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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신약여행3: 바오로 사도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1-27 조회수2,923 추천수1
[백운철 신부의 신약여행] (3) 바오로 사도

구원자 예수를 삶으로 증거한 열정의 사도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열 두 제자만큼이나 큰 영향을 미쳤다.
 
바오로는 열정적인 이방인 사도였다. 그는 로마제국의 광대한 땅을 누비며 이방인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곳곳에 교회를 세웠다. 본래 유다교의 좁은 테두리에 갇혀있던 예수운동을 세계종교운동으로 발전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또 그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사건을 가장 심오하게 해석한, 신약 안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가장 위대한 신학자였다.

하지만 바오로는 그 전에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한 박해자였다. 자신 스스로도 보잘것없는 사람(1코린 15,9)이라고 고백한다. 그런데 왜 예수는 바오로를 사도로 선택했을까? 예수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고 말했듯, 오히려 이런 흠 때문에 바오로를 사도로 선택한 것으로 해석된다. 때문에 바오로 서간은 부족한 자신을 사도로 선택하고 도구로 쓴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과 위대한 섭리에 대한 절절한 고백과 성찰이 근간을 이룬다.

신약에서 바오로 자신이 언급한 두 대목(사도 7,58, 필레 1,9)에 근거하면 그는 1~8년 출생으로 추정된다. 많은 이들이 사도 이름이 '사울'이었다가 예수 발현을 체험하고 '바오로'로 개명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유다인들은 대개 히브리식과 그리스ㆍ로마식 두 가지 이름을 갖고 있었다. 사울은 히브리식 이름이고, 바오로는 로마제국 시민으로서 가졌던 이름이다.

바오로는 킬리기아 수도 타르수스에서 자라나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떠났고, 당대 유명한 랍비의 문하생으로서 랍비 수업을 받았다. 때문에 유다교 전통에 정통했으며 당대 그리스 문화에도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랍비들이 수공업을 직업으로 삼았듯, 그는 천막 짜는 일을 했다. 직업 특성상 이동하면서도 일할 수 있었고, 덕분에 생계는 물론 선교자금도 스스로 충당했다.

무엇보다 그는 동족 또래들보다 유다교 신봉에 열심이었다. 종교적 열성은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이에 대한 배격과 처단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바오로 역시 율법에 대한 열정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에 이르렀다. 바오로의 율법관은 보수적이었다. 때문에 율법과 성전에 비판적이었던 그리스도인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또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모두 저주받은 자라는 말씀(신명 21,23)에 근거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그리스도이자 주님이라는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 예수가 발현해 "이방인의 사도가 돼라"고 계시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으로 바오로의 신념과 신학이 바뀌면서 랍비 지망생으로 전도양양했던 모든 경력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이를 "예수님께서 이미 나를 당신 것으로 차지했다"(필리 3,12)고 고백했다.

바오로 서간의 중요한 특징은 나자렛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자렛 예수의 가장 주요한 메시지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였고, 예수는 복음 선포자였다. 그러나 바오로에게는 예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는 구원이 복음 내용이었다. 따라서 사도에게 예수는 복음 선포의 내용이자 대상이었다. 나자렛 예수의 행적과 말씀은 2차적일 수밖에 없었다. 제자들이 예수를 스승님이나 랍비라고 부른 것과 다르게 바오로가 주님이라고 부른 것도 이에서 비롯된다. 그에게 예수는 스승의 차원을 뛰어넘어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해주는 구원자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수에 대한 이해의 변화가 바오로 복음의 기본을 이룬다.

바오로가 예수 생전에 그를 만난 적이 없다는 것도 복음에 나자렛 예수가 거의 언급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삶의 방식과 관련이 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가족과 결별하고 완전한 무소유와 철저한 섬김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게 했다. 또 권력으로 백성을 누르는 통치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바오로는 보다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제국주의 현실을 인정하고, 권력이 백성을 위해 사용될 수 있기를 바랐다. 또 예수처럼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이를 돕고, 나를 따르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보다 각자 처지에 맞는 범위 내에서 섬기고 나눌 수 있기를 요청했다. 예수가 보인 급진적 사상과 윤리는 바오로에게서는 많이 희석돼 하나의 공동체가 평화롭게 형제애를 나누며 살아갈 수 있는 수준이 됐다.

예수에 대한 바오로의 소극적 관심은 대단히 신학적이다. 예수가 주님으로 현양되고 고백되는 이유는 그의 지혜로운 가르침이나 기적을 일으킨 권능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십자가에 달린 그를 부활시켰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가 자신을 하느님 아들이라고 선포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이 예수를 당신의 아들로 선포하고 그리스도로 받아들였다는 데서 출발한다. 온전히 하느님 선택과 권능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인간이 개입할 수 없는 죽음과 부활 사건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신학적 이유 때문에 예수 생애보다는 그의 죽음과 부활을 복음의 중심에 두었던 것이다.

[평화신문, 2013년 1월 27일, 정리=김은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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