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도시] (16) 사도들이 처음 선교한 땅 안티오키아
이방인 선교의 중심지이자 출발지
- 현재 안타키아로 불리는 도시 안티오키아의 전경. 평화신문 자료사진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는 기원전 300년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였던 셀레우코스 장군이 세운 도시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 안티오코스의 이름을 따라 안티오키아라 불렀다.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가 됐고, 비잔틴 제국과 십자군 시대에도 중요한 그리스도교 도시로 남았다. 현재는 터키에 속하며 안타키아(Antakya)라 불린다. 지진과 전쟁으로 화려한 문명을 자랑하는 옛 유적은 많이 소실됐다. 한때는 로마,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로마제국 3대 도시로 명성을 날렸다.
역사적으로 시리아에 속한 적도 있기에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로 더 많이 알려졌다. 기원전 64년 로마에 편입된 이곳은 오론테스 강으로 지중해와 닿아 있기에 예로부터 통상 무역이 활발했다. 교통 요지로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로 이어지는 대상로의 중심지였다. 경제적 풍요는 인구 유입으로 이어졌고 다양한 민족들이 모여들었다. 유다인들도 큰 공동체를 형성했으며 사회적으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선포한 사도들은 스테파노의 순교로 교회 공동체 일부가 예루살렘에서 내쫓기자 팔레스티나와 시리아 전역으로 선교하기 시작했고, 이방인들을 교회에 받아들였다. 그 첫 중심이 바로 당시 시리아의 수도였던 ‘안티오키아’였다(사도 11,19-26).
초대 교회는 안티오키아 교회에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스테파노의 순교 이후 많은 교인이 이동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유다인을 상대로 선교했지만, 곧이어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했고 그들과 함께 교회를 세웠다. 처음으로 이방인에게 선교한 공동체였다.
이후 이곳으로 파견된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함께 전교했고, 선교여행의 기초로 삼았다. 그때까지 유다교의 한 분파로 여겨지던 초대 교회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세력으로 확장된 것이다.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큰 기근이 있었는데 안티오키아 교회는 예루살렘에 구호금을 보낼 만큼 큰 교회로 성장했다(사도 11,29-30). 안티오키아가 이방인 선교의 출발지요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사도 베드로가 환시를 통해 이방인들에게 선교하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는 명을 받았기 때문이다(사도 10,15-20).
다른 터키 지역처럼 안티오키아 역시 바오로 시대와 교부 시대의 유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안티오키아 시내에서 동쪽으로 약 4km 떨어진 실피우스산 중턱에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몰래 모여 미사를 드린 곳이라고 알려지는 ‘성 베드로 석굴 성당’이 있다. 가파른 절벽에 생겨난 자연 석굴에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석굴 내부는 박해자들의 공격을 피하려고 여러 갈래길로 도피로가 조성돼 있다.
안티오키아 교회는 로마의 박해를 견디어냈다. 그러나 7세기부터 이슬람의 통치를 받으면서 그리스도교는 잊히기 시작한다. 11세기 말 십자군의 등장으로 잠시 살아나지만 13세기부터 무슬림의 지배로 다시 자취를 감추게 된다. 1517년 오스만 제국이 안티오키아를 차지한 후 근세까지 지배를 받았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프랑스의 신탁통치를 받다가 1939년 주민투표를 거쳐 이슬람 국가인 터키에 귀속됐다.
[평화신문, 2014년 5월 11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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