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해 - 구약성경의 맥] 제4주제 : 시원 역사(창세 1-11장) 구약성경 해석의 틀
구약성경을 읽는 방법은 다양해서 어떤 방법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지금부터 제가 소개해 드리는 방법은 현재 구약성경의 형태와 배열 순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면서 구약성경의 첫 부분이 구약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구약성경의 첫 부분인 창세 1-11장은 마치 어떤 책의 머리말이 그 책 안에 담긴 내용을 집약적으로 알려주는 것처럼 그 뒤에 이어질 내용들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일종의 해석학적 틀을 제공합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과 악화된 관계
구약성경 46권 가운데 맨 먼저 나오는 책을 ‘창세기’라고 부르고, 영어로는 Genesis, 히브리어로는 브레쉬트(‘한처음에’라는 뜻)라고 합니다. 모두 ‘시작’이나 ‘기원’을 의미합니다. 제목에 걸맞게 창세기는 시작, 기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기원에 관한 이야기는 크게 창세 1-11장과 12-50장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첫 부분, 창세 1-11장은 세상과 인간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이고, 뒷부분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기원에 관한 이야기는 어떻게 서로 연결이 되고, 서로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요?
먼저 창세 1-11장의 내용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창세 1-11장을 읽는 데, 지금 현재 우리가 가진 구약성경 본문에 집중하여 이 본문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파악하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창세 1-3장은 하느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신 세상과 그 세상에 살아가는 피조물들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첫 번째 창조이야기(1,1-2,4ㄱ)는 그 특유의 화법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얼마나 질서정연하고 조화로운지를 강조하며 하느님께서 지으신 세상이 좋고 아름다운 곳이었음을 일곱 번이나 말합니다.
일곱이라는 수가 구약성경에서 완전을 뜻함을 감안할 때, 일곱 번 되풀이되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는 표현은 하느님께서 지어내신 세상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 창조이야기의 첫 부분 (2,4ㄴ-25)에 따르면 태초의 인간들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에덴동산에 살면서 영생을 누렸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들은 다 초식을 하면서 서로 적대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이루신 세상의 질서와 조화를 즐기면서 하느님과 함께 동산을 거닐 수 있는, 곧 하느님과 어떤 거리감도 없는 친교를 나눌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에 대한 인간의 불순종으로 이 조화와 질서는 곧 깨어지고, 그 결과로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생명나무 주변에는 불칼이 돌고 케루빔들이 그것을 지키게 됩니다.
이 말은 이제 인간은 영생을 누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은 이제 이마에 땀을 흘려야 소출을 얻게 됩니다(3,19 참조). 곧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하면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땅의 관계 역시 그 조화는 깨어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이후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땅의 관계는 악화일로에 들어서게 됩니다. 먼저, 이 관계는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의 범죄로 더욱 악화됩니다. 하느님은 카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땅을 부쳐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4,12).
인간관계의 악화와 폭력, 그리고 노아를 통한 회복
카인으로 악화된 인간관계는 그의 후손, 라멕(아담의 7대손)에 이르러 더욱 악화됩니다. 라멕은 자기 아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다야, 칠라야, 내 소리를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여라. 나는 내 상처 하나에 사람 하나를, 내 생채기 하나에 아이 하나를 죽였다. 카인을 해친 자가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친 자는 일흔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는다”(4,23-24). [라멕의 말을 완전히 역전시키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마태 18,22에서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인간관계의 악화와 폭력은 창세 6,5-6에 이르면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쓸어버리겠다.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6,7)
이 말씀은 인간의 죄악이 인간에게만 해악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 전체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결국에는 그들까지 멸망에 이를 운명에 놓인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과 땅의 관계는 이제 단절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땅 위에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온 땅에서 떨어져나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단 한 사람 노아를 찾아내셨습니다. 온 세상을 샅샅이 찾아보시며, 한 의인을 찾아내신 것입니다. “노아만은 주님의 눈에 들었다”(6,8).
이 노아를 통하여 인간과 땅의 조화는 다시 회복될 것입니다. 노아의 아버지는 노아의 이름을 지은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아이가 주님께서 저주하신 땅 때문에 수고하고 고생하는 우리를 위로해 줄 것이다”(5,29).
결국 홍수가 내려 땅에서 온갖 생물들이 쓸려 내려갔지만 노아를 통하여 회복된 세상을 향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8,21). 그리고 농부인 노아는 포도밭을 가꾸는 첫 사람이 되었습니다(9,20).
이로써 단절되었던 인간과 땅의 관계는 노아를 통하여 회복됩니다. 그런데 이미 하느님께서 선언하신 것처럼 노아를 통하여 새롭게 시작된 세상 역시 부패와 타락으로부터 면제된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들 함은 아버지인 노아의 벗은 몸을 모욕하였고, 사람들은 탑을 세워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고자 하였습니다. 태초의 조화와 질서는 점점 잊혀가고 인간의 불행은 땅에서 증가되고 있었습니다.
관계 맺음을 통한 질서 회복
하느님은 다른 대안을 생각하셨습니다. 바깥에서 주어지는 처벌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호소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관계 맺음을 통하여 원래의 질서를 회복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 대안이 이스라엘 민족이며 한민족과 관계를 맺으심으로써 그 관계를 통하여 본래의 인간됨의 회복과 태초의 질서와 조화를 다시 이루시고자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원대한 계획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아브라함이라는 한 인물을 부르시어,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당신이 보여주실 땅으로 가라는 초대로 시작됩니다(12,1 참조).
이어지는 구약성경 전체의 역사는 이스라엘 민족과 그들에게 땅을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고, 그들은 또 어떻게 그 땅을 잃게 되었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태초의 인간들을 당신이 만드신 에덴동산에 살게 하신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부르시어 당신이 주시는 땅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 살았던 태초의 인류가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어김으로써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고, 동시에 그들과 땅의 관계 역시 악화일로에 들어섰다면, 이스라엘 백성 역시 하느님께 충실하지 않으면 그 땅을 잃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들었고, 그들은 역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계명을 성실히 지키지 않았던 결과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세상에서 유일한 의로운 이였던 노아를 통하여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셨던 것처럼, 당신의 계명을 어기고 약속의 땅을 잃었던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알려주셨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가슴에 당신의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주셔서 그들과 새 계약을 맺겠노라고 약속하셨습니다(예레 31,33 참조).
에제키엘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셔서 그들이 하느님의 법을 지킬 수 있게 해주실 것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에제 36,26-27 참조).
시원 역사와 이어지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드러내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과거의 사건으로 그치지 않고 지금도 당신의 법을 마음으로 알아듣고 따를 이들을 당신께로 부르심으로써 그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태초의 질서와 조화를 회복시키시려는 하느님의 원의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으로 우리 가운데 드러나고 있습니다. 선들바람이 부는 해 질 녘 에덴동산에서 온 인류가 하느님과 함께 저녁 산책을 나서는 그날이 올 때까지 말입니다.
* 김영선 루치아 - 마리아의전교자프란치스코회 수녀. 가톨릭대학교에서 석박사 통합과정 2년을 마치고 미국 보스톤대학(예수회)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서강대학교에서 구약성서 입문을 강의하고,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구약성경과 피정 지도’라는 제목으로 구약성경 세미나를 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4월호, 김영선 루치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