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그루터기] 이집트를 그리워하는 이스라엘 등산하는 사람들을 보고 어차피 다시 내려올 것을 무엇하러 고생하며 올라가느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제가 그런 부류에 속합니다. 공동체 소풍이 있으면 집 지키고 싶어 하는 유형. “더운 데서 노느니 시원한 데서 일을 하겠다.” 이게 제 주장입니다. 저는 여름에 바다로 가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더우면 꼼짝 않고 차가운 방바닥에 등을 붙이고 누워 있고 싶습니다. 누운 자리가 따뜻해지면 한번 뒹굴! 하면 됩니다. 10월은 되어야 움직일 맘이 납니다(그나마 꼭 필요하지 않으면 나가지 않습니다). 추우면? 그래도 워낙 더운 것보다는 추운 것을 좋아해서 실내에서는 담요를 휘감고서라도 추위를 꾹 참고 일을 하지만, 작년부터는 겨울에 길에서 버스를 갈아타려고 기다리는 것이 괴롭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게으른데다가 나이까지 드는 모양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인들에게 시달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탈출 3,7)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모세를 파라오에게 보내며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탈출 3,10)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모세는 통 내키지 않는 모양입니다. “제가 무엇이라고…”(탈출 3,11) 하며 움직이기 싫어합니다. 구약과 신약의 소명 사화들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소위 ‘이의제기’에 속하겠지요. 그래도 모세는 파라오에게 가기는 갑니다. 하지만 실패 또 실패. 모세에게 주님이 누구시냐고 따지는 파라오는 모세와 아론이 백성들에게 일을 하지 않도록 부추기고 있다고 여겨 오히려 백성들을 더 괴롭힙니다. 짚을 주지 않으면서 같은 양의 벽돌을 생산하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의 주제, 백성의 불평이 시작됩니다. 백성은 모세와 아론에게 “주님께서 당신들을 내려다보시고 심판해 주셨으면 좋겠소.”(탈출 5,21)라고 합니다. 모세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려 하신다고 백성을 설득하려고 해도 그들은 “기가 꺾이고 힘겨운 종살이에 시달려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다.”(탈출 6,9)라고 합니다. 그들은 “기가 꺾이고 종살이에 시달려” 탈출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 아니라, “기가 꺾이고 종살이에 시달려” 해방을 믿지도 바라지도 못합니다. 이대로 살고 싶지는 않았겠지만, 평탄치 않은 길을 떠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날 마음도 별로 없습니다. 변화라는 것이 가능하다고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을 위해 노력하던 모세와 아론이 역경에 부딪힐 때 그들은 그 역경을 이겨 나가려고 하지 않고, 왜 문제를 일으키느냐고 그들을 비난합니다. 어쩔 수 없이 그냥 이대로 살아야 하는 모양이라고 여깁니다. 수백 년 후에 바빌론 유배 때에도 이스라엘은 똑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심지어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가 바빌론으로 끌려온 이스라엘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지으라고 할 때에도 그들은 수십 년을 미적거립니다. 그냥 이대로 살겠다는 것이지요. 이하 탈출기 15장까지의 출애굽 줄거리는 생략하겠습니다. 모세가 백성을 어떻게 설득했는지 성경에서는 별로 들려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열 가지 재앙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완고한 마음을 품었던 파라오를 꺾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고집을 꺾기 위해서도 필요했을 것입니다. 기가 꺾여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권능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거의 강제로 짐을 싸서 떠나게 하신 것 같고, 어쨌든 탈출기 15장에서 이스라엘은 이집트 땅을 벗어났습니다. 최소한 경계선은 넘어선 것입니다. 하지만 이집트를 벗어난 이후로도 이스라엘은 순한 양처럼 모세의 인도를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광야’ 하면 생각나는 것이 바로 ‘불평’이지요. 먹을 것이 없다고, 마실 것이 없다고, 아말렉이 쳐들어온다고, 모압이 쳐들어온다고, 그들 힘으로 가나안을 정복할 수 없다고, 이스라엘은 끝없이 우왕좌왕합니다. 예수님이시라면 “믿음이 약한 자들”이라고 꾸짖으셨겠지요. 광야에서 머무는 동안 계속 반복되었던 이스라엘의 불평에서 대표적으로 두 가지만 인용합니다. 그 첫 번째는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생선이며,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생각나는구나.”(민수 11,5)라는 불평입니다. 이스라엘이 정말로 이집트에서 공짜로 양식을 얻어먹었을까요? 탈출기 앞부분을 보면 분명 그렇지 않았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그들은 강제 노동에 시달렸고, 진흙으로 벽돌을 만드는 일과 온갖 들일을 해야 했다고 나옵니다(탈출 1장 참조).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억압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합니다. 그저 지금처럼 매일 만나만 먹는 것보다는 이집트에서 여러 가지 음식을 먹던 때가 좋았다고 기억합니다. 두 번째는 민수 20,4-5입니다. “어쩌자고 당신들은 주님의 공동체를 이 광야로 끌고 와서, 우리와 우리 가축을 여기에서 죽게 하시오? 어쩌자고 당신들은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고약한 곳으로 데려왔소? 여기는 곡식도 무화과도 포도도 석류도 자랄 곳이 못 되오. 마실 물도 없소.” 여기에서도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그리워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죽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억압을 받으며 살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그들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는 겁을 집어먹고, 하느님께서 그 땅을 주겠다고 하신 약속을 믿지 못하며 반란을 일으켜 이집트로 돌아가려고까지 했기 때문에(민수 13-14장 참조), 이집트에서 나온 그 세대는 여호수아와 칼렙을 제외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어야 했고, 그 다음 세대가 비로소 약속된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결국 하느님은, 그리고 모세는 이스라엘이 원하지도 않던 것을 강요한 셈이 됩니다. 광야에서 죽느니 이집트에서 살겠다고 하는 그들을 굳이 끌고 나왔고 그래서 결국은 모두 광야에서 죽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혹시… 그냥 이집트에서 살게 두었더라면? 이스라엘에게 선택하라고 했더라면 혹시 그편을 선택하지 않았을까요? 40년 동안 그 고생을 하고 도중에서 죽고 마느니, 차라리 이집트 땅에 주저앉아 있기를 택하지 않았을까요? 그럴 수 없었던 것을 보면, 아마 그것은 불가능한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생각을 잘못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단순하게 세 가지의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집트에서 그냥 종살이를 하며 살든지, 가다가 광야에서 죽든지, 아니면 약속된 땅까지 도착해서 거기서 살든지. 이렇게 세 가지 중에서 객관식으로 선택하라고 하면 가장 먼저 거부되는 것은 당연히 두 번째 가능성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죽는 것이 무서워서 첫 번째 가능성을 선택하고 움직이지 않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종살이도 좋으니까 광야에서 죽는 것만은 원하지 않고 차라리 그대로 이집트에 머물러 살기를 원했던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죽었다는 것은 어쩌면 그 세 가지 가능성 중에 첫 번째 가능성은, 즉 이집트에 눌러앉는 가능성은 근본적으로 배제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다시 말하면, 세 가지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죽거나 약속된 땅까지 가거나 두 가지의 가능성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모세를 보내셨고 이스라엘을 들쑤셔 놓으십니다. 그대로 앉아있지 못하게 하십니다. 약속된 땅을 향해서, 움직여야 합니다. 여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가다가 중간에 죽든지, 끝까지 가든지, 둘 중의 하나만 있을 뿐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실패하지 않는다고, 그러나 그의 삶은 실패라고 하지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죽은 것은 물론 믿음이 부족해서였지만, 그들이 끝까지 이집트에 살기를 고집했더라면 그것은 더 큰 실패였습니다. 가다가 죽을지언정 그 땅을 향하여 한 걸음이라도 움직여 가는 것, 그것이 이스라엘이 가야 했던 길이었습니다. [땅끝까지 제83호, 2014년 9+10월호, 안소근 실비아 수녀(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성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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