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성경이야기] 마태오 복음 (4) 마태오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들 - 하느님 나라가 결정적으로 옴을 드러내는 임금, 예수님(마태 25,31-46) 마태오 복음서에는 다섯 개의 담화문이 있습니다. 복음적 담화문(산상설교, 5-7장), 사도적 담화문(10장), 비유로 된 담화문(13장 1-53절), 교회론적 담화문(18장), 종말론적 담화문(24-25장)입니다. 그중 마지막 종말론적 담화문은 종말과 재림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림과 종말의 표징을 묻는 제자들의 질문(24,3)에 구약성경에서 미리 예언된 말씀들을 떠올리게 하십니다(24,4-31). 그리고 종말의 때를 묻는 질문(24,3)에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라고 말씀하십니다(24,36). 이 말씀들은 종말이 언제 일어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종말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지금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1년 뒤에 최후의 심판이 있다니 늦어도 6개월 전에는 준비해야지!’가 아니라 언제 최후의 심판이 있을지 모르니 지금부터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뒤이어 나오는 세 가지 비유 이야기가 바로 그 말씀입니다.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24,45-51), 열 처녀의 비유(25,1-13), 탈렌트의 비유(25,14-30)는 종말의 현실성과 깨어 있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마태오에게 깨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7,21-23 참조). 그보다 하느님의 가르침에 충실히 응답하면서 사는 것을 뜻합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주어진 탈렌트를 힘껏 발휘할 때 하늘 나라의 기쁨을 함께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쓴 당시 마태오 공동체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조만간 재림이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으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재림이 늦추어진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되자 점점 긴장이 풀렸습니다. 그래서 아무 거리낌 없이 악한 행동을 일삼기도 했고(24,48-49 참조),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 가진 채 나태하게 살아갔습니다(25,3 참조). 또 주변에서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고서도 깨우치려 하지 않고 나만 충실하게 살면 된다는 식으로 개인적인 영성에 치중하기도 했습니다(25,24-25 참조). 마태오는 이러한 교회의 현상에 직면하여 심판이 가까이 왔다는 점보다는 심판이 엄중하다는 점을 강조하여 교회를 바로잡으려 했던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서 25장 31절부터 나오는 최후의 심판 이야기(25,31-46)는 임금이신 예수님께서 세상과 그리스도 공동체를 심판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임금이신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25,40) 이 말씀은 이스라엘 왕권이 지향하는 이상(理想)입니다. 위대한 임금이신 하느님께서는 가난하고 얽매인 이들의 수호자이시며, 하느님 통치의 특징은 보잘것없고 작은 이들을 특별히 보살피는 것입니다. 이 선언으로써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계명인 사랑의 계명 두 가지를 하나로 만드셨습니다(22,37-40 참조). 이제부터 가장 작은 행위조차도 하느님과 형제에 대한 사랑이라는 유일한 기준으로 최후 심판 때 판결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과의 관계에서든지 그 사람과만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예수님과도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된 사람은, 언제나 무거운 짐을 진 이들의 짐을 나누어 지려하고(11,28-30 참조) 가난한 자들을 축복하며(5,3-12 참조) 그로써 하느님을 향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이웃 앞에 서 있을 때마다 천상의 임금인 심판관 앞에 서 있는 것이며, 심판과 각자의 최후 운명은 현실적으로 지금 이 순간부터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종말이 언제, 어떤 식으로 오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맞이할 주님을 기다리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입니다. * 참고문헌 : 성서못자리 그룹공부교재 「마태오 복음」, 2010, 기쁜소식, 101-123쪽.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1년 9월호, 사목국 성서사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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