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의 열정적인 인물 - 제베대오의 부인
그녀의 이름을 우리는 모른다. 그녀는 성경에서 “제베대오의 부인”이라고 칭해진다. “제베대오 두 아들의 어머니”라고 불러지기도 한다. 이러한 호칭은 당시 유다인들에게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이었다. 여성은 대개 “누구의 부인” 혹은 “누구의 어머니”, “누구 아들의 어머니”라고 불러졌다. 여성의 고유한 인격과 이름이 경시되었던 것이다.
그녀의 두 아들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드로와 안드레아와 함께 첫 번째로 부르시어 제자로 삼으셨다. 당시 그들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는데, 부르심을 듣자마자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야고보와 요한은 이제껏 아버지 제베대오의 사업에 분명 큰 힘이 되어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아버지를 떠난다. 하지만 제베대오에게는 장성한 두 아들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사랑스런 부인도 있었다. 그러나 부인도 가족과 집안일과 남편의 사업을 뒷전으로 여겼다.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모험을 감행하며 예수님을 따라갔던 두 아들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는가? 이 경우 그녀는 적어도 아들의 입장에 서서 항상 두 아들을 예의 주시했어야 마땅할 것이다. 아니면 지금까지의 삶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살고 싶었던 갈망 때문이었는가? 말하자면 예수님의 말씀에 완전히 매료되었기 때문이었는가? 이에 대해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 주요 원인이 아들들에 대한 열정인지 예수님께 대한 열정인지 알 수 없다. 아마 두 요인이 모두 작용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일행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그 일행에는 남자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여자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 몇몇 여인들만 성경에서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 곧 십자가에까지 인내하며 그분을 충실하게 따라다녔던 여성들 중에는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거론된다.(마태 27,56 참조)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걱정(열정)
마태오 복음이 그녀를 먼저 묘사한 모습은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다하는 헌신적인 어머니이다. 그녀는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자식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기 아들들의 높은 자리를 청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낮춘다. 그녀는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을 한다. “무엇을 원하느냐?”는 예수의 물음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 20,21)
이러한 간청을 하는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가장 좋은 것을 자식들이 차지하기를 원한다. 이는 모든 어머니의 소망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망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첫 번째로 부르심을 받은 제자였다. 그리고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함께 체험하는 영광을 누렸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그녀는 아들들이 하느님의 나라에서도 같은 영광을 누리기를 소망하고 있다. 곧 주님의 오른쪽과 왼쪽인 영광스런 자리를 차지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간청은 무례하게 보인다. 거기에는 다른 열 제자가 함께 있었고, 이 일로 인해 불쾌함을 크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간청은 그녀가 홀로 자원한 일인가, 아니면 아들들이 어머니께 부탁하여 이루어진 일인가?
마르코 복음은 두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리를 직접 간청하고 있다고 보도한다.(마르 10,35-40) 그리고 마태오 복음도 두 아들이 어머니의 간청을 부추긴 장본인으로 여기는 듯하다. 예수님의 태도가 이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의 간청을 즉각 들어주시지 않는다. 그렇다고 거부하시지도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이 흔히 기대하듯이, 어머니다운 간청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칭찬하시지도 않는다. 도리어 그분께서는 직접 두 아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신다. 당신의 옆자리를 차지하는 일은 그 자체로 사람 위에 군림하고 세도를 부리는 자리에 오르는 일이 아님을, 오히려 힘 있는 자들을 통해 멸시를 받고 고통마저 감수해야 하는 겸손한 봉사의 자리임을 깨닫게 하신다. 그 자리는 곧 봉사와 섬김의 자리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 자리를 주겠다고 약속하시지 않는다. 그들처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옆자리를 차지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그분의 운명에 온전히 참여해야 한다. 이러한 말씀을 들려주시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는 목전에 다가온 수난을 제자들보다 더 분명하게 알고 계셨다. 바로 이 명확한 인식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고난의 잔을 언급하신다. 그분은 이 세상에서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권력으로 내리누르는 것이 당신의 사명이 아닌 것처럼, 하늘나라에서 권력자와 같은 의미로 첫째 자리를 추구하는 것은 헛된 것임을 분명히 하신다. 그 자리는 세상과는 다른 척도와 기준이 적용된다. 모든 판단은 하느님께 달려 있다.
자신의 길을 걷는 어머니
두 아들과 어머니는 비록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그분의 설교를 수없이 들었을지라도 아직까지는 ‘낡은 사고’에 붙잡혀 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특별한 수업’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특히 어머니, 곧 제베대오의 부인에게 그렇다. 마태오 복음은 이 부인의 이야기를 예수님 거절로 얄팍하고 실망스럽게 끝내지 않는다. 복음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예수의 십자가 밑에 다른 많은 여인들과 함께 있었다.(마태 27,55-56)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와 함께 거명되는 마리아 막달레나,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등의 여인에 관해서(마르 15,40 참조)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갈릴래아에서 예수님을 따르며 시중들던 이들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시중들다 혹은 섬기다’의 단어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서 여인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의 참된 제자들로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여인들은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라는 말씀을 예수님 곁에 있던 남자들보다 더욱 실천하고 있지 않은가?
어쨌든 제베대오의 부인은 그토록 갈망했던 천상의 영광스런 자리보다는 십자가에서 못박히는 고통스런 자리를 추구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고유한 자리를 깨닫는다.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깨달은 이후부터, 그녀는 맹목적으로 더 이상 자기 아들들을 따라다니지 않았다. 그녀의 아들들은 예수께서 체포되신 다음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다.(마태 26,56 참조)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깊은 내면이 일깨워주는 올바른 길을 걷는다. 주님의 고난의 잔에 참여하는 길을 걷는다.
결국 그녀는 예수께서 자기 아들들에게 말씀하신 바를 그대로 행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기 자신이 되었다. 그래서 ‘누구의 어머니’만이 아니라, 자신의 분명한 확신으로부터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 그녀에게는 예수님께 대한 열정이 불타올랐던 것이다.
[쌍백합 제13호, 2006년 여름호, 김선태 사도요한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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