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자리] 역사서 해설과 묵상 11 : 여호수아의 인물됨 (1)
여호수아기라는 명칭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서 온 것이다. 여호수아기 어디에도 이 책을 여호수아가 썼다는 말이 없지만, 탈무드에 따르면 여호수아가 여호수아기의 저자라고 한다. Baba Bathra 14b와 15a는 여호수아가 여호수아기와 신명기의 마지막 부분을, 사무엘이 사무엘기와 판관기를, 예레미야가 열왕기를 썼다고 한다. 그리고 여호수아의 죽음 이야기는 아론의 아들 엘아자르가 썼고, 엘아자르의 죽음 이야기는 그의 아들 피느하스가 썼다는 보충설명까지 한다.
그러나 오늘날 여호수아기의 저자를 여호수아로 보는 학자는 거의 없다. 후기 편집작업의 증거가 여러 군데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먼저 여호수아의 죽음 이야기(여호 24,29-30)와 뒤따라 나오는 일반적인 공식(여호 24,31)이 바로 그것이다. “여호수아가 살아있는 동안 내내 이스라엘은 주님을 섬겼다.”는 구절(여호 24,31)은 후기 편집자가 즐겨 사용하는 문구임이 틀림없다. 또한 여호수아기 안에 있는 자료의 중복과 이율배반 등을 볼 때 여호수아 한 사람의 저작이라고 보기 힘들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는 여호수아가 여호수아기의 저자라는 전통을 배척한다. 여호수아기는 여호수아보다 훨씬 후대에 구성되고 편집되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여호수아기의 편집과정과 편집단계에는 아직까지 완전히 일치된 견해가 없다.
여호수아는 히브리어로 ‘주님께서 구원하신다.’ 또는 ‘주님은 구원이시다.’는 뜻이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 사람 눈의 아들로서 가나안 정착과 분배를 이끈 지도자다. 여호수아의 원래 이름은 ‘호세아’다(민수 13,8.16; 신명 32,44 참조). 모세가 ‘여호수아’로 이름을 바꿔 주었다(민수 13,16).
여호수아는 젊었을 때부터 모세를 가까이 섬겨온 사람이고, 만남의 장막을 지키는 역할도 맡았다. 모세가 카데스 광야에서 각 지파에서 한 명씩 정탐꾼을 뽑아 가나안 땅으로 보냈는데(민수 13장), 여호수아와 칼렙은 하느님께 끝까지 충성을 다했기에 약속된 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러한 충성심 때문에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로 뽑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다.
여호수아는 전쟁의 지도자와 예언자라는 두 가지 역할을 맡았다. 그의 주된 임무는 가나안 정복과 땅의 분배였다. 한편 그는 모세의 안수를 받고 지혜의 영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민수 27,18-20; 신명 34,9). 모세처럼 그 역시 ‘주님의 종’으로 인정받았고(여호 24,29),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여호수아에게도 말씀하셨다(여호 1,1). 모세의 명에 따라 행한 에발 산에서 법전낭독(여호 8,30-35)은 여호수아에게 예언적 지도력이 있음을 드러내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여호수아기의 마지막 두 장(23, 24장)은 성경이 여호수아에게 모세의 권위 곧 예언자요 법의 제정자로서 권위를 부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묵상 주제
“여푼네의 아들 칼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만 빼고, 내가 너희에게 주어 살게 하겠다고 손을 들어 맹세한 그 땅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민수 14,30). [2012년 9월 16일 연중 제24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역사서 해설과 묵상 12 : 여호수아의 인물됨 (2)
일부 학자들은 여호수아의 역사적 신빙성에 문제를 제기한다. 특별히 여호수아기 1-12장 가나안 정복부분에서 여호수아와 관련된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메이어(E. Meyer)와 휄셔(G. Hoelscher)는 여호수아의 역사성 자체를 부정하면서, 여호수아는 요셉 가문의 전설적인 영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카우프만(Y. Kaufmann)은 여호수아의 역사적 실재성을 강력히 주장한다. 그는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과정에서 각 지파의 계약을 이끈 지도자라고 주장한다.
현대의 대부분 학자들은 여호수아의 역사성 자체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모세오경과 여호수아기에 언급된 여호수아의 인물과 역할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학자들은 여호수아의 역할을 축소시켜서 본다. 곧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만을 거느렸을 뿐인데 훗날 다양한 이야기와 전통이 그에게로 집중되고 모세와 연관되어 국가적인 영웅으로 부상했다는 것이다. 올브라이트(W. F. Albright), 미크(T. Meek), 마자르(B. Mazar) 같은 학자들은 여호수아가 다만 요셉 가문의 지도자였고 예리코, 아이, 베텔을 점령하고 기브온 전투(여호 10장)에서만 승리를 거두었다고 본다. 알트(A. Alt)와 노트(M. Noth)의 견해는 약간 다르다. 여호수아는 기브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덕분에 최초의 판관이 되었고, 그래서 에브라임 산악지대에 있는 스켐 성소로 이스라엘 부족들을 불러 모았다고 한다(여호 24장). 소긴(J. A. Soggin)의 견해는 더 극단적이다. 곧 여호수아의 영도로 이루어진 일사분란한 가나안 정복은 허구적인 구성이라는 것이다. ‘가나안 정복’이라는 복잡한 과정은 벤야민 지파의 전승에 근거하여 편집된 뒤에 여호수아의 업적으로 돌려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여호수아가 군사적인 면에서 활약이 두드러졌거나 또는 각 지파와 지역 간의 분쟁을 잘 해결해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나아갈 경우는 여호수아를 모세의 복제품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사실 모세와 비교하면 여호수아는 그 인물이 상대적으로 작게 비치고, 그래서 문학적인 전승들을 넘어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여호수아에게까지 이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모세와 달리 여호수아는 머뭇거림이 없는 지도자였다. 사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지도자로 묘사되었고(여호 1,7-9; 11,15), 신명기 학파의 역사가가 볼 때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임금들 특히 다윗, 히즈키야, 요시아의 전형으로 생각되었다. 신명기 17장 18절에 언급된 이상적인 임금처럼 여호수아는 모세의 율법 사본을 기록했다(여호 8,32).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여호수아의 모습이 개혁을 주도한 요시아 임금의 모습에 따라 형성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관점은 여호수아를 ‘유다와 이스라엘의 임금’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학자들의 의견이 어떠하든 우리는 성경이 전해주는 관점을 중요시해야 한다. 그의 생애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역사적인 신빙성에 대한 토론은 뒤로하고,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전쟁을 지휘했고 가나안 땅을 분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실제인물이라는 것은 우리가 견지해야 할 관점이다.
묵상 주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데려오너라. 그는 영을 지닌 사람이다. 너는 그에게 네 손을 얹어라.”(민수 27,18). [2012년 9월 23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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