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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구약성경의 열두 주제10: 하느님의 신부 이스라엘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5-10-21 조회수5,492 추천수1

[구약성경의 열두 주제 10] 하느님의 신부 이스라엘

 

 

필자가 처음 성경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표현 가운데 하나는 ‘질투하시는 하느님’이었다. 하느님이 너무 인간적으로 묘사되어 오랫동안 의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성서학을 제대로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이 계약에 얽힌 표현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글에서 곧 확인하겠지만, ‘질투하시는 하느님’은 주님을 신랑으로, 이스라엘을 신부로 보았기에 만들어질 수 있는 표현이다. 당시 이 깨달음은 신비의 세계처럼 닫힌 성경의 문들이 하나씩 열리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성경에서 최초로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을 혼인에 비유한 이는 호세아 예언자였다(호세 2,18.22 참조). 이 비유는 ‘질투하시는 하느님’뿐 아니라, 그 뒤에 예언서를 비롯해 여러 성경의 문헌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노골적인 애정 표현으로 가득한 「아가」가 정경에 들어올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했다.

 

아가는 언뜻 세속적인 연애 시집처럼 보이나,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사랑을 우의적으로 노래한 책이다. 그리고 혼인 비유는 신약까지 이어져, 예수님을 신랑으로 표현한다(마르 2,19; 묵시 21,2 등 참조). 신부는 신앙인으로 구성된 교회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구약의 여러 문헌을 거쳐 신약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을 하느님의 신부로 비유해 온 사상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질투하시는 하느님

 

예로부터 혼인은 계약으로 맺어지는 관계였다(말라 2,14: “그 여자는 너와 계약으로 맺어진 아내이다”). “나의 연인은 나의 것, 나는 그이의 것”이라며 남녀간 애정을 고백하는 아가 2,16은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는 말로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을 설명한 레위 26,12와 동일한 히브리어 구문을 사용한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내가 옷자락을 펼쳐 네 알몸을 덮어주었다. 나는 너에게 맹세하고 너와 계약을 맺었다. … 그리하여 너는 나의 사람이 되었다”(16,8). ‘옷자락을 펼쳐 알몸을 덮어준다.’는 표현은 혼인을 뜻한다.

 

룻 3,9도 ‘옷자락을 펼친다.’는 표현으로 보아즈와 룻의 혼인을 암시했다. 그렇다면 십계명에 나오는 ‘질투하시는 하느님’(탈출 20,5; 신명 5,9)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곧,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혼인과 비슷하게 본 것이다.

 

질투는 남편이 아내의 부정을 의심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민수 5,14; 잠언 6,34 참조). 그러므로 신부 이스라엘이 계약을 파기할 때마다, 곧 낯선 우상을 섬길 때마다, 하느님의 분노는 남편의 질투처럼 표출된다. 사실 이스라엘의 주변 나라들은 모두 다신(多神) 문화였기에, 아내 역할을 하는 여신이 있었다. 이스라엘만 유일신 사상을 고수했기에, 백성 전체가 하느님의 아내에 비유되었다.

 

 

호세아의 매춘부 아내와 하느님의 창녀 아내 이스라엘

 

성경에서 혼인 비유를 가장 먼저 구체적으로 적용한 이는 호세아였다. 호세 2,22을 보자.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 또한 호세 2,18은 계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날 주님께서 다시 남편이 되어주시리라 예고한다.

 

성경 목차에는 호세아서가 신탁 분량이 많은 이사야나 예레미야, 에제키엘에 비해 뒤로 밀렸으나, 호세아는 연대적으로 그들보다 앞 시대를 살았다. 그는 기원전 8세기, 곧 아모스와 비슷한 시대에 북왕국에서 활동하면서 차세대 예언자들을 이끈 선구자다.

 

계약 사상에 정식으로 혼인 비유를 들여온 그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매춘부를 아내로 맞아야 했는데, 정상적인 남자로서 상상하기 힘든 소명을 맡은 셈이다(1,2: “너는 가서 창녀와 창녀의 자식들을 맞아들여라. 이 나라가 주님에게 등을 돌리고 마구 창녀 짓을 하기 때문이다”).

 

이 비정상적인 혼인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배신한 간음을 자기 혼인생활을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다. 그런데도 우상들과 끊임없이 불륜 잔치를 벌였다(2,15; 4,13 참조). 그러니 그녀가 창녀와 다를 바 없는 불충한 신부임을 꼬집은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신탁에는 우상들이 이스라엘의 ‘애인’으로 불린다(2,7.15 참조).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들과 체결한 정치 계약도 불륜으로 보았다(8,9-10). 하느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열강의 힘에 의지하는 것도 정치적 간음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호세아서에는 예언자의 사생활이 자세히 언급되지 않으므로 그의 일대기를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매춘부와 혼인해 아내의 배신을 줄곧 지켜보아야 했던 수치와 아픔은 그에게도 피할 수 없는 십자가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직후인 광야의 유랑 시절을 이상적인 신혼 기간처럼 상기시키며 줄기차게 회개를 촉구했다(2,16-17: “이제 나는 그 여자를 달래어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 거기에서 그 여자는 젊을 때처럼, 이집트 땅에서 올라올 때처럼 응답하리라”).

 

그리고 자신이 창녀 아내를 용서하는 것처럼, 하느님도 매춘부 같은 이스라엘을 다시 받아들이실 것임을 알렸다. 곧, 호세아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아내로 삼으시리라는 말로 새 계약 체결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었던 것이다(2,21-22 참조).

 

 

호세아의 뒤를 이은 예언자들

 

혼인 비유로 이스라엘의 계약 파기를 비판한 호세아 신탁은 후대 예언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어 예레미야서, 에제키엘서, 이사야서 등에 꾸준히 이어졌다.

 

예레미야서에는 혼인 비유가 이렇게 나타난다. “네 젊은 시절의 순정과 신부 시절의 사랑을 내가 기억한다. 너는 광야에서, 씨 뿌리지 못하는 땅에서 나를 따랐다”(2,2). 곧, 예레미야도 호세아처럼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직후인 광야의 유랑 시절을 신혼처럼 묘사했다. 그리고 이방의 우상들을 ‘정부’로, 이스라엘의 배신을 ‘간음’이나 ‘불륜’으로 표현했다(3,1: “너는 수많은 정부들과 불륜을 저지르고서 나에게 돌아오겠다는 말이냐?”).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에제키엘도 예루살렘을 ‘창녀 아내’에 견주며, 남편인 하느님을 배신한 대가로 받게 될 징벌을 예고한다(에제 16장 참조). 이스라엘이 열강에 의지해 맺은 정치 계약을 불륜으로 본 호세아의 사상도 예레미야와 에제키엘로 이어진다(예레 22,20-22; 에제 23,5.8.11-17 참조). 특히 에제키엘은 이 정치적 불륜을 더욱 자세하게 색정적으로 고발했다. 호세아가 활동한 북왕국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게 멸망당하고, 예레미야와 에제키엘이 활동한 남왕국은 기원전 587년 무렵 몰락해 바빌론에서 유배살이를 한다.

 

그러나 오십여 년에 걸친 유배 뒤, 이사야서는 혼인 비유를 다시 적용해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렇게 알린다(62,5: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 곧, 호세아가 혼인 비유로 관계 회복을 예고했듯이, 이사야서 또한 혼인 비유로 시나이산 계약을 대체할 새 계약을 예고했던 것이다(새 계약은 이사 55,3에 언급되었다).

 

 

아가

 

호세아서에서 시작된 혼인 비유는 아가에도 새로운 빛을 비추어준다. 전통적으로 아가의 저자는 솔로몬으로 여겨왔다(1,1;3,7 참조). 하지만 중간중간에 페르시아어가 나타나므로 실제 저작 연대는 바빌론 유배 뒤, 곧 페르시아 시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가 7,1에 솔로몬의 연인으로 나오는 ‘술람밋(히브리어: 슐라밋)’은 ‘솔로몬(히브리어: 쉴로모)’의 여성형이므로, ‘솔로몬에게 속한 여인’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아가는 종교적인 색채는 없고 세속적인 연애시들만 수집해 놓은 모음집으로 보여, 정경에 들어가기까지 논란이 많았다.

 

그러나 이 혼인 비유 덕에 연인들의 애타는 연모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사랑으로 풀이될 수 있었다. 특히 유다교는 아가가 시나이 산 계약을 상징한다고 보아 과월절에 이 책을 봉독해 왔다.

 

「탈무드」에는 ‘연회장에서 아가를 세속적인 사랑 노래처럼 흥청거리며 부르는 자는 재앙을 불러오는 자’라며 저주하는 구절도 있다(산헤드린 101A). 게다가 아가 2,16이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는 말로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을 표현한 레위 26,12과 동일한 어휘를 사용함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교도 아가를 예수님과 교회의 사랑으로 풀이한다. 아가는 잃어버린 파라다이스로 돌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기에, 혼인 비유가 더욱 적절하다. 여인을 빗댄 “정원”(아가 4,12)이 바로 태곳적 ‘에덴동산’을 회상시키기 때문이다. 둘의 공통점은 자생적 샘이 있다는 것이다. 에덴동산에는 ‘안개 같은 물이 솟아올라 땅거죽을 적셨고’(창세 2,6 참조), 아가에서는 여인이 정원에 물을 대는 “샘”(4,15)으로 비유된다.

 

나무 아래의 깨우침도 공통분모다. 창세 3,6-7에서는 선악과나무 아래에서 아담과 하와의 ‘눈이 뜨였고’, 아가 8,5에서는 사과나무 아래에서 연인을 ‘깨운다.’ 이 일깨움은 분별력과 관련이 있다. 곧, 원조들은 선악과로 ‘좋고 나쁨’을 알게 되었고, 아가 연인들은 ‘사랑은 죽음 만큼 강한 것’(8,6참조)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아가에서는 에덴동산이 ‘죽음만큼 강한’ 남녀의 사랑을 통해 획득이 가능한 장소로 변모한다. 곧,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그리고 예수님과 교회의 깊은 사랑으로 다시 찾을 수 있는 이상향이 된다.

 

 

신랑이신 예수님

 

이스라엘을 하느님의 신부로 빗대는 비유는 신약까지 이어져,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신랑으로 표현하셨다(마태 9,15; 마르 2,19 참조). 바오로 사도는 혼인 비유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설명했다(2코린 11,2; 에페 5,23.25.31-32 참조).

 

요한 묵시록은 어린양과 신부의 혼인잔치를 묘사한다(19,7-8 참조). 어린양은 그리스도이시고 신부는 교회다. 이 어린양이 교회를 사랑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시므로 신부가 될 이들이 어린양의 피로 속량받는 신비가 일어나게 되었다(묵시 5,9;7,14 참조).

 

* 김명숙 소피아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에서 구약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5년 10월호, 김명숙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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