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문화] 성경, 문화와 영성15: 그리스도의 체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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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6-03-08 | 조회수9,602 | 추천수2 | |
파일첨부 카라바조_그리스도의 체포.jpg [974] | ||||
성경, 문화와 영성 (15) 그리스도의 체포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겟세마니에서 체포되신 사건은 네 복음서 모두에서 전해진다.(마태 26,47-56; 마르 14,43-50; 루카 22,47-53; 요한 18,1-11)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였던 유다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배반하고 그분을 팔아넘긴다. 유다가 데리고 온 무리에 의해 예수님은 체포되신다. 이 긴박하고 긴장된 순간을 포착한 카라바조는 탁월한 해석과 함께 걸작을 남겼다.
■ 카라바조의 〈그리스도의 체포〉
● 카라바조의 〈그리스도의 체포〉(Taking of Christ)는 1602년 캔버스에 그린 유화로 133.5×169.5cm의 크기이며, 더블린(Dublin)에 있는 아일랜드 국립 미술관(National Gallery of Ireland)에 소장되어 있다.
● 이 그림에서 카라바조는 빛과 어둠의 놀라운 대비를 사용한다. 어둠 속에서 배반의 광경이 벌어지고 있다. 화면에는 모두 일곱 명이 등장한다. 화가는 어둠에 대비되는 빛의 효과를 통해 각각의 등장인물에 대한 탁월한 해석과 묘사를 표현한다. 깍지를 끼고 서 있는 이가 예수님이고 그분의 볼에 입 맞추는 이는 유다이다. 그림의 맨 왼쪽에는 겁에 질려 달아나는 제자가 있고 갑옷과 투구를 갖춘 세 명의 군인이 등장한다. 맨 오른쪽의 인물은 평론가들에 의해 카라바조 자신으로 해석된다.
● 예수님은 배신자 유다의 행동을 견디며 괴로워하는 얼굴 표정으로 두 손은 깍지 낀 의연한 모습이다. 그분은 배신자의 포옹을 거부한다. 예수님과 유다 사이에는 무언의 긴장이 흐른다. 유다의 행동은 가증스럽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 그림에서 유다로 표현된 이는 카라바조의 1603년 작품인 〈토마스의 의심〉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한 토마와 같은 모델이라는 것이다. 이것으로써 카라바조는 예수님에 대한 배신과 의심을 동일한 것으로 표현하려 했을까? 유다는 무장한 군인들과 함께 등장한다. 그림 중앙에 있는 군인은 팔을 뻗어 예수님의 멱살을 잡고 있다. 군인의 폭력적인 행동은 장면의 긴장감을 높이고 있다. 검은 갑옷과 투구에 빛이 반사된다. 그림 왼쪽의 제자는 스승이 체포되는 순간에 현장에서 도망친다. 결국 예수님은 달아나는 제자와 배신하는 제자 사이에 있다. 그 순간 그림 오른쪽에는 한 손에 등불을 들고 이 광경을 지켜보는 이가 있다. 카라바조는 자신의 모습을 그림으로써 어둠을 헤매는 자신의 삶 안에서 구원의 빛을 찾고자 한 것은 아닐까?
■ 겟세마니에서 예수님이 잡히시다
● 예루살렘 성 안에서 최후 만찬을 마친 예수님과 제자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 산으로 갔다.”(마르 14,26) 그리고 “그들은 겟세마니라는 곳으로 갔다.”(마르 14,32) 올리브 산은 예루살렘의 동쪽 키드론 계곡 건너편에 위치한 산이다. 겟세마니는 예루살렘 성전 맞은편의 올리브 산 하단 부분에 위치한 곳이다. 겟세마니라는 이름은 올리브 나무의 열매로 “기름을 짜는 틀”(oil press)을 의미한다.
● 마르 14,43-50은 겟세마니에서 예수님이 체포되시는 장면을 전한다. 본문은 전반부(마르 14,43-47)와 후반부(마르 14,48-50)로 나뉜다. 본문의 전반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등장인물은 유다이다. 사실 마르 14,10-11에서 유다의 배신이 묘사된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그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려고 수석 사제들을 찾아갔다. 돈을 받기로 하고 유다는 결국 본문에서 예수님을 넘기고 만다. 그리고 최후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배신을 예고하신다.(마르 14,18) 그러자 유다와 열한 제자들은 차례로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는다.(마르 14,19) 예수님은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시는데(마르 14,20-21) 결국 이 말씀은 본문에서 이루어진다. 배신자 유다가 등장한 것은 겟세마니에서 아직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실 때이다. 제자들 중에서도 특히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그분을 체포하려는 사람들을 안내한다. 유다가 동행한 이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보낸 무리”이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자는, “내가 입 맞추는 이가 바로 그 사람이니 그를 붙잡아 잘 끌고 가시오.”하고 그들에게 미리 신호를 일러두었다.(마르 14,44) 유다는 예수님에게 와서 “스승님!”이라고 인사하고 입을 맞춘다. 여기서 우정의 표현인 입맞춤이 배신의 신호가 된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손을 대어 그분을 붙잡았다.”
● 본문의 후반부인 마르 14,48-49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서술된다. 그분은 벌어지는 일들을 성경과 관련시킨다. “너희는 강도라도 잡을 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나왔단 말이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지만 너희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리된 것이다.” 겟세마니에서 예수님이 체포되시자 “제자들은 모두 그분을 버리고 달아났다.” 여기서 “모두”라는 표현은 마르 14,27에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인 “너희는 모두 떨어져 나갈 것이다.”를 회상케 한다. 그리고 제자들의 행동을 표현하는 동사는 “버리다”와 “달아나다”이다. 사실 “버리다” 동사는 복음서 안에서 제자들의 “예수님을 뒤따르기”와 관계된다. 첫 네 제자를 부르신 본문인 마르 1,16-20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긍정적으로 응답하여 버리고 뒤따랐다. 제자들은 이전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예수님과의 친교를 선택하여 그분과의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인 마르 10,28에서 베드로는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갈릴래아에서 시작된 예수님과 제자들의 이 친교와 공동체는 예루살렘에서, 더욱이 겟세마니에서 예수님이 체포되시는 순간에 결정적인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뒤따랐던 제자들은 마침내 그분마저 버리게 된다. “예수님을 뒤따르기”와 그분과의 친교를 위한 조건으로 제시된 “버리다”라는 동사가 겟세마니에서는 그분과의 관계 단절을 표현한다. 이와 같이 본문에서는 배신자 유다의 행동뿐 아니라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나는 행동에서 제자들의 부정적인 모습이 분명히 묘사된다.
● 이와 같이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특히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부정적인 모습을 더 분명히 드러낸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그분에게서 일어나는 일들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가까이 가시면 가실수록 제자들은 그분에게서 더욱 멀어져만 갔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환호했던 제자들, 결코 스승을 배반하지 않으리라 장담했던 제자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체포되시는 순간 모두 그분을 버리고 도망갔다. 제자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예수님의 총애를 받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겟세마니에서 잠들어 버리고 열두 제자 중의 하나인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신하고, 버리고, 부인하였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공동체는 파국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제자들의 약하고 부족한 모습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곧 우리는 제자들의 몰이해와 부정적인 모습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을 배신하고 버리고 부인하고 있는가?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6년 3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 그림 파일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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