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도덕 해설] 우리는 주님의 것
지난해 한동안 출근할 때마다 지하철역에서 본 광고가 있습니다. “우리 아들 누구 거?” “음… 아영이 거!” 아들의 입에서 “엄마 거!”라는 대답을 기대했던 엄마는 맥 빠진 표정으로 숟가락을 내려놓습니다. 아들은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합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서로에게 속하는 관계입니다. 아가의 표현을 빌리면 “나의 연인은 나의 것, 나는 그이의 것”(아가 2,16)이라는 관계이지요.
하느님과 맺어진 관계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이러한 관계는 창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하느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간 자신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가 처음부터 하느님께 속함을 알아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선물이고, 그 선물에 합당하게,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첫 번째 응답이었습니다. 다른 특별한 것을 행하라고 명령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저 생긴대로 살라고, 하느님께서 주신 선한 본성대로 살라고 하신 것이 인간에게 주신 첫 번째 규범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전개되어 갑니다. 하느님은 여러 순간들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시고, 인간이 체험을 통해 당신을 알게 하십니다. 동시에 그 체험을 통해 인간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계약”이라는 단어는 하느님이 그냥 망원경으로 쳐다보는 하늘의 별처럼 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나의 하느님, 우리의 하느님이 되시고 내가 하느님의 것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계약은 성경에서 특정한 한두 순간에만 해당되는 단어가 아니라 성경에 담긴 역사 전체에 대해서 적용시킬 수 있는 폭넓은 단어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태어나는 날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부부간의 관계가 결혼하는 날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우리는 성경 전체를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서로에게 속하는 계약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것입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계약에 대해서, 이번 달에는 먼저 그 역사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계약의 시작, 이집트 탈출
이스라엘은 자신이 하나의 민족으로서 하느님과 관계를 맺게 된 것이 이집트 탈출을 통해서였다고 봅니다. 이집트 탈출은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의 얼굴 사진이 그려진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도 하느님을 알았지요.
그러나 가장 명확하게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된 것은 이 사건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알게 되는 것은 동시에 그분과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어떤 사람을 알게 되면서 친구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탈출기 3장에서 하느님은 당신 이름을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이 이름의 뜻은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그 뜻에 대해서는 아무 책이나 찾아보셔도 좋지만, 저는 그 이름이 결국은 “내가 누구인지는 앞으로 보면 알 것이다.”를 뜻한다고 봅니다.
아직 하느님을 체험하지 않은 이스라엘에게, 이름을 가르쳐준들 어찌 그분을 알 수 있을까요? 그래서 하느님은 뜻이 한정되지 않은 이름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이후의 사건들을 통해 비로소 이스라엘은 그분을 알게 됩니다.
결정적인 것은 이때에 이스라엘이 본 하느님의 얼굴이 어떤 것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집트 탈출을 통하여, 특히 바다를 건너는 사건을 통하여(탈출 14-15장)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바다를 건너고 나서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이”(탈출 15,1) 하느님께 노래를 부릅니다. 그분이 누구신지 이제 알았다는 것이지요.
이후 이스라엘은 이 사건을 기억하고 해석하면서, 주님께서 “동반하시고 해방시키시고 선물하시고 하나로 모으신다.”(「성경과 도덕」, 16항)는 것을 알게 됩니다. 광야의 여정에서 하느님께서 인간의 여정에 함께하심을 알았고,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그들을 구해내시는 데에서 하느님께서 인간을 억압과 죽음에서 해방시키시는 분이심을 알았으며, 당신 자신을 선물로 주시어 당신의 선하심을 체험하게 하시고 또한 당신과 관계를 맺은 인간이 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흩어진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로서 하느님과 관계를 맺게 된 백성은 하느님의 계획을 중심으로 하나로 모이게 됩니다.
계약에 대한 신학적 이해
이집트 탈출을 체험하고 난 이스라엘은, 이를 통해 맺어진 하느님과 자신의 관계를 계약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나타내게 됩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이집트 탈출이 그 관계를 처음부터 규정할 만큼 중요한 사건으로 이해되었기에, 성경에서는 이집트 탈출 직후에 계약이 체결되었다고 말합니다(탈출 19,1).
그런데 인간들 사이에 맺어지는 계약은 동등한 두 사람 사이의 계약도 있을 수 있지만,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계약은 수직적인 계약인데, 이러한 형식은 고대 근동의 외교적 법률적 관행에서 잘 알려져 있는 것이었습니다(봉신계약). 이 계약의 주도권은 주권자에게 있습니다. 쉽게 말한다면, 주권자 편에서 계약을 “맺어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인간에게 약속을 해주십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베풀어주시는 은총입니다. 내가 너의 하느님이 되어주겠다고, 너를 나의 것으로 삼겠다고 하느님 편에서 절대적인 자유로 결정을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여기에 동의해서 계약을 맺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 때에, 인간이 자유롭게, 나는 하느님의 모상이 되겠다고 결정하고 동의했나요? 이집트 탈출 때에, 이스라엘이 우리가 주님의 백성이 되겠다고 나섰나요? 계약을 맺어주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 계약을 유지해 나가고자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은 인간이 계약의 상태에 머물도록 하는 윤리적이고 예식적인 도구, 통로, 길”입니다(18항). 이러한 맥락에서, 율법은 완전히 거저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로 나타납니다.
처음부터 「성경과 도덕」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고 말씀드린 “계시된 도덕”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셨습니다(계시). 이것은 선물이었습니다. 그러고는 그런 하느님과 관계를 맺으며 그런 하느님의 것으로서 살아가는 길을 알려주시는 것이 율법입니다. “계시된 도덕은 말하자면 이집트 탈출이라는 원형에서 시작된 해방의 과정을 지속시키고 이 과정을 확고히 하며 그 안정성을 담보하는 것입니다”(20항).
해방, 계약, 율법
이스라엘과 하느님 사이에서 이루어진 계약의 역사를 볼 때, 이스라엘의 율법은 구원과 해방의 과정에 속합니다. 왜 이집트 탈출 때에 율법이 주어졌을까요? 이집트 탈출 없는 율법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책에서, “이집트 탈출을 기억하는 사람만이 율법이 자유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어 구원하신다는 체험 없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께서 “우리 아들 누구 거?”라고 물으실 때, 나는 하느님의 것이라고 응답하고 그렇게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도 순간마다 삶의 길을 선택해야 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는 누구 거?”라고 묻고 계십니다.
* 안소근 실비아 - 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가톨릭대학교와 한국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성서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있다. 주교회의 천주교용어위원회 총무이다.
[경향잡지, 2012년 3월호, 안소근 실비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