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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복음 이야기2: 예수님 시대 팔레스티나 정치 배경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4-01-11 조회수4,470 추천수1

[복음 이야기] (2) 예수님 시대 팔레스티나 정치 배경


팔레스티나, 로마의 폭압에 시달려



헤로대 임금 통치 영토.


로마 식민지
 
예수님 시대 전후 팔레스티나는 '점령된 나라' 곧 식민지였다.

로마 집정관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63년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당시 유다인들은 팔레스티나가 로마에 속하지만, 내부 통치는 예루살렘 사제들에게 맡겨지기를 원했다. 이에 폼페이우스는 히르카노스 2세를 대사제와 영주로 인정하고 예루살렘을 로마 통치 아래 뒀다.

기원전 60년 동방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폼페이우스는 크라수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첫 삼두정치 체제를 구성했다. 하지만 크라수스는 기원전 55년 파르티아인들(이란 북동쪽 민족)과의 전쟁에서 전사했고, 카이사르는 기원전 49년 원로원의 명령을 무시하고 군대와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해 폼페이우스를 격퇴했다.

기원전 48년 로마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카이사르는 유다인으로 개종한 이두매아인 안티파트로스를 '유다 총독'으로 임명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에게 암살된 이후 카이사르 세력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측과 원로원 및 공화정파 지지세력 간의 충돌이 일어났다. 이때 안티파트로스는 원로원과 공화정파에 지지를 표하고 조공 700달란트를 모으는 데 혈안이 됐다. 이에 불만을 품은 유다인들은 기원전 43년 안티파트로스를 독살했다. 그러자 안티파트로스의 아들인 헤로데가 로마로부터 '유다와 사마리아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고 정권을 장악,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기원전 4년 죽을 때까지 팔레스티나를 통치했다.


헤로데 시대

예수님은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마태 2,1; 루카 1,5). 헤로데는 6개월간 병을 앓다가 기원전 4년 즉 로마력 750년 봄에 죽었다. 그래서 성서학자들은 마태오 복음 2장의 예수님 탄생 이야기와 헤로데의 죽음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을 토대로 기원전 7~6년께 예수님이 탄생하셨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 탄생을 기준점으로 사용하고 있는 서기력은 실제 예수님 탄생보다 6~7년 가량 늦은 것이다. 이런 오류는 6세기 수도자인 소 디오니시우스가 처음으로 예수님 탄생부터 연대를 계산하기 시작하면서 예수님이 로마력으로 754~753년께 태어났다고 잘못 생각한 데서 빚어졌다. 한마디로 계산 착오였다.

헤로데 임금이 죽자 로마는 팔레스티나 지역을 헤로데의 세 아들에게 다스리게 했다. 그의 아들들은 헤로데처럼 임금이 아니라 영주로서 땅을 나눠 통치했다. 그래서 헤로데 아르켈라오스(기원전 4~서기 41년)는 유다와 사마리아를, 헤로데 안티파스(기원전 4~서기 39년)는 갈릴래아와 페레아를, 헤로데 필리포스(기원전 4~서기 34년)는 바타나이아, 아우라니티스, 트라코니티스, 이투래아, 가울라니티스 등 팔레스티나 북동부 대부분을 다스리게 했다. 안티파스와 필리포스는 예수님 생애 동안 자기 영토를 다스렸지만 아르켈라오스는 통치 첫 10년 동안 유다인의 반란과 잔인한 진압이 끊이지 않아 결국 서기 6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 면직당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팔레스티나 모든 영토는 지중해변 카이사리아에 거주하던 로마 총독부 속주가 됐다.


예수님 시대 로마 총독들

예수님 시대 유다에 파견된 로마 총독은 코포니우스ㆍ암비비우스ㆍ안니우스 루푸스ㆍ발레리우스 그라투스ㆍ본시오 빌라도 등이었다. 발레리우스 그라투스 총독(15~26년)은 한나스라고 불리는 대사제 아나노스를 물러나게 하고 한나스의 사위인 카야파를 대사제로 뽑은 인물이다. 또 본시오 빌라도는 예수님 공생활 동안 있던 로마 총독으로 서기 26년부터 36년까지 유다를 통치했다. 본시오 빌라도는 사마리아인을 학살해 파면당한 후 황제의 명으로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팔레스티나를 점령한 로마 제국은 식민지에 대한 세금 징수를 목적으로 전국적으로 호구 조사를 실시했다(루카 2,1 참조). 로마의 폭압에 불만을 품은 유다인들은 서기 6년 갈릴래아 사람 유다를 중심으로 젤롯파 열혈당원을 결성, 로마에 대항해 폭동을 일으켰다(사도 5,37 참조). 로마군은 이 폭동을 진압하고 2만 명이 넘는 유다인을 십자가형에 처했다.

열혈당원 젤롯파를 중심으로 66년부터 제1차 독립전쟁을 일으킨 유다인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한때 승전을 거뒀지만, 반격한 로마군에 의해 70년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만다. 젤롯파는 73년 마사다 요새에서 로마군과 결사항전을 벌이다 로마군에게 사로잡히기보다는 죽음을 택하자고 결의해 모두 자결하고 만다. 몸을 숨겨 겨우 목숨을 구한 여자 둘과 아이 다섯 명만이 살아남아 비참한 최후를 후세에 전했다. 그후 132년 시몬 바르 코시바가 제2차 유다 독립전쟁을 일으켰으나 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예루살렘은 135년 완전히 파괴됐고 유다인들은 세계 곳곳에 흩어졌다.

[평화신문, 2014년 1월 12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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