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풀이 FREE] 아합과 엘리야
- 이스라엘에 있는 카르멜 산 엘리야 기념 성당.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1열왕 18,21)
지금으로부터 약 2,900년 전 북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아합은 종교적으로 매우 부정적인 임금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상당한 실력자였다. 아합이 지중해 통상로를 장악하기 위해 지중해변 시돈의 공주 이제벨과 정략 결혼했을 때, 북이스라엘에는 이제벨과 함께 바알과 아세라 신앙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물론 이스라엘에 바알 신앙이 그때 탄생한 것은 아니다. 가나안의 잔재라 해야 할까? 억제되어 있었지만, 그 이전부터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스라엘의 첫 국왕 사울의 아들 또한 “바알의 사람”이라는 뜻의 에스바알(1역대 8,33)이었다. 단지 억눌려 있던 바알 신앙의 물꼬가 이제벨에 의해 터진 것뿐이고, 야훼 하느님 신앙에는 그만큼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아합이 하느님을 완전히 버린 것 같지는 않은데, 그가 낳은 아들들의 이름이 각각 아하즈야(1열왕 22,52)와 요람(2열왕 3,1)으로, “야훼께서 붙잡으시다” 그리고 “야훼께서 들어올리시다”라는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다. 아마 아합은 한 종교만 택하기보다 시돈과 이스라엘의 종교 문화를 결합하려 한 듯하다. 게다가 강우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이스라엘에서 비의 신 바알과 풍요의 여신 아세라는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하느님뿐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의 힘을 같이 빌면 다다익선이 되어 비도 많아지고 풍년이 올 거라 여긴 듯하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와 같은 종교적인 야합에 반기를 들어 극렬히 대립했고, 바알/아세라 예언자 450명과 대결하기 위해 모인 카르멜 산에서 백성들이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친 채 절뚝거리려 하는가 비판했다. 수천 년이 흐른 지금 엘리야의 호된 꾸짖음은 마태 6,24을 생각나게 한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하느님과 바알을 함께 섬길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는데, 일종의 보험처럼 양쪽에 다리를 하나씩 걸치고 절뚝거리는 모양이 그때와 닮았다. 요즘 드라마나 영화에는 양다리 걸치는 불륜이 또 얼마나 일반화되었는지, 순수했던 예술의 세계도 많이 오염된 듯하다. 조금이라도 세상적인 손해를 안 보려고, 남들 하는 것은 나도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 때문에, 우리는 참 많은 핑계를 만들어 여러 양다리를 걸쳐온 것 같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와 황금만능주의 사이에 우왕좌왕 길을 잃은 우리에게 엘리야 성인의 추상같은 불호령은 예나 지금이나 흔들리지 않는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주는 듯하다.
[2013년 8월 18일 연중 제20주일 인천주보 4면, 김명숙 소피아(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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