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 걷는다 : 레위기 - 거룩한 백성이 되어라 “모든 완덕의 천상 스승이시며 모범이신 주 예수님께서는 친히 거룩한 생활의 창시자요 완성자로서 당신의 모든 제자에게 어떠한 신분이든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생활의 성화를 가르치셨다. … 사도는 권고한다. ‘성도들에게 걸맞게’(에페 5,3) 살며,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들로서, 거룩한 사람들로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로서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콜로 3,12 참조), 성덕에 이르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갈라 5,22; 로마 6,22 참조). 우리는 모두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으므로(야고 3,2 참조), 언제나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며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마태 6,12 참조) 하고 날마다 기도하여야 한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교회 헌장> 40항 ‘보편적 성화 소명’) 17,8 “너는 또 그들에게 말하여라. ‘누구든지 이스라엘 집안에 속한 사람이든 그들 가운데에 머무르는 이방인이든, 번제물이나 다른 희생 제물을 바칠 때, 9 그것을 만남의 천막 어귀로 가져와서 주님에게 바치지 않는 자는 자기 백성에게서 잘려 나가야 한다.’” 레위기 17-26장의 성결법(聖潔法)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7장은 짐승을 잡는 것에 관한 규정을 소개하고 있는데,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을 바칠 때 짐승을 만남의 천막 어귀로 가져와서 주님께 바쳐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장막 밖에서 동물을 죽일 경우 우상에게 바칠 위험이 많기 때문이며, 피를 함부로 다루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생명을 의미하는 피는 하느님께 속한 것이기에, 만남의 천막에서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려 창조주께 돌려드립니다. 또 짐승의 고기를 먹는 것이 쉽지 않을 때 그것을 천막 안으로 가져와 제사를 드려 하느님께 예물로 바치고 난 후, 나머지는 공동체가 함께 나누어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경신례가 공동체의 삶과 병행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백성의 거룩한 제사, 거룩한 식생활입니다. 이 규정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그들 가운데 머무르는 이방인도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경신례를 중심으로 이방인이 신앙 공동체에 통합되어 만민이 하느님의 사랑에 초대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7,11 ‘생물의 생명이 그 피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 자신을 위하여 속죄 예식을 거행할 때에 그것을 제단 위에서 쓰라고 너희에게 주었다. 피가 그 생명으로 속죄하기 때문이다. 12 그래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다. ′너희 가운데 어느 누구도 피를 먹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 머무르는 이방인도 피를 먹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 모든 생명의 주인이시고, 생명의 자리인 피의 권한은 오직 하느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죽이는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로 이해하였고, 생명을 위한 속죄 제사에서 피는 하느님께 바쳐야 하며 먹지 못하도록 규정했습니다. 사제계 자료는 피에 속죄를 이루어 주고 공동체가 잘못했을 때 깨끗하게 하는 힘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죄 때문에 생명력이 감소되면 다른 생명력, 즉 피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죄인의 생명 대신 대용물을 희생 제물로 바쳤는데, 이러한 ‘대속 사상’은 이사야 예언서의 ‘주님의 종의 노래’(42,1-9; 49,1-7; 50,4-11; 52,13-15 참조)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무죄한 주님의 종이 많은 이들의 죄악을 짊어지고 고통과 병고와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어린양처럼 죽어 갑니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이사 53,10).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에서 예언된 ‘주님의 종’으로 십자가 죽음을 통해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생명을 온전히 바쳐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1베드 1,19)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생명을 경시하고 죄와 폭력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마르 10,45) 오신 스승 예수님의 뜻을 따라, 모든 이의 종이 되어 이웃을 섬기고 진리를 증거하여 세상을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다. 18,3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너희는 너희가 살던 이집트 땅에서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이제 너희를 이끌고 들어가는 가나안 땅에서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해서도 안된다. 그리고 너희는 그들의 규칙들을 따라서도 안 된다.’ 18장은 결혼과 가정의 성스러움을 보존하기 위한 법으로, 부정한 성관계 특히 근친상간을 금합니다. 이집트에서는 근친 사이에도 혼인했고, 가나안은 우상 숭배와 동성애와 수간을 포함한 성적 문란이 성행하던 곳입니다. 하느님의 법은 그들이 떠나온 이집트의 관습을 따르지 말고, 이제 들어가서 살게 될 가나안의 관습도 따르지 말라고 규정합니다. 성性의 영역에서 이스라엘의 법과 규정은 매우 준엄합니다. 계명을 주시는 분은 출애급의 하느님입니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18,3.4.30), “나는 주님이다”(18,5.6.21)가 거듭 반복되는 것은 이집트 종살이에서 구원해 주신 하느님을 부각시켜 이러한 법의 목적이 진정한 해방에 있다고 전하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 말씀대로 혼인 생활과 가정 생활을 실천하면, 어느 상황에 처하든(예컨대 바빌론 유배 중에도) 출애급의 구원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혼인과 가정은 출애급의 구원이 구현되는 장이어야 합니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순종과 사랑으로 거룩한 가정 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거룩함(聖性)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사목 헌장>은 ‘혼인과 가정의 거룩함’을 언급하면서 혼인성사의 은총을 거듭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 부부는 그 신분의 의무와 존엄성을 위하여 특수한 성사로 견고하게 되고, 이를테면 축성된다. 이 성사의 힘으로 혼인과 가정의 임무를 수행하며, 온 삶을 믿음과 바람과 사랑으로 채워 주는 그리스도 정신에 젖어들어, 날로 더욱 자기 완성과 상호 성화를 위하여, 또 그럼으로써 다 같이 영광을 위하여 나아간다”(48항). 오늘날 혼인과 가정은 중혼과 이혼과 낙태, 성폭력, 이기주의, 향락주의, 물질만능주의 등 혼인의 본질을 위협하는 그릇된 생각과 행동으로 존엄성이 망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성사의 은총에 힘입어 혼인과 가정의 신성한 가치를 수호하고 충실한 사랑을 통하여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19,1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성결법(레위 17-26장 참조)에는 하느님의 거룩함이 많이 언급되는데, 특히 19장에서는 거룩하신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사람이 되는 길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또 거룩함에 대한 지침은 십계명에 바탕을 두고 매우 윤리적이며, 궁극적으로 영원하신 하느님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우선 하느님의 거룩함은 모든 것과 분리되고 구별되며 초월하여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신비를 말합니다. 하느님처럼 이스라엘도 거룩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모든 민족 가운데 선택하여 세상에서 구별하셨습니다. ‘거룩하다’는 말의 원뜻대로 세상과 분리하여 따로 떼어 놓으셨는데, 이는 세상에 살면서도 하느님을 지향하고 하느님과 통교를 이루며 하느님을 가까이 섬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 선택받아 계약을 맺은 이스라엘은 이미 거룩하며 계속 거룩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하느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소명입니다. 곧 삶의 모든 영역(정치, 종교,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내야 하며, 모든 시간과 공간과 역사 안에서 하느님과 통교하여 그분의 현존과 활동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도 세상에서 분리되어 ‘하느님의 거룩함대로 살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1베드 1,15).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요한 15,19)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부름 받은 목적은 세상에 나가 구원의 열매를 맺는 것이고, 이 소명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처럼 그분의 은총과 사랑 안에 머물며 그분 말씀에 순종하여 풍성하게 열매 맺는 것입니다.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완덕에 이르고자 신자들은 그리스도께 받은 힘을 다하여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며, 그분의 모습을 닮아 모든 일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에 대한 봉사에 온 마음으로 헌신하여야 한다. 이렇게 하느님 백성의 성덕은 교회의 역사에서 수많은 성인들의 생활을 통하여 빛나는 증거를 보여 주었듯이 풍성한 열매를 맺어 나갈 것이다”(<교회 헌장> 40항). 19,18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토라의 첫 계명이고 그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구체화됩니다. 하느님에 대한 참된 경신례는 정의를 세우고 억눌린 자를 일으켜 세우며,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을 보호해 주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결국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자리가 하느님을 향한 예배의 장소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마태 22,37-40 참조)이라 하셨고, 이웃 사랑의 계명을 당신 사랑의 계명과 동일시하며 당신과 형제들이 동일한 사랑의 대상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예수님께서는 수난 전날 밤에 사랑의 새 계명을 주셨는데,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로써 사랑의 척도가 레위기의 “너 자신처럼”에서 요한 복음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으로, ‘나’에게서 ‘예수님’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이제 이웃 사랑은 죽음으로 승부를 보아야 합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길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위한 다른 길은 없으며, 진정한 경신례는 이웃에 대한 내 삶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0-21). 19,34 ‘너희와 함께 머무르는 이방인을 너희 본토인 가운데 한 사람처럼 여겨야 한다. 그를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성결법은 약자에 대한 보호를 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규정은 이스라엘이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을 때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바탕으로 합니다. 이방인은 혈족과 종족을 떠나 타인에게 의존해 살면서 억압받고 착취당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법적 보호를 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법은 그들을 억압해서는 안 되며 “그를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19장에서는 이스라엘이 거룩하신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자가 되기 위해, 하느님 사랑을 바탕으로 한 부모 공경, 가난하고 약한 이웃에 대한 배려, 이방인·품팔이·장애인에 대한 보호 등 세부 지침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토라(율법) 준수는 바로 생명의 길입니다. 율법을 거스르는 것은 공동체가 존속하는 데 위기를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으로 대표되는 약자를 보호하여 하느님께서 태초에 약속하시고, 성조들을 통해 강복하시며, 시나이 계약을 통해 약속하신 하느님의 복을 받을 수 있고, 이로써 그들의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레위기에 나타난 이 사랑의 정신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교회의 전통이 지켜온 신적 가치로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우선 선택해야 할 가치입니다. “먼저 본인은 그중의 하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 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사랑’이라는 주제를 지적하고 싶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의 실천에서 그 편을 먼저 선택하는 특별한 형태의 우선을 말하는 것으로, 교회의 전통 전체가 이에 관한 증거를 갖고 있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사회적 관심> 42항). [성서와함께, 2010년 5월호, 서효경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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