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52) “제 민족을 살려주십시오”(에스 7,3)
하느님 섭리의 도구, 에스테르
- 렘브란트 작, ‘에스테르의 연회’, 1660년.
어느 날 미사 마침 성가가 ‘주님의 집에 가자 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악보는 원선오 신부님이 작곡하신 노래였는데 반주는 현정수 신부님 곡이 나왔습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 할 때…”라고 노래는 시작했으나 끝까지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뒷부분 가사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제목이 같다고 같은 노래가 아닌 것이지요.
에스테르기가 이와 비슷합니다. 에스테르기 줄거리는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히브리어본 에스테르기와 그리스어본 에스테르기 사이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본 에스테르기는 더 짧고, 그리스어본에는 히브리어본에 없는 내용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에스테르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주의해야 합니다. 개신교 신자들이나 유다교 신자들도 에스테르기를 성경의 한 권으로 여기지만, 그들이 말하는 것은 히브리어본 에스테르기이므로 우리의 성경에 들어 있는 일부 본문들은 포함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같은 노래인 줄 알고 부르다 보면 뒤에 가서 노래가 달라지는 셈이지요.
우리가 아는 대략의 줄거리, 곧 페르시아 임금 크세르크세스의 왕비가 폐위된 후 유다인으로서 모르도카이의 사촌이며 양녀인 에스테르가 페르시아에서 왕비가 되고, 하만이 음모를 꾸며 유다인을 몰살하려고 할 때 에스테르가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간청하여 자기 민족을 구했다는 이야기는 히브리어본에 모두 들어 있는 줄거리입니다. 그리스어본에는 이 줄거리 앞에 모르도카이의 꿈에 관한 내용이 더 들어 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히브리어본 에스테르기에는 하느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데 그리스어본에는 여러 곳에서 하느님이 언급된다는 점입니다. 그리스어 에스테르기 4장에는 모르도카이의 기도와 에스테르의 기도가 들어 있고, 마지막에는 모르도카이가 지난 일들을 회상하며 그 모든 일이 하느님의 계획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생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질문은, 히브리어 에스테르기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냥 하느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옛날이야기라고 해야 할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도 없지 않습니다. 이 책이 순전히 세속적인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지요.
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히브리어 에스테르기가 굳이 하느님을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역사를 인도해 가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암시하고 있다고 봅니다. 순전히 인간들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 안에서 사실은 하느님이 움직이고 계시며, 독자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하느님의 섭리를 알아보는 법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흔히 예로 드는 구절이 에스테르기 4장 13-14절입니다. 모르도카이는 에스테르에게, 임금에게 가서 동족을 위하여 간청하라고 말합니다. “그대가 이런 때에 정녕 침묵을 지킨다면, 유다인들을 위한 해방과 구원은 다른 데서 일어날 것이오.…누가 알겠소? 지금과 같은 때를 위하여 그대가 왕비 자리에 이르렀는지.” 여기서 말하는 ‘다른 데’는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모르도카이의 이 말은 에스테르가 왕비가 된 것이 이때를 대비하기 위하여 하느님의 계획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룻기에서도 그랬듯이,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만한 우연으로 사건들이 전개되는 것은 그 안에 하느님의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에스테르는 그러한 하느님 섭리의 도구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하느님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는 이야기를 썼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에스테르기가 작성된 시대가 하느님이 계시지 않다고 느껴지는 암울한 시기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토빗기나 유딧기와 마찬가지로 에스테르기도 역사적 사실의 기록은 아닙니다. 페르시아 역사에는 와스티라는 왕비도, 에스테르라는 왕비도 없습니다. 에스테르기의 마지막에서 말하듯이 유다인들이 페르시아인들을 몰살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외국인들에게 배타적인 하만의 태도도 페르시아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의 모습은 오히려 기원전 2세기 말 셀레우코스 왕조의 통치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 시기가 에스테르기의 작성 연대일 것입니다.
기원전 2세기, 외세의 억압과 박해 속에서 유다인들은 하느님이 과연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일까 의심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얼굴을 감추셨습니다. 마치 안 계신 듯, 하느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속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찾을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것이 에스테르기입니다. 기원전 2세기의 누군가가 에스테르기를 읽으며 그 안에서 유다인들이 모두 죽게 된 상황에서도 보이지 않게 움직이시며 그들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보게 된다면, 그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하느님의 발자취를 알아보는 법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그 시대 안에서도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기억하시고 돌보고 계심을 믿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 히브리어 에스테르기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사람이 그 책에 여러 단락을 덧붙이면서 이 모든 사건의 전개가 하느님의 개입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표시해 주었다면, 그는 우리의 일을 더 쉽게 해 준 셈입니다. 모든 일이 끝난 다음 모르도카이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이민족들에게 서로 다른 운명을 마련하셨다고 말하며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우리를 이 모든 악에서 건져 주셨다”(에스 10,3)고 말합니다. 에스테르기는, 혼란스런 인간의 역사 안에서도 그러한 하느님의 발자취를 알아보라고 말해 줍니다.
[평화신문, 2016년 1월 1일, 안소근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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