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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신약성경의 기도: 우리를 위한 마지막 청원들 - 마태오 복음서의 주님의 기도 해설 (5)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5-08-03 조회수4,148 추천수1

[신약성경의 기도] ‘우리를 위한’ 마지막 청원들


마태오 복음서의 ‘주님의 기도’ 해설 5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마태 6,13ㄱ)

‘주님의 기도’ 후반부에 나오는 ‘우리를 위한’ 셋째 청원(“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과 넷째 청원(“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우리말 번역에는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되어 있는데, 그리스어 원문에는 좀 더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직역하면, “저희를 유혹으로 이끌어가지 마소서.”이다. 그런데 혼선을 피하고자 먼저 분명히 해두어야 할 점은, ‘주님의 기도’에서 ‘유혹(temptation)’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페이라스모스’는 ‘시험(test)’ 또는 ‘시련(trial)’이라는 의미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야고 1,13에는,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고, 또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 나온다. 야고보서의 저자는 아마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저희를 유혹으로 이끌지 마소서.”라는 청원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으려고 한 것 같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악으로 끌어들이려 하지 않으신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욕망 때문에 유혹을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야고 1,14-15; 집회 15,11-13 참조).

그런데도 마태오 복음서의 주님의 기도에는 “우리를 유혹(시험, 시련)으로 이끌지 마소서.”라고 되어 있다. 성경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죄의 함정에 빠지게 하려고 유혹(시험, 시련)으로 끌고 가지는 않으신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시련을 주어 당신에 대한 그들의 충실함을 시험하시는 경우가 있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께서는 이따금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시험하시는 분으로 등장하신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신명 8,2에 나오는 광야 여정을 배경으로 한 다음 말씀이다. “(하느님께서)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지지키지 않는지 너희 마음속을 알아보시려고 너희를 시험하신 것이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도 시험하셨다. “이런 일들이 있은 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창세 22,1). 여기에 나오는 ‘시험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구약성경(칠십인역)을 보면 우리가 흔히 ‘유혹하다’라고 번역하는 동사 ‘페이라조(peiraz?)’가 사용되었다.

아브라함의 경우,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결단의 상황으로 끌고 가셨다. 그가 ‘하느님을 반대하여’(악을 향해) 결단을 내리든지 아니면 ‘하느님을 향해’(선을 향해)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으로 끌고 가셨다. 이 점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유혹 장면에서도 확인된다.

마르코 복음(1,12-13)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그 뒤에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세례 때 예수님께 내리셨던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셨다.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광야체험을 다시 하셔야 했다. 또한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다. 이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악으로 유혹하지 않으신다. 악으로 유혹하는 것은 사탄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선택하신 이들에게 그들이 악과 ‘당신의 뜻’ 사이에서 결단해야 하는 상황으로 이끌기도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창세 22,1 이하)도, 심지어 예수님(마르 1,12-13 병행구들)도 시험(유혹)의 상황으로 이끄셨다.

‘유혹(시련, 시험)’의 상태에 있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다. ‘유혹’의 상태에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를 할 때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런데 유혹(시험, 시련)과 관련하여 꼭 참조해야 할 것을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러분에게 닥친 시련(그리스어 ‘페이라스모스’, ‘시험’ 또는 ‘유혹’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은 인간으로서 이겨내지 못할 시련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십니다”(1코린 10,13).

종합해 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유혹(시험, 시련)을 받는 상황에 놓이게 하신다. 때로는 그런 상황을 만들기도 하신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유혹-시험-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출구)도 마련해 주신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어떠한 유혹(시험, 시련)이 있더라도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배당된 시련의 짐을 우리가 지고 가겠다는 각오”(베네딕토 16세, 「나자렛 예수 1」, 박상래 옮김, 251쪽)를 단단히 하는 것이다.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마태 6,13ㄴ)

여기서 ‘악’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포네루(ponerou)’는 남성 단수‘(악한 자’를 의미한다.)의 2격일 수도 있고, 중성 단수‘(악’)의 2격일 수도 있다. 정양모 신부의 번역(「네 복음서공관 I」)에서는 “악한 자에게서 구출하소서.”라고 되어 있다. 이 경우 ‘악한 자’는 ‘사탄’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악(惡)’을 ‘악한 자’로 제한해서 이해할 경우, 주님의 기도가 본디 의도했던 의미를 축소할 우려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청원은 개별적 ‘악한 자’뿐 아니라, 이 세상의 비인격적인 ‘악’, ‘악의 세력’, ‘악의 현실’(미움, 폭력, 전쟁, 소요, 불안 등)에서 구출해 달라는 청원이기도 하다.

가톨릭교회의 미사에서는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그리스어 ‘포네루’를 ‘악’으로 해석하였다. 이는 미사 때 ‘주님의 기도’ 바로 다음에 나오는 주례사제의 기도에 잘 드러나 있다. “주님, 저희를 모든 악에서 구하시고 한평생 평화롭게 하소서”(“주님께서는 앞으로도 나를 모든 악행에서 구출하시고”[2티모 4,18]와 요한 묵시록 12장과 13장에서 ‘짐승’으로 표현되는 악의 세력[당시 교회를 박해하던 로마제국을 상징한다.]도 참조).

이렇게 보면,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이 마지막 청원에는, 주님의 기도의 처음 세 청원이 다시 등장한다고도 볼 수 있다. 악의 세력에서 보호해 주시기를 청하면서, 결국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고, 그분의 나라가 오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비는 것이다.

다른 한편,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이 마지막 청원은, 하느님께 충실하며 끝까지 시련을 견디어 낼 힘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겸손한 고백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청원은 또한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도와주시리라는 믿음을 전제한다.


“(왜냐하면)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당신(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일부 후대의 수사본들에는 위의 구절이 마태 6,13의 후반절에 나온다. 그러나 ‘시나이 사본’과 ‘바티칸 사본’처럼 매우 오래되고 대단히 중요한 사본에는 이 부분이 없으며, 대부분의 고대 라틴어 사본들에도 없다. 그리고 테르툴리아노와 오리게네스 그리고 치프리아노 같은 초기 교부들의 ‘주님의 기도 해설’에도 이 부분이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이 부분은 본디 ‘주님의 기도’의 본문에 있던 것이 아니라, 후대의 교회에서 전례 때에, 아마 1역대 29,11(“주님, 위대함과 권능과 영화와 영예와 위엄이 당신의 것입니다.”)을 바탕으로 ‘주님의 기도’에 삽입하여 사용하였던 데에서 유래하는 것 같다.

하지만, 「디다케」에 나오는 ‘주님의 기도’에는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당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전해져 있다. 개신교 신자들은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아멘!”이라는 부분을 꼭 포함한다.

가톨릭교회도 위의 ‘영광송(doxology)’을 ‘주님의 기도’와 관련지어 중요하게 사용한다. 곧, 미사 때 ‘주님의 기도’에 이어서 주례사제가 “주님, 저희를 모든 악에서 구하시고 한평생 평화롭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바친 다음, 모든 신자가 다음과 같이 응답한다.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의 삶이 결코 보장된 삶이 아니라, 각종 유혹(악)의 위협을 받는 실존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면서, 하느님 중심적인 삶의 방향(‘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을 유지하도록 이끌어준다. ‘주님의 기도’의 중요성에 관한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예수님의 활동 전체를 놓고 볼 때, 그것(주님의 기도)은 그분의 기도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기도의 힘으로 떠받쳐진 것이었다. … 그것은 모든 시대의 인간을 넉넉하게 품에 안을 만큼 폭넓은 기도다”(「나자렛 예수 1」, 207-208쪽).

* 김영남 다미아노 - 의정부교구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과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성서를 가르치고 있다.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대학교 신학부와 로마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성서학(특히 바오로 서간)을 전공하였다. 최근 「로마서」(성서와 함께, 2014년)를 저술했다.

[경향잡지, 2015년 7월호, 김영남 다미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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