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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복음 이야기6: 산헤드린과 대사제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4-02-22 조회수3,049 추천수1

[복음 이야기] (6) 산헤드린과 대사제


하느님 권위 대표하는 실질적 통치 기구



- 예수님을 재판하기 위해 산헤드린이 열린 대사제 카야파의 집터에 세워진 닭움을 성당. 사진제공=김원창


유다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이스라엘 정치 체제를 이렇게 설명했다. "어떤 민족은 최고의 정치권력을 군주 정치에, 어떤 민족은 과두 정치에, 또 어떤 민족은 국민에게 위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입법자들은 이러한 정치 형태에 매혹되지 않는다. 새로운 낱말을 사용한다면, 그들은 국가 조직에 '신정 정치'라 부를 수 있는 형태를 부여했다. 모든 주권과 권위를 하느님 손에 맡겼다"(「유다 고대사」 중에서).

바빌론 유배와 함께 군주 정치가 멸망한 후 하느님의 권위를 대표하는 지상 중개자로서 '산헤드린'과 '대사제'가 유다인들에게 실질적으로 모든 명령을 내렸다.


산헤드린

산헤드린은 헬라(그리스)말 '쉬네드리온'의 히브리말로 '회의' '공회' '원로원' 등을 뜻하지만 유다인 사회에서는 '종교회의'로 표현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산헤드린의 기원은 이집트 탈출 후 모세를 돕도록 임명된 '70인 장로회의'이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백성의 원로이며 관리라고 알고 있는 이스라엘의 원로들 가운데에서 나를 위해 일흔 명을 불러 모아라. 그들을 데리고 만남의 천막으로 와서 함께 서 있어라. 내가 내려가 그곳에서 너와 말하겠다. 그리고 너에게 있는 영을 조금 덜어내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겠다. 그러면 그들이 이 백성을 너와 함께 짊어져서, 네가 혼자 지지 않아도 될 것이다"(민수 11,16-17).

그러나 실제로는 이스라엘 왕조 시대 멸망 후 시리아 왕 안티오코스 3세(기원전 223~187년) 때 예루살렘에 장로 모임 즉 원로원인 '게루시아'를 결성한 것을 산헤드린의 시초로 본다. 예루살렘에서 처음으로 종교회의를 산헤드린이라 부른 것은 로마제국 총독 가비니우스가 시리아 속주를 다스리던 기원전 57~55년께였다.

산헤드린 회원은 모두 71명. 의장이자 회의 소집자인 대사제와 각 24명의 수석 사제, 원로, 율법학자 로 구성돼 있다(마르 14,53). 이 전통이 가톨릭 교회 안에도 계승돼 요한 23세 교황 때까지 추기경 수는 70명이 정원이었다.

산헤드린은 유다인 세계 전체의 종교 문제, 세금 징수 문제를 주관하고 유다인의 최고재판소 역할을 했다. 법정은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열렸다. 그러나 로마 통치 시기에 산헤드린은 유다인이 저지른 종교 문제에 국한해 법정을 열었다. 유다인 사회에서 사실상 모든 일이 종교적이었기 때문에 유다인의 일상사 전반을 산헤드린이 감독했다. 산헤드린은 사형 선고를 할 수 있었으나 그 결정은 로마 총독의 인준을 받아야 했고, 집행도 로마 총독의 권한에 속했다.

산헤드린은 회의가 있을 때 회원들이 서로 마주 볼 수 있도록 반원형으로 앉아 회의를 진행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체포됐을 때는 대사제 카야파의 집에서 산헤드린 법정이 세워져 증인들이 예수님께 불리한 증언을 하도록 만든 후 예수님께서 스스로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오게 유도했다(마르 14,62). 그리고 카야파는 자신의 옷을 찢음으로써 예수님의 혐의를 신성 모독죄로 확정지었다(마르 14,53-62; 마태 26,57-68; 루카 22,54-55.63-71;요한 18,12-14.19-24).


대사제

대사제는 산헤드린의 의장이었느냐 아니냐와 상관없이 또 다른 권위를 갖고 있었다. 성유로 축성된 대사제는 바로 하느님의 증인이요 선택된 민족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기원전 150년 이스라엘 해방 전쟁의 영웅인 요나탄과 시몬 마카베오가 대제사장의 지위를 계승한 후 대사제 칭호는 이 가문에 세습됐다. 기원전 76년 알렉산드로스 얀네오스가 죽은 후 대사제 직무는 하스모네아 왕조가 계속 차지했으나 종교적 역할만 하고 권력과는 차츰 멀어졌다. 기원전 37년 마카베오 가문의 마지막 대사제 안티고노스는 헤로데 임금에게 참수됐다.

대사제 임명은 유다의 정치 주권자에 의해 결정됐지만, 그 선택에는 번번이 음모, 협박, 뇌물의 부정 등이 개입했다. 예수님 시대 대사제의 지위는 한나스가 여러 해 동안 독점했다. 그는 서기 7년 시라아 총독 퀴리니우스에 의해 대사제로 임명돼 서기 14년 티베리우스 황제 즉위 때까지 재직했다. 면직된 후 그는 아들 엘레아자르와 사위 카아파를 대사제직에 임명시킬 만큼 영향력이 컸다. 카야파는 서기 36년까지 18년간 대사제직에 있었다.

대사제 지위는 대단한 위세를 지녔다. 민중은 대사제를 살아 있는 율법의 화신으로 생각하고 존경했다. 이 정신적 수령의 지시에 따라 민중은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고 혹은 자숙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 나라를 통치한 정치 주권자들은 대사제직에 있는 자와 되도록 우호적 관계를 맺으려고 애셨다. 복음서에 나오는 본시오 빌라도 총독도 대사제를 정중하게 대접했다.

산헤드린은 유다 전쟁으로 예루살렘이 멸망하자 서기 70년 이후 야브네 얌니아로 옮겼다. 이곳에서 바리사이파 율법학자 중심으로 유다교가 재건돼 산헤드린은 더는 사제들과 장로들의 집단이 아니라 오직 율법학자만으로 구성된 모임이 됐다.

[평화신문, 2014년 2월 23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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