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에 남긴 신들의 흔적] 커룹
커룹은 구약성경에 91번이나 나오는 상상의 짐승이다. 이 성스런 짐승이 역사를 거치며 모습과 역할이 바뀐 과정을 살펴보자.
모호한 기원과 지위
케루빔은 커룹의 복수형이다. 과거에는 우리말로 그냥 케루빔이라고 썼는데, 「성경」은 이제 복수형의 의미를 살려 ‘커룹들’로 옮겼기 때문에 이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가톨릭 성가의 가사에는 아직 ‘케루빔과 세라핌’ 등으로 남아 있다.
단수형을 히브리어로 '커룹'이라 한다. 둘째 음절이 장음인데, 이는 수동분사형의 특징이다. 칠십인역(LXX)은 ‘케룹 - Χερουβ’으로 음역했는데, 역시 둘째 음절의 장음을 잘 살렸다. 이 이름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지만, 현대에는 거의 아카드어에서 기원했다고 본다. ‘봉헌하다, 인사하다’는 뜻을 지닌 아카드어 동사 ‘카라-부 kar?bu’의 수동분사형이 ‘카루-부 kar?bu’인데, 그 뜻은 ‘경외하여 맞이하게 된’이다. 곧 문에서 신을 맞이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집트의 스핑크스가 피라미드 앞에서 문지기의 역할을 하는 존재였다면, 커룹도 신전 앞에서 신을 마중하는 존재다. 신아시리아 제국의 신전 입구에서 발견된 커룹은 사람의 머리에 독수리의 날개, 그리고 사자의 몸을 지녔다. 아마 이스라엘의 커룹도 이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가장 거룩한 곳을 지킨다
솔로몬은 주님의 성전을 지을 때, 커룹을 정성스레 만들었는데, 구약성경은 그 과정을 자세히 전한다.(1열왕 6,23-35) 그는 높이가 열 암마(23절, 25절), 곧 4.6미터 정도 되는 커룹 둘을 만들어 “집의 가장 깊숙한 곳”(27절)에 두었다. 그리고 “지성소 안 커룹들의 날개 아래에” 주님의 계약궤를 놓았다.(1열왕 8,6)
커룹이 계약궤를 가장 가까이 지킨 것은 사실 그 이전부터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주님의 계약을 받고 계약궤를 만들었는데 금으로 된 커룹 둘이 속죄판 위에서 계약궤를 덮고 있었다.(탈출 25,10-22) 그래서 “모세는 주님과 말씀을 나누려고 만남의 천막 안으로 들어가면, 두 커룹 사이에 있는 증언궤에 놓인 속죄판 위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소리를 듣곤 하였다.”(민수 7,89) 신약시대에도 이 전승은 잘 알려져 있었다.(히브 9,5)
또한 주님이 거하실 거룩한 천막도 커룹이 지켰다. 모세는 계약궤를 만들고 나서 잠시 후 성막을 짓는데, 성막 위에 커룹을 정교하게 수놓았다.(탈출 26,1.31; 36,8.35) 이렇게 가장 거룩한 곳을 지키는 커룹의 전승은 이미 창조 때 시작되었다.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나서 에덴 동산을 닫으셨다. 그리고 입구에 커룹을 세우셨다.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 에덴 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세 3,24)
이렇게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 마을 입구에는 장승을 세웠다. 경복궁 앞에는 해치가 버티고 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성전에는 커룹을 둔 것이다. 모두 사악한 기운을 막고, 깨끗하고 신성하게 지키고 싶은 마음의 발로일 것이다.
커룹 위에 좌정하신 하느님
이런 커룹의 역할은 본디 해치나 스핑크스의 역할과 거의 같았다. 그런데 고대 시리아 지역에서는 커룹이 최고신의 어좌를 지키는 역할을 넘어서, ‘어좌의 일부’로 기능했다. 그리고 그 전승이 이스라엘인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주님께서 ‘커룹을 타신다’는 의미가 주님께서 ‘어좌에 앉으신다’로 이해되었다.
이스라엘의 가장 충실한 임금 가운데 하나였던 히즈키야는 창조주를 향한 유일신 신앙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커룹들 위에 좌정하신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세상의 모든 왕국 위에 당신 홀로 하느님이십니다.
당신께서는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2열왕 19,15)
주님이 좌정하시는 곳이 주님의 어좌다. 그리고 어좌는 주님의 현존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커룹은 주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존재로 이해되었다. 에제키엘서에는 ‘주님의 영광이 커룹들 위에 떠오르다.’는 표현이 거듭해서 등장한다.(에제 9,3; 10,4.18.19; 11,22) 그는 이렇게 커룹 위에서 주님의 영광을 본 예언자로 잘 알려져 있다.(집회 49,8)
더욱 변화하는 커룹의 모습
커룹은 본래 신전이나 지성소를 지키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문지기 역할을 하는 하위신적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독특한 발전을 이루었다. 주님의 영광과 현존을 상징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성경 시대가 끝나고 커룹은 사람들의 종교심에서 잊히지 않고 살아남았다. 유일신 신앙인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에서 커룹은 천사의 일종으로 이해되었다. 주님 가까이에서 주님을 모시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이니, 천사는 커룹의 자리에 제격이다.
유다교 성경 주석의 일종인 미드라쉬는 에덴 동산 앞에 세우신 커룹들을 형상이 없는 영적 존재로 이해했다. 나아가, 커룹을 우주에서 가장 먼저 창조된 존재로 해석했다. 그래서 커룹은 본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해설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던 중세의 위대한 유다 학자인 마이모니데스는 천사의 위계를 십 등급으로 나누었다. 그 가운데 커룹은 아홉째 등급으로 비교적 낮은 위치를 차지했다. 마이모니데스의 천사론은 중세 유다교 신비주의인 카발라 전통으로 이어졌다. 카발라에서도 커룹은 십 등급 중 아홉째 등급의 천사다.
한편 기원 후 5-6세기의 위(僞) 디오니시오스는 신플라톤주의 도식에 따라 구품(九品)의 천사 계보를 만들었고,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수용되었다. 그 가운데 커룹은 위에서 둘째 등급의 천사로 이해되었다. 이 계보의 여덟째 등급이 대천사 미카엘이고 맨 아래인 아홉째 등급이 보통의 천사다. 그러므로 커룹은 매우 높은 등급의 천사가 된 것이다.
커룹은 모양도 퍽 많이 변했다. 중세 유럽의 교회 미술에서 이따금 커룹은 날개가 달린 사람 형상으로 묘사되었다. 대천사 미카엘이나 보통의 천사와 별다른 차이가 없는 모습이다.
늘 하느님 가까이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신들 대부분은 사라져 버렸지만, 커룹은 질긴 생명력으로 변형을 거듭해 살아남았다. 우리는 지금도 커룹을 입에 올린다. 가톨릭 성가는 물론이요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의 노랫말에도 커룹이 등장한다. 커룹의 긴 역사를 돌아보니, 잡신들도 팔자가 모두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커룹이 이렇게 오래 전승된 이유는, 먼 옛날부터 하느님을 가까이 모시고 그분께 충실한 존재로 그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사람도 그렇다. 하느님께 가까이, 그분께 충실하면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야곱의 우물, 2013년 9월호, 주원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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