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도덕 해설] 하느님의 첫 번째 선물, 창조
우물에서 숭늉 찾으시는 분이 계실 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가르치는 것이냐고, 똑 떨어지는 답을 찾으시는 분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일차적으로 행동 지침서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느님에 대해 증언해 주는 책입니다. 그리고 지난 달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리스도교의 윤리가 “계시된 도덕”이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늘 할 일을 적어 보내주셨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그 증언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고 특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응답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성경과 도덕」 제1부는 무엇보다 먼저 성경에서 말해주는 하느님의 선물들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선물과 인간의 응답의 관계, 하느님의 선행적인 활동과 인간의 과제 사이의 관계는 성경과 그 안에 계시된 도덕의 결정적 요소이다”(7항). 그리고 하느님의 첫 번째 선물은 바로 ‘창조’입니다.
세상과 인간의 창조
창세기의 첫 부분은 자세히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이 몇 장이, 성서의 세계관과 인간관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온 세상, 곧 “하늘과 땅”(창세 1,1)에 대해서 창세기는, 그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만들어주신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우연히 또는 아무 목적 없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 지혜와 사랑으로 만드신 것이니 그 자체로서 좋은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를 후렴구처럼 계속해서 반복하는데, 이것은 정말 유다교 - 그리스도교 세계관의 특징입니다. 여기에는 이 세상에 대한 강한 긍정이 들어있고, 또 현실적으로는 하느님의 계획에서 벗어나 손상되어 있는 이 세상을 보면서도 그 세상이 선하신 하느님의 손안에 있음을 믿는 굳은 신앙이 들어있습니다.
창조 가운데에서도 윤리 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인간의 창조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창세 1,26).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일까요?
그것은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있어서 창조된 세계를 알고 이해하며, 자유를 지니고 있어 결정을 하고 그 결정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으며, 하느님의 통치 아래에서 세상의 다른 피조물들에 대해 지도적인 위치에 있고, 하느님을 본받아 하느님과 일치하여 행동할 수 있고, 하느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또한 사람들과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인간의 생명이 거룩함을 지닌다는 의미에서입니다.
이렇게 당신 모습대로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첫 번째 선물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는 것,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받는다는 것”이 인간 존재의 근본적 현실인데(10항), 이것은 우리에게 예속이나 제한을 뜻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어떤 인간을 닮아야 하거나 그 뜻에 따라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우리에게, 그분 안에서 인간성의 완성에 이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물고기는 물에서 살아야 하고 북극곰은 추운 북극에서 살아야 하며,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 사는 것이 가장 “제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곧, 우리는 인간으로서 완전히 실현되려고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우리 안에 새겨져 있는 삶의 길을 찾는 것입니다.
창조의 선물에 응답하는 삶
그렇다면,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지니고 있는 특징들은 - 이것은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 우리에게 어떤 삶을 살라고 말해주고 있을까요?
첫째로, 이성을 지닌 인간은 하느님의 선물인 인식과 식별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으며, 피조물로서 그렇게 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둘째로, 자유를 선물로 받아 지닌 인간은 도덕적 식별과 선택과 결단을 하도록 부름 받았고, 그 도덕적 판단의 기준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셋째로, 인간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책임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이 이성과 자유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은 인간에게 이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다른 어떤 피조물이 아니라 인간에게 그 일을 맡기셨다는 점은 특히 현대에 우리가 깊이 의식하고 있어야하는 부분입니다.
현재 자연이 파괴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책임이지만, 그 자연을 회복시키는 것도 그만큼이나 인간에게 달려있습니다.
넷째로, 인간이 피조물을 관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하는 것이기에, 그러한 책임을 행사할 때는 하느님의 통치를 모방하여 현명하고 유익하게 세상을 돌보아야 합니다. 이 한계를 지키지 못하면, 곧 인간을 포함하는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당장 인간에게 주어지는 인권만을 생각한다면 자연의 균형과 조화를 파괴하고 맙니다. 이것은 인간을 드높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 집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관계적 존재인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에게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추구하도록 초대하고 그렇게 할 의무를 부여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인간에 대한 존중 등은 인간에게 인격을 주신 하느님에 대한 마땅한 응답입니다.
여섯째로, 인간 생명의 거룩함은 그 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할 것을 요청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창세 9,6) 인간에게는 다른 인간의 피를 흘리게 하는 일이 금지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에게 맡겨진 책임들은 인간을 억누르거나 인간의 발전을 저지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성서가 가르쳐주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이 가장 완전하게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썼던 표현대로, 창조라는 하느님의 선물에 응답하는 삶을 사는 것이 인간의 “제자리”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
창세기와 함께 하느님을 자주 창조주로 묘사하는 책은 시편입니다. 몇몇 시편들에서는(시편 8편; 19편; 148편 등) 하느님의 창조활동과 구원역사가 서로 결합되어 있어, 창조와 구원을 하나의 연속선상에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한처음에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만이 아니라 당신의 지혜로 끊임없이 세상을 돌보시는 것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지속적 창조, 특히 시편 104편에서).
눈에 띄는 것은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찬미의 기도들입니다.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온갖 한계들을 체험하면서도 현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불확실한 세상 안에서도 피조물을 돌보시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창조를 믿을 교리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라 더 깊은 신앙의 확신을 드러냅니다. “주 저희의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존엄하십니까!”(시편 8,2.10) 라는 고백을 할 수 있으려면, “온 땅에” 악의 세력과 지상의 온갖 권세들이 횡행해도 그 안에서 하느님이 살아계심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악만을 보는 사람은 이런 세상을 있게 하신 하느님을 원망할지 모릅니다. 그건 눈에 보이는 세상을 악신의 작품으로 보았던 이원론자나 영지주의자들과 같은 계통이지 그리스도교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도 시편 작가와 함께 이 세상을 만들어주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그 하느님의 뜻을 따라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창공은 그분 손의 솜씨를 알리네.
당신 앞에 드리는 제 입의 말씀과
제 마음의 생각이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시편 19,2.15).
* 안소근 실비아 - 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가톨릭대학교와 한국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성서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있다. 주교회의 천주교용어위원회 총무이다.
[경향잡지, 2012년 2월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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