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도시] (70) 게제르
솔로몬이 결혼 지참금으로 받은 땅
- 게제르 성문에는 방이 여섯 개 있었다. 그 방 하나에 있던 돌 욕조. 기원전 10세기. 출처=「성경 역사 지도」
도시가 형성하고 발전하는 주요 요소 중 하나는 교통이 얼마나 편리한지에 달려 있다. 게제르는 유다 평지의 북쪽 끝 부분 고지대에 있지만 주변이 탁 트여 사방의 전 지역을 내려다볼 수 있다. 이러한 전략적 중요성과 더불어 주변에는 아주 비옥한 농지가 풍부했고 풍성한 샘물도 있었다. 이처럼 게제르는 해안도로를 지나던 교통요충지로서 해안 평야 지대에서 유다 산지로 올라가는 중요한 통로였다.
기원전 2000년쯤부터 이 도시는 항상 높은 성벽과 튼튼한 성문으로 요새화돼 이집트와 아람,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의 주요 도시들을 연결하는 요충지로 발전했다. 게제르를 장악하는 것은 고대 국제무역로로 통제해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가져올 수 있었기 때문에 주변의 여러 강대국도 모두 탐내던 도시였다.
성경에서도 게제르는 자주 언급돼 나온다. 게제르의 호람 왕은 여호수아의 정복 때 라키스 왕을 도우러 나왔다가 패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때에 게제르 임금 호람이 라키스를 도우러 올라왔지만, 여호수아는 그와 그의 백성도 쳐서 생존자를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여호 10,33). 기원전 13세기 말 게제르의 인구는 줄어들었고 도시는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여호수아는 게제르를 정복하고 에프라임 지파에 속한 레위인 크핫의 나머지 자손들에게 나눠주었다. “크핫의 나머지 자손들, 곧 레위인 크핫 자손의 씨족들은 제비를 뽑아 에프라임 지파에서 성읍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에프라임 산악 지방에 있는 살인자의 도피 성읍 스켐과 거기에 딸린 목초지, 게제르와 거기에 딸린 목초지…”(여호 21,20-21).
이곳은 레위 사람들의 도시 가운데 하나로 언급돼 있기는 하지만, 실제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만 정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게제르는 필리스티아인과 이스라엘 사이의 완충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는 최전방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제르가 성경의 사건에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무엇보다 솔로몬 시대였다. 솔로몬은 게제르의 지리적 입지를 높이 평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안도로와 북쪽으로 도로를 장악하기 위해 솔로몬 임금이 주님의 집과 자기 궁전과 밀로 궁을 짓고, 예루살렘 성벽과 하초르와 므기또와 게제르를 세우려고 백성들에게 부역을 시켰다(1열왕 9,15). 이집트의 왕 파라오는 게제르를 점령해서 성읍에 있는 가나안 사람을 죽이고 솔로몬에게 아내로 준 자신의 딸에게 이 도시를 선물했다. “이집트 임금 파라오가 올라와 게제르를 점령할 때, 그 성읍에 불을 지르고 그곳에 살던 가나안 사람들을 살해한 일이 있었다. 그는 솔로몬의 아내가 된 자기 딸에게 그 성읍을 지참금으로 주었는데…”(1열왕 9,16).
결국 게제르는 이집트의 속국이 돼 고대 기록에는 게제르 왕들이 이집트 파라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집트는 20년 동안 게제르의 왕을 4번이나 바꿨다.
이곳은 고대 주요 문서에서도 빠짐없이 등장한다. 이는 게제르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객관적 자료다. 고고학 발굴을 통해 현재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30㎞ 떨어져 있는 텔 엘-제제르(Tell el-Jezer)로 밝혀졌다. 발전을 거듭했던 게제르는 기원전 732년 아시리아에 의해 파괴된 후 다시는 사람들이 거주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한 도시의 흥망성쇄를 보면 겸허한 마음이 절로 생긴다.
[평화신문, 2015년 12월 6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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