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세계] 헤로데 아그리파 1세 아그리파 1세는 헤로데 대왕의 손자다. 말년의 헤로데는 자식을 의심했다. 왕위를 물려주려 탄탄히 준비시켰던 맏아들까지 죽였다. 정상이 아니었다. 그 맏아들의 아들이 아그리파 1세다. 그대로 뒀다가는 언제 불려가 죽을지 모를 운명이었다. 그래서 대신들이 로마로 보냈다. 교육과 신변안전을 겸한 이중 포석이었다. 아그리파는 영특했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아들 드루수스(Drusus)와 친분을 맺으며 외교적 수완을 드러냈다. 로마와 유다인과의 연대를 위해 노력했다. 드루수스가 죽자 이스라엘로 돌아왔지만 입지가 모호했다. 다시 로마로 가서 칼리굴라와 인맥을 쌓았다. 티베리우스의 후계자로 보았다. 그의 예견은 적중했고 황제가 된 칼리굴라는 유다의 통치자로 임명했다. 나중에는 헤로데 안티파스가 다스리던 지역까지 그에게 주었다. 41년경 아그리파 1세는 칼리굴라를 설득해 예루살렘에서 황제숭배를 거두게 했다. 이 일로 유다인들의 지지를 얻었다. 이후 칼리굴라는 그에게 이스라엘 전체 통치권을 주려 했지만, 실행 전 암살되었다. 황제 계승을 둘러싼 묘한 분위기에 아그리파는 클라우디우스를 지지한다. 정확한 안목이었다.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는 유다 왕국 전체를 주었다. 아그리파는 유다교의 정통성을 인정하며 지지했고 유다인들은 그를 환호했다. 당연히 초대교회는 억압을 받아야 했다. 그는 베드로를 투옥했고 야고보를 사형에 처했다. 12사도 중 첫 순교였다(사도 12,2). 44년 카이사리아에서 갑자기 죽었다. 아들 아그리파 2세는 당시 17살이었다.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총독이 지배하는 속국으로 돌아갔다. 아그리파 2세가 21살 되었을 때 로마는 예루살렘 성전 업무에 관한 전권을 줬다. 유다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였다. 2년 뒤 왕의 칭호를 받았고 54년에는 갈릴래아까지 다스리는 명실상부한 통치자가 되었다. 당시 로마 황제는 네로였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그리파 2세 역시 친로마 정책을 폈다. 유다인의 반란을 막기 위해 전력을 쏟았지만 역부족이었다. 60년 바오로 사도가 체포되자 지방 행정관은 처리문제에 대한 조언을 구한다. 아그리파 2세는 무죄 쪽으로 돌아선다. 사도행전 26장은 그와 사도 사이에 관한 기록이다. [2014년 5월 11일 부활 제4주일(성소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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