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이야기] 무화과나무
이스라엘 상징 나무… “열매 없다” 예수님 저주받아
- 무화과나무.
필자가 성경을 처음 접했을 때 가장 이해하기 힘든 일화 가운데 하나는, 철 아닌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다고 예수님이 저주하신 사건이었다. 나무 입장에서 좀 억울하지 않나? 예수님 배가 너무 고파 당신 안에 도사린 인성이 튀어나온 것인가 생각도 했다. 하지만 뭐든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고, 이해를 못하면 오해도 하게 되는 것 같다. 무화과 사건이 성전 정화 사건과 함께 나오므로(마르 11,12-19), 둘을 붙여 이해해야 함을 깨닫기 전까지는.
무화과는 우리나라에도 많지만, 성경에도 자주 언급된다. 이스라엘에 워낙 잘 자라는 나무라 베타니아(마태 21,17-19)라는 지명이 ‘무화과의 동네’라고 풀이될 정도다. 고대 유다 전승은 무화과가 선악과였다고도 전한다. 금지된 열매를 먹은 뒤, 원조들이 무화과 잎으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기 때문이다(창세 3,6-7). 무화과가 선악과로서 가진 상징성 때문에, 예수님 시대에는 경건한 유다인들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했다고 한다(요한 1,48 참조). 사실 선악과는 신기한 힘을 가진 나무가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어겼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죄책감을 느끼게 해주었기에 선악과였을 것이다. 곧, 선·악이 무엇인지, 죄책감이 어떤 것인지 알려 주었다는 점에서 사과였든 무화과였든 종류는 중요하지 않다.
무화과는 또한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 가운데 하나다. 호세아는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처음 만나셨을 때, 무화과 맏물을 발견하신 것처럼 기쁘게 바라보셨다고 묘사한다(호세 9,10). 그렇다면 예수님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합당한 결실 곧 공정과 정의를 맺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한탄하신 일종의 상징행위였을 것이다. 곧, 양질의 열매를 내지 못하고 들포도로 변질된 이스라엘을 꾸짖는 구약의 신탁들과 동일한 맥락이다(이사 5,2.7 예레 2,21 등 참조). 미카는, 백성이 타락하여 하느님이 바라신 햇무화과를 맺지 못했다고 한탄한다(미카 7,1: “나는 여름 과일을 수확한 뒤에 남은 것을 모으는 사람처럼, 포도를 딴 뒤에 지스러기를 모으는 사람처럼 되었건만 먹을 포도송이도 없고 내가 그토록 바랐던 햇무화과도 없구나”).
- 고대 유다 전승은 무화과가 선악과였다고 전한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는 틴토레토의 작품 ‘아담과 하와’. 이스라엘에서는 무화과가 일 년에 두 번 열린다. 첫 열매는 봄에 나온다. 쓴 맛이 나지만 먹을 수는 있다. 보통 가을 열매가 단 맛을 내므로, 그걸 수확한다. 무화과 사건은 과월절 전에 일어났으니 계절적으로 봄이다. 그러니 ‘무화과 철은 아니었는데’(마르 11,13) 먹을 만한 열매가 없다고 저주를 받으니 좀 이상하다. 하지만 여기서 ‘철’(카이로스)이라는 말은 상징적 의미로 보아야 한다. 곧, 연대적 시간이 아니라, ‘때’로 이해해야 한다(마르 1,15: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참조). 그렇다면 무화과나무의 ‘때’가 아님은,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는 ‘때’를 가리키는 듯하다. 과실수임에도 열매가 없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느님 백성으로서 합당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잎은 무성하고 보기엔 건강하나, 빛 좋은 개살구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이런 모습은 예레 8,13을 생각나게 한다: “내가 거두어들이려 할 때 포도나무에 포도가 하나도 없고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하나도 없으리라. 이파리마저 말라 버릴 것이니 내가 그들에게 준 모든 것이 사라지리라.” 합당한 결실을 맺지 못했으니 하느님이 주신 모든 것이 사라지리라는 이 예언처럼, 예수님도 무화과나무가 다시는 열매 맺지 못하고 말라버리리라고 못 박으신다(마르 11,14). 곧, 무늬만 그럴듯하고 실상은 부패한 이스라엘에 재앙을 예고하신 셈이다. 그래서 무화과가 뿌리까지 말라 버리듯, 강도들의 소굴로 타락한 성전도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질 것이다(마태 23,37 마르 13,2). 예수님이 무화과를 저주하신 것은, 성전마저 세속 시장처럼 변질시킨 이스라엘의 타락상을 꾸짖기 위함이었다. 언뜻 희생 제물과 성전세를 바치는 등 많은 활동을 하는 듯 보이지만, 정작 공정과 정의는 맺지 못했다. 예수님의 예고대로 성전이 파괴된 뒤에는,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 되었다(2코린 6,16). 그러므로 우리도 ‘소리만 요란한 공 수레’가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닥치기에(1테살 5,2), 무화과나무 사건은 늘 깨어 있어야 함을 가르쳐 준다.
* 김명숙(소피아) -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교에서 구약학 석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예루살렘 주재 홀리랜드 대학교에서 구약학과 강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5년 11월 15일, 김명숙(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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