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의 여인] 타마르
여성의 생명 잉태 권리 찾은 재치있고 지혜로운 여인
타마르와 그 시아버지 유다에 관한 이야기는, 이스라엘에서 후손이 개인과 씨족에게 차지하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경우에 비로소 이해된다. 이 이야기는 위대한 다윗 왕을 탄생시켰던 유다 가문의 초기 이야기이다. 유다가 거주했던 산악 지대는 가나안 도시에 가로막혀 다른 형제들이 사는 지역들과 직접 연결되지 않았다. 나중에 이방인이 된 가나안 사람들과 함께하는 공동생활을 타마르와 유다의 이야기에서도 나타난다.
유다의 가문 이야기
성경은 유다가 형제들과 떨어져 가나안 도시에 내려와 거기에 기거하는 아둘람 사람에게 붙어 살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가 가나안 여자와 결혼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음이 몹시 불편했을 것이다. 유다의 아들들, 곧 성조 야곱의 손자들은 가나안 사람의 집에서 태어났다. 이 사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결혼한 남자는 당시에 아내를 자기 부모의 집에 데려갔었다. 하지만 유다는 자기 아내를 아버지의 집에 데려갈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씨족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나중에 맏아들에게 아내를 얻어 주었을 때, 이제 사정은 변하게 되었다. 유다는 곧 가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집을 소유하였고, 따라서 신부가 가나안 여자일지라도 혼인 후에 자신의 집에 데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맏아들 아내의 이름은 타마르인데, 그 뜻은 대추야자나무이다. 야자나무는 고대 오리엔트에서 생명의 원상징이었고, 태양신의 날개로 보호를 받는 생명의 나무였다. 하지만 타마르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모진 운명을 겪는다. 그의 남편이 죽자, 시아버지 유다는 당시 씨족의 관습대로 타마를 둘째 아들의 아내로 내어주었다. 타마르가 시동생에게서 얻은 자녀로 남편의 대를 이어가게 한 것이다. 시동생과의 이런 결혼 풍속은 당시에 후손을 남기지 않고 죽은 남자의 대를 잇기 위한 하나의 제도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후손에 대한 권리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후대의 세대들도 선조들의 이름을 길이 보존했다. 그 이름을 이어갈 후손이 없을 경우, 그 이름은 역사 속에서 아예 잊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다의 둘째 아들 오난은 고대 이스라엘의 관례에 따른 자기 형 에르와 타마르에게 후손을 남겨주는 일을 거부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이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하였으므로, 그도 죽게 하셨다.”(창세 38,10)고 성경은 말한다.
타마르는 다시 홀로 되었다. 이제 셋째 아들 셀라와의 혼인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시아버지 유다는 타마르로 인해 자기 막내아들마저 다른 아들들처럼 죽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 그래서 그는 셀라를 극진히 돌보았고, 자기 자신보다도 더 많이 돌보았다. 만일 이 막내마저 죽는다면, 자신의 이름은 세상에서 완전히 잊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다는 타마르를 친정으로 돌아가 살게 하였다.
타마르의 계략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고대 오리엔트에서 여성에게 주어지는 가장 모진 운명이었다. 씨족 안에서 여성의 위치는 얼마나 많은 아이를 낳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러기에 라헬은 야곱에게 이렇게 부르짖었다. “나도 아이를 갖게 해 주셔요. 그러지 않으시면 죽어 버리겠어요”(창세 30,1).
과부가 되어 친정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타마르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다가 타마르를 친정에 보낸 일은 당시 법에 명백히 어긋나는 일이었다. 유다는 타마를 셋째 아들 셀라에게 내주어야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타마르는 자신의 권리를 보호받지 못한 채 추방당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타마르는 끈질긴 노력으로 뭇사람들에 의해 자신의 삶이 임의적으로 조정되는 미숙한 역할에서 벗어난다. 타마르는 유다가 팀나로 올라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과부의 옷차림을 벗어 버리고 너울을 써서 몸을 가리고, 팀나로 가는 길가에 있는 에나임 어귀에 나가 유다를 기다렸다. 유다는 타마르가 신전 창녀, 곧 가나안 사람이 섬기던 신의 창녀려니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잠자리를 함께 하려고 작정하고, 그 대가로 가축 떼 가운데 새끼 염소 한 마리를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타마르는 그 약속에 대한 담보물로 유다의 인장과 줄, 지팡이를 요구했다. 유다는 그의 요구를 들어주고 잠자리를 함께하였다. 유다는 나중에 아둘람 사람 편에 새끼 염소 한 마리를 보내면서 그 여자에게 맡겼던 담보물을 찾아오게 하였다. 그러나 몸을 파는 여자로 가장했던 타마르를 찾을 수 없었다.
이제 상황은 유다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석 달쯤 지난 다음, 유다는 며느리 타마르가 임신하게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것도 창녀질을 하다가 임신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씨족 안에서 법과 정의를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던 유다는 타마를 밖으로 끌어내어 사형에 처하려고 했다. 그때 타마르는 담보물을 보여주며 바로 유다가 그 아이의 아버지임을 밝힌다. 유다는 이 난처한 사건을 피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한다. “그 애가 나보다 더 옳다! 내가 그 애를 내 아들 셀라에게 아내로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창세 38,26). 그리고는 타마르를 다시 집안에 받아들인다.
타마르의 처신을 오늘날 우리가 그대로 본받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꾸몄던 계략은 고대 이스라엘 안에서 결코 추잡한 일이 아니었다. 구약성경의 많은 이야기들은, 아주 작은 민족이 막강한 무기로 무장한 힘센 이웃 민족들과의 싸움에서 계략과 지혜로만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경험을 자주 들려준다. 그러니까 유다와 잠자리를 함께한 이야기는 타마르를 재차가 많은 여인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적절하게 지킨 인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타마르의 권리를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상처를 입힌 유다는 나중에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상황을 다시 바로 잡아야 했다.
여성의 참된 권리는?
타마르는 남자들의 임의적 계획에 따라 이리저리 처분되는 하나의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라, 생명을 낳아 주는 어머니가 되고 싶었다. 사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은 혼인한 남자와 여자의 기본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며 의무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떠한가? 아이를 낳아 어머니가 되려고 했던 타마르와는 정반대로,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아예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여성이 자신의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임신을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여성의 권리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니라 낳지 않는 것을 여성의 권리로 여기는 실정이다. 하지만 타마르는 아이를 낳아 생명을 계속 후대에 전달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오난과 유다는 타마르가 생명을 계속 이어가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
오난과 유다는 이스라엘의 법질서를 깨뜨렸기 때문에, 야훼 하느님과 맞선 것과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실 때에만 여인은 비로소 생명을 잉태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시는 분, 저승에 내리기도 올리기도 하신다”(1사무 2,6). 생명으로 축복을 받는 사람은 불의를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라, 법이 실현되도록 모든 힘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타마르는 결국 쌍둥이를 낳는다. 그 이름은 페레츠와 제라이다(창세 38,27-30). 이 두 이름은 나중에 유다 가문에서 아주 힘 있는 씨족이 된다(민수 26,20). 유다는 가문의 대가 끊어질 것을 염려하여 타마르를 친정으로 보냈지만, 궁극적으로는 타마르가 유다에게 새롭고 충만한 생명을 선사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타마르를 예수님의 족보에서 언급한다(마태 1,3).
[쌍백합, 제26호, 2009년 가을호, 김선태 사도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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