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도덕 해설] 때로는 함께 때로는 따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그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성경의 가르침들에 대해 다른 종교 신자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실제로 많은 부분에서는 서로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부분에 가면, 또는 어느 정도의 선을 넘어가면, 판단의 기준이 서로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생명 문제를 예로 들어봅시다. 우리나라에서 인권운동을 하는 분들이 가톨릭교회와 가장 쉽게 협력할 수 있는 부분은 사형제 폐지 문제라고 합니다.
정확히 말한다면,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근거가 그리스도인에게서나 비그리스도인에게서나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형제 폐지를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많은 비그리스도인들도 우리와 공통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낙태 문제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여기서는 가톨릭교회와 다른 입장을 보이는 사람들이 좀 더 늘어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가톨릭 신자들이 더 소수파가 되는 것은 아마 피임 문제에서일 것입니다. 금년에 이른바 ‘응급 피임약’ 문제가 부각되었었지요. 가톨릭교회는 응급 피임약은 낙태약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비신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응급 피임약을 사용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물론, 지금 제 이야기가 거의 이론적인 수준에 머문다는 것은 압니다. 가톨릭 신자들 가운데에도 낙태나 피임 문제에 관련하여 교회의 입장을 온전히 따르지 않거나, 머리로는 교회의 가르침이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낙태와 피임을 행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서는 그 문제는 잠깐 접어두고, 판단의 기준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성경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시하는 도덕적 성찰의 구체적인 기준들 가운데 두 가지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지난달에, 성경이 제시하는 근본 원칙들이 “성경의 인간관에 일치하는가?” 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에 일치하는가?”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성경과 도덕」에서는 이 기본 원칙들을 제시한 다음, 성경에서 나타나는 여섯 가지 현상들을 관찰하며 거기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의 행동을 위한 여섯 가지 구체적인 기준들을 지적하는데, 그 처음 두 가지가 수렴과 대립입니다. 성경은 세상의 여러 가지 판단들과 때로는 함께, 때로는 따로 또는 그들을 거슬러서 입장을 취한다는 것입니다.
수렴 : 자연 도덕에 대한 개방성
먼저, 성경에서 제시하는 도덕의 많은 부분이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이 기준으로 삼는 도덕규범과 일치하는 경우들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고대 문화에 대한 연구가 발전하면서 성경의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나 법률 조항들 안에 주변 문화들에서 들어온 요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창세기 첫 부분의 창조설화와 홍수설화도, 비슷한 형태로 여러 문화들 안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들입니다. 성경은 주변 문화 안에 전해지던 이런 이야기들을 취하여 이스라엘의 하느님에 대한 고유한 신앙 안에 동화시켰던 것이지요.
법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함무라비 법전 서문에서 함무라비는 이 법전이 약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불의한 자들, 힘센 자들이 약한 이들을 억누르지 못하도록 신들이 자신을 택하여 법전을 공포하도록 했다는 것이지요. 성경에서도 나타나는 주제입니다. 법전의 구체적인 조항들에서도 성경에 들어있는 법전들과 여러 가지 공통점들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많은 법률과 도덕적 지침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인간이 누구나 양심을 가지고 있기에 - 더욱이 그것이 하느님께서 사람들 마음 안에 새겨주신 하느님의 목소리라고 할 때 -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의롭고 선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성경의 도덕적 기준과 그대로 일치하게 되지요.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든가 하는 것들은 모두 여기에 속하게 됩니다. 약한 이들의 권리를 지켜주어야 한다는 것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러한 원칙을 현대의 상황들에 적용시켜 봅시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한 문제, 군비 경쟁 속에서 지켜가야 할 민족들 사이의 평화 문제, 문화에 의하여 결정되는 남녀 각각의 역할에 대한 문제, 자연 자원의 개발과 분배 문제, 생태학적 문제 등에 대하여 성경은 모든 개별적인 경우들을 위하여 정확하게 만들어진 답을 제시해주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찾아가야 할 부분입니다.
여기서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그 과정을 진행시켜 나가야 하는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현대 세계가 우리에게 던지는 새로운 질문들 앞에서, 우리는 모든 인류와 대화하고 협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난달에 말씀드린 두 가지 근본 원칙이지요. 성경의 인간관에 부합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에 일치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이 정의와 선을 추구할 때에 우리는 그들과 대화하고 식별하며 그들과 함께 행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립 : 그리스도교적인 가치와 양립될 수 없을 때
그런데 성경은, 때로는 어떤 사회나 집단이나 개인이 따르는 도덕규범이나 관습에 분명하게 반대 입장을 취하기도 합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하게 되었을 때에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의 위험에 노출됩니다. 판관시대에도 그랬고, 왕정시대에도 우상숭배는 예언자들이 끊임없이 맞서 싸워야 했던 문제였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엘리야 예언자를 들 수 있지요. 아합이 다스리던 이스라엘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예언자는 무수히 많았지만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을 섬기는 예언자는 엘리야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주장하던, 또는 생각 없이 따라가던 것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신앙에 대한 충실성 때문이었지요.
마카베오 시대의 항쟁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유다교가 박해를 받고 외국의 지배자들이 이교 예배를 강요하던 때에, 사람들은 순교를 하거나 아니면 외세에 맞서 일어나 싸웠습니다. 이때에 항쟁을 이끈 이들이 내세운 것은 ‘율법에 대한 열성’이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요한 묵시록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박해를 받던 시대, 묵시록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가 맞서 싸우고 있다고 말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시대였지요. 어쩌면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눈에는 이 세상 안에 실현되고 있는 하느님 나라보다도 맹위를 떨치고 있는 박해의 세력이 더 강력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묵시록은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이미 승리를 거두기 시작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어린양께 결합되어 그분의 승리에 동참하고 장차 그분과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이니, 악의 세력에 굴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은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오늘날, 조각상을 숭배하는 우상숭배는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상숭배와 똑같은 태도는 개인의 자유, 사회나 집단의 이익, 국가 권력 등을 절대시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 이상의 가치라는 것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잊어버리거나 무시하거나 부인합니다(117항 참조). “세속주의, 자본주의, 물질주의, 소비주의… 이 모든 ‘주의’의 공통점은 인간의 삶을 현세에 갇혀 있는 내재적 체계로 간주하는 것이다”(117항).
이들은 인간을 기만합니다. 하느님 아닌 다른 어떤 것에 인간을 종속시키고 인간을 수단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기만을 폭로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인간의 존엄성을, 또한 피조물로서 하느님 앞에서 지녀야 할 인간의 겸손을 잊어버리는 세상이라면,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로마 12,2)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들로 하여금 불굴의 인내와 예언자적 증언으로 자신의 신앙을 실천할 수 있게 해주는 그들 자신의 정체성을 지녀야 한다”(118항).
그리스도교적인 가치들을 우리의 삶의 기준으로 세우고, 필요한 경우라면 이 세상을 거슬러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 안소근 실비아 - 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가톨릭대학교와 한국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성서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있다. 주교회의 천주교용어위원회 총무이다.
[경향잡지, 2012년 10월호, 신은근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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