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의 인물] 팔레스티나 (1)
오늘날 팔레스티나는 ‘지중해 동부지역’을 가리킨다. 이스라엘과 레바논, 요르단과 시리아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분쟁은 여전하지만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교에서 모두 신성시 하는 땅이다. 회교도들은 구약의 ‘모세오경’을 경전으로 받들기에 이 지역을 성지로 여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마호메트’가 승천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스라엘이 이곳에 정착하기 전에는 가나안(Canaan)땅이라고 했다. 가나안의 어원은 이곳에서 생산되는 ‘자주빛 염료’와 연관된 말이라고 한다. 기원전 이천 년에 이미 염색을 사용할 만큼 발달된 문화가 있었던 것이다. 유다인들은 이 지역을 ‘약속의 땅’으로 부르며 점령을 정당화했다.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주기로 조상들과 약속하셨다는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 이곳에 정착할 때 또 ‘다른 민족’도 정착을 시도했다. ‘필리스티아인’들이다. 성경에서는 ‘블레셋 사람’이라고 부른다. 필리스티아는 ‘그리스 말’이고 블레셋은 이스라엘 말이다. 곧 히브리어다. 이들은 바다를 떠돌던 해양민족이었는데 지중해 연안에 도시를 세우고 주저앉은 것이다.
필리스티아인은 차츰 내륙으로 들어왔고 당연히 두 민족은 부딪혔다. 초기에는 그들의 군사력이 더 강했다(판관 13-16장). 이스라엘은 ‘계약 궤’를 빼앗길 때도 있었다(1사무 4장). 이들을 처음으로 제압한 사람은 다윗임금이다. 이후부터는 이스라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솔로몬 임금은 이집트와 조약을 맺고 교류를 강화했다. 틈새에 끼인 블레셋은 점점 무력해졌고 강국들의 지배를 받다가 마침내 역사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들의 흔적은 팔레스티나(Palestina)란 지명으로 남아 있다. ‘필리스티아인이 사는 땅’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이 이렇게 불렀다. 그들은 유다인들의 끈질긴 저항과 마지막 독립전쟁(AD 132-135)을 분쇄한 뒤 ‘일부러’ 이 명칭을 사용했다. 이제부터 이 땅은 이스라엘과 아무 연관이 없다는 강력한 표현인 셈이다.
팔레스티나는 해발 800m 이상 되는 북부지역과 바다보다 ‘약 400m’ 낮은 남부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지역 간의 거리는 불과 23km 정도다. 해수면보다 낮은 남쪽에는 강물이 내려와 고인 ‘사해 호수’가 있다. ‘요르단 강’의 종착지도 여기다. ‘요르단’은 ‘땅보다 낮은’이란 의미다. 더 이상 흘러갈 곳이 없기에 호수의 물은 ‘소금기’가 매우 높다. 이 지역은 지구에서 가장 낮은 땅으로 알려져 있다. ‘오리지널 팔레스티나’의 면적은 우리나라의 경상남북도를 합친 정도에 불과하다. [2009년 10월 11일 연중 제28주일(군인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호계본당 주임)]
[성경 속의 인물] 팔레스티나 (2)
팔레스티나의 기후는 변화가 심하다. 북쪽은 온대성 기후로 분류되지만 사해(死海)가 있는 남쪽은 열대성 식물이 자라며 봄 가을이 거의 없다. 일 년의 절반 이상은 비가 오지 않는 ‘건기’다. 그렇지만 10월 하순부터 4월 중순까지는 거의 매일 비가 온다고 한다.
마르코 복음에는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 집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자 지붕 위로 올라간다. 그들은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병자가 누워있는 들것’에 줄을 매어 아래로 보냈다(마르 2,1-5). 물론 예수님 앞으로 정확하게 내려 보냈을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팔레스티나의 ‘가옥구조’ 때문이다. 반년 이상 비가 오지 않기에 대부분의 지붕은 거적때기로 대충 덮어두었던 것이다.
이 지역은 로마인들이 들어오기 전에는 ‘가나안’으로 불리었다. 이곳을 점령한 이스라엘도 그렇게 불렀다. 이후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가 차례로 정복했지만 공적 지명은 늘 ‘가나안’이었다. 로마인들도 처음에는 가나안의 ‘유대지방’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독립전쟁을 평정한 뒤에는 ‘팔레스티나’로 바꾼다. 유다인과의 전쟁에 질린 나머지 연관성을 없애려는 의도였다.
이후 로마는 700년간 이 지역을 다스렸다. 전성기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동로마 시대였다. 황제의 모친 ‘헬레나 황후’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십자가’를 찾아냈고 그곳에 교회를 세웠다. 이후 팔레스티나의 종교는 대부분 그리스도교로 바뀌었고 많은 학자를 배출해냈다. 황제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물자와 지원이 넘쳐났고 인구도 급증했다. 하지만 7세기 초부터는 회교도들이 이곳을 장악한다. 636년에 일어난 ‘야르무크 전투’의 패배로 동로마는 손을 땠던 것이다.
이후 유다인들은 팔레스티나에 들어가지 못했다. 11세기가 되자 유럽인들의 성지순례가 시작되었고 ‘성지를 되찾자는’ 십자군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한때 십자군은 성공을 거두어 팔레스티나에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며 건재했으나 13세기 말에 사라지고 만다.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유다인 지도자 ‘테오도르 헤르츨’(T. Herzl)은 ‘시오니즘’을 주창한다. 이스라엘을 재건하자는 민족운동이었다. 이후 유엔에서는 팔레스티나에 아랍인 국가와 유다인 국가를 따로 세울 것을 결정했고,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독립국가’를 인정했다. 하지만 아랍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즉시 이스라엘 지역을 침범했다. ‘중동전쟁’의 시작이다. 성경은 왜 이곳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했을까? 현실 안에는 그런 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암시일 것이다. [2009년 10월 18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호계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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