제자에게 종말론적 가르침을 말씀하신다. 이처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열두 제자 중에서도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으며, 예수님께서 총애하신 제자들이었다. 그들마저도 겟세마니에서 부정적 모습을 드러낸다.

 

이러한 문맥에서 마침내 제자들의 몰이해가 더 잘 드러난다. 배신자 유다의 행동뿐 아니라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나는 제자들의 행동에서 부정적 모습이 분명히 묘사된다. 그 후 14,53-65에서 예수님께서는 최고 의회에서 신문을 받으신다. 침묵하시던 예수님께서 “당신이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요?”(61절)라고 묻는 대사제의 말에, “그렇다”(62절)고 대답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마르코 복음서에서 처음으로 당신의 정체와 관련하여 ‘하느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메시아)’라고 인정하신다.

 

한편 14,66-72에서 베드로는 마침내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다.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14,30)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강하게 부정했던 베드로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된 것이다. 제자들 중에, 특히 ‘열둘’ 가운데에서 첫 번째인 베드로마저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다.

 

이처럼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특히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부정적 모습을 더 분명히 드러낸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그분에게서 일어나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신하고 버리고 부인하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가까이 가실수록 제자들은 그분에게서 멀어져만 갔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과 제자들의 공동체는 파국을 맞게 된다. 갈릴래아에서 시작된 예수님과 제자들의 친교가 예루살렘에서 단절된다.

 

[성서와 함께, 2011년 5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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