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성서적 50주년의 의미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레위 25,10).
1961년 6월 6일 인천대목구 설정(9개 본당, 59개 공소, 23,169명의 신자와 19명의 사제)과 더불어 출발한 인천교구는 2011년으로 교구설정 “50주년”이라는 뜻 깊은 해를 맞이하였다. 이에 “50주년”이 주는 진정한 의미와 그 중요성을 신,구약 성경적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1. 희년의 어원과 의미
통속적으로 금경축(金慶祝)이나 금혼식(金婚式)이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누군가의 “50주년”을 기념하지만 성경에서는 50주년을 맞는 그 해를 “희년(禧年)”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성경의 희년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요벨”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용어의 본래적 의미는 ‘숫양의 뿔 나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전쟁의 시작을 알리기 위한 도구(여호 6,5) 혹은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선포하거나 백성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집중시키기 위해 불었던 도구(탈출 19,13)로써 사용되었다. 하지만 후대에는 희년을 선포할 때 주로 이 ‘숫양의 뿔 나팔’을 불어 그 시작을 알렸다. 따라서 “요벨”이라는 말은 7년 주기의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고 50년째 되는 새로운 해(희년)가 시작되는 ‘속죄날’을 알리기 위해 불었던 이 악기에서 유래된 듯하다(레위 25,9).
예로니모 성인은 희년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요벨”을 라틴어 “유비레우스(jubilæus)”라고 번역하였다. 희년을 뜻하는 라틴어 “유비레우스(jubilæus)”는 “농부나 목동들이 기뻐하며 외쳐 부르는 소리” 혹은 “환호성, 환희에 넘쳐 부르는 노래”라는 의미를 지닌 “유비룸(jubilum)”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용어들은 우리말로 “희년(禧年)”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희년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큰 북이나 장구 같은 악기(?)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며 웃을(口) 수 있도록 기쁨(喜)을 보여주는(示) 축복의(禧) 해(年)라고 풀이할 수 있다. 따라서 “50년”을 지시하는 히브리어 “요벨”이나 라틴어 “유비레우스” 더 나아가서 우리말 “희년” 모두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즉, 하느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인간에게 은총과 축복을 충만히 내리시어 인간으로 하여금 기쁨과 환희를 느낄 수 있도록 해주시는 “거룩한 해”(레위 25,10.12)이다. 그리하여 희년은 인간으로 하여금 해방(레위 25,10)을 맛보도록 해주시는 축복의 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에게 선포되는 이 희년은 “기쁨의 해”이며 “은총과 축복의 해”라고 할 수 있다. [2011년 5월 15일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인천주보, 송태일 안셀모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2. 희년의 주요 내용
구약성경 안에서 희년의 원천과 그 내용을 알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레위기 25장이 거론된다. 레위기 25장은 내용상 2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부분은 안식년(2b-7절)과 희년(8-22절)에 관한 규정을 언급하고 있는 레위 25,2b-22이며, 두 번째 부분은 소유권 양도(24-34절)와 가난하게 된 형제들(35-38절)과 가난의 결과로 노예로 팔린 형제를 구하는 규정(39-55절)을 언급하고 있는 레위 25,24-55이다.
레위기 25장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구절은 이 2부분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내 곁에 머무르는 이방인이고 거류민일 따름이다.”라는 23절이다. 레위기 25장의 핵심 주제는 바로 땅은 오로지 하느님에게 속한 것이라는 기본 사상이다. 땅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며 따라서 인간은 땅의 진정한 소유주가 아니라 단지 그것을 이용하고 잠시 머물다가 떠나는 나그네와 같은 일시적 체류자이며 식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레위기 25장에 잘 나타나 있는 희년의 취지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과 그들에게 주어진 땅이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며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살 수 있게 된 처지를 잘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가난에 떨어지는 사람들이 없고, 그 가난의 결과로 노예나 종이 되어 자신의 본래의 존엄성을 잃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은 단지 사회정의를 세우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과 땅을 포함한 세상 모든 창조물의 주인이심을 믿어 고백하는 신앙행위인 것이다.
희년 역시 땅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레위 25장 10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50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라고 명하신다. 선포될 해방의 내용은 바로 저마다 자신의 땅(소유지)을 되찾는 것과 종으로 팔렸다가 자유의 몸이 되어 자신의 가족 공동체(씨족)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내용에 따르자면, 희년은 땅과 인간이 처음 시작한 본래 자신의 위치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하느님께서 주신 ‘본래적 존재의 의미로 환원(restitutio in integrum)’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희년의 주된 내용은 바로 하느님의 소유이며 축복의 상징인 땅을 다시 하느님께 환원시키는 것이다. 이는 곧,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집트에서의 억압된 노예 신분에서 자유를 얻은 해방과 구원 체험을 기본 바탕으로 하여 형제와 이웃의 어려움과 고통을 땅의 환원, 노예해방, 빚의 탕감 등등의 다양한 방법을 통해 이 세상 삶 안에서 그 구원 체험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2011년 5월 22일 부활 제5주일 인천주보, 송태일 안셀모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3. 희년과 그리스도인의 삶
구약성경에 나타난 희년 규정들이 그대로 실행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대부분의 희년 규정들은 이상적인 것으로서, 현실적인 사실이라기보다는 희망으로 머물렀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희년 규정들이 중요한 것은 희년의 의미이다. 희년의 근본 개념은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완전하고도 총체적인 본질에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땅을 잃은 사람은 자신의 땅을 다시 얻게 되고, 노예로 종살이 하던 사람은 자유인이 되어 자신의 가족 공동체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희년의 근본 의미는 예수님에 의해서 다시 선포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펴놓으시고 희년을 선포하신다 :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이사 62,1-2). 이 루카 복음은 희년의 명확한 의미를 잘 전달해주고 있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에게 해방과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여 그들이 “제자리”를 찾아 가게끔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희년 곧 “은혜로운 해”인 것이다.
그러나 루카 복음은 인용 구절인 이사야서에는 찾아 볼 수 없는 첨가된 부분을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한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눈먼 이들은 바로 나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서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고립시키는 눈먼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더 나아가서는 이러한 눈먼 사람들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라고 선포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어쩌면 다른 사람들과 서로 다르다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나 자신의 입맛과 감정에 따른 판단과 비판으로 세상을 보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우리 주위에 살고 있는 이웃의 가난과 고통을 외면하여 눈을 감으려하는 우리 자신일 것이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눈먼 자들에게까지도 눈을 열어 주시어 다시 자신의 주변 이웃을 보게끔 해 주신다. 주님의 이 은혜로운 해인 희년 선포를 들음으로써 그 말씀이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희년은 무엇보다도 은총과 축복의 해이기에 기쁨의 축제이다. 희년이 우리 모두에게 기쁨의 축제가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주신 본디 자기 자신의 “제자리”를 찾는 것이다. 이는 곧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이 희년은 다른 어느 곳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hic et nunc)”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나라의 축제이기에, 우리 모두 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신명나는 축제인 것이다. [2011년 5월 29일 부활 제6주일(청소년 주일) 인천주보, 송태일 안셀모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