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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구약성경과 신들19: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피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6-29 조회수3,119 추천수1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19)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피

'치유하는 피'에 대한 고대 종교심 투영


고대 근동에서 피의 신 '다무'는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찢긴 힘줄을 붙여주는 두 가지 역할을 했다. 피의 신은 치유의 신으로 여겨졌다. 고대 이스라엘인은 피의 신을 믿지는 않았지만, 셈어 공통어의 단어 '담'에 담긴 문화적 동질성은 공유했다. 히브리어로 '담'인 피는 생명력 자체를 의미했기 때문에 이들은 피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을 때 소를 잡아 피를 받은 다음 절반을 제단에 뿌리고 절반은 백성에게 뿌린 다음 이렇게 말했다.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탈출 24,8). 제단과 백성에게 피를 뿌린 이유는 피가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기 때문이다. 모든 부정 타는 것, 잡귀를 물리치고 오직 주님과 백성의 순수하고 정결한 공간을 만들려는 행위라고 파악할 수 있다.

하느님과 맺은 이 계약은 거룩한 계약, 사람들을 정화하는 계약이다. 또한 악한 것을 물리치는 계약, 생명을 주는 계약이다. 계약의 피는 고대 근동 신화의 종교심이 농축된 표현이다.


포도주는 포도나무의 피

고대 근동에서는 포도주를 종종 포도나무의 피로 표현했다. 포도주는 애초부터 보통 음료가 아니었다. 포도주를 포도나무의 피로 표현한 것이 히브리인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아카드어로 '피'를 뜻하는 '다무'에는 '붉은 포도주'라는 뜻도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고대 근동을 정복하자 고대 근동에는 헬레니즘이 급속히 퍼졌다. 이스라엘인들도 그리스 교양을 익혀 신약성경이 그리스어로 쓰이게 됐다. 언어가 바뀌더라도 뿌리 깊은 문화적 표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 신약시대 이스라엘인들도 히브리어를 잊고 아람어를 사용했으며, 식자층은 점차 교양어로 그리스어를 썼지만, 피에 대한 전통적 종교심은 간직하며 살았다. 그리스어로 쓰인 신약성경에 셈족의 종교심이 자연스럽게 투영된 셈이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선포한다. 그 메시지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깨끗해졌다'고 표현된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으며,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말끔히 씻겨졌습니다"(히브 10,22).

구약 전승에 비교적 충실하다는 히브리서에서 이런 상징이 자주 발견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치유하는 피'로 우리의 죄악이 씻긴다는 구약성경의 피에 대한 의미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생명의 피이기에 그 피로 우리가 살아나는 것이다. 이렇게 구약의 문학적 표상을 자연스럽게 사용해 그리스도 죽음을 설명하는 히브리서의 저자도, 독자도 셈족의 고대 종교심을 잘 알고 있다.

신약성경을 기술한 사도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가 단지 '우연한 사건'이나 '전례의 한 요소'로 국한되지 않고 인류 구원의 핵심이라고 고백했다.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깨끗해졌다는 성찰은 히브리서 외에도 신약성경 곳곳에 등장한다. 예수님 자신도 피에 대한 고대 종교심을 공유하셨던 것 같다. 예수님은 최후 만찬에서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의 의미를 전하셨다. 예수님 말씀을 듣고 전하는 사도들 또한 이 상징을 그대로 수용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셈족의 종교심을 통해 소통하고 있다.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

'구원자의 피가 온 세상과 인류를 깨끗하게 만든다.' 이 말씀의 배경이 되는 고대 근동의 모습이 이제 조금씩 이해될 것이다. 셈족의 종교심을 공유하는 신약시대 이스라엘인들은 이런 가르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예수님도 이런 상징으로 구원의 신비를 가르치셨고, 그 가르침에 따라 신앙 공동체는 지금도 성찬례를 올린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구원자의 피로 온 세상의 죄가 씻긴다는 사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일부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며, 그분의 피로 우리가 깨끗해진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성찬례를 '인육식사'로 오해했고, 그런 오해가 흉한 소문을 낳았다. 소문은 결국 그리스도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했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로마 박해가 촉발했다. 로마 박해가 일어난 원인은 이러한 문화적ㆍ종교적 배경의 차이에서 비롯됐던 것이다.

문화적 차이는 반드시 극복돼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초대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비셈족에게 설득하고 증명하고자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초대 그리스도교 신학이 발전했다. 흥미로운 점은 박해를 받았던 그리스도교가 피에 대한 성경의 상징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스-로마 문화권 사람들이 피에 대한 의미를 이해 못해도 결코 그 의미를 버리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피는 교회 핵심 상징이다. 우리는 잔인한 박해에 맞서 흘린 '순교자의 피'로 모두가 깨끗해진다고 고백한다. 박해에 굴하지 않고 피를 흘리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함께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피로 만민을 치유하고 구원하는 길에 자신의 피를 뿌려 동참하는 것이 된다. 이로써 우리는 그분을 따라 목숨을 바친 순교자의 피도 공경하게 되었다. 초대 교회의 순교신심은 조선 천주교도들의 마음에 혈서처럼 새겨졌다. 조선시대 말엽에 받았던 극심한 탄압은 한국 가톨릭 신심의 독특한 특징이 됐다.

[평화신문, 2013년 6월 23일, 정리=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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