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66) 하스몬 왕조의 마지막
권력 다툼에 멸망을 자초하는구나 지난주에 구약 성경에서 가장 작성 연대가 늦은 책인 지혜서를 마치면서, 연재가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신 분들이 계셨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닙니다. 신약 성경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의 역사를 계속 따라가 보려고 합니다. 마카베오기는 마타티아스와 그의 셋째 아들 유다 마카베오(기원전 166~160), 다섯째 아들 요나탄(기원전 160~143), 둘째 아들 시몬(기원전 143~134)의 활동을 기록했습니다. 142년에 유다는 독립을 얻었고 마카베오 집안은 하스몬 왕조가 되었습니다. 134년에는 시몬의 사위 프톨레마이오스가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7세와 공모하여 시몬을 살해했으나, 왕위에 오른 것은 시몬의 아들 요한 히르카노스였습니다(재위 기원전 134~104). 시몬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미 그렇게 결의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등장인물이 많아지고 이름들이 길고 복잡해지기 시작했지요? 이후로 마카베오 집안은 말할 수 없는 분열과 부패를 거듭하게 되고, 따라서 하스몬 왕조에 대한 백성의 지지도 더욱 약화될 것입니다. 이 시대의 역사는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복잡합니다. 그 복잡한 이야기를 적어 놓는 것은, 외세의 침입과 박해에 맞서 일어났던 마타티아스의 후손들이 어떤 상황에 이르렀는지를 보여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요한 히르카노스 1세는 아버지 시몬이 시작해 두었던 정복 전쟁을 계속하여 유다의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기원전 128년에는 그리짐 산에 있는 사마리아인들의 성소를 파괴하였고, 유다 남쪽의 이방인이던 이두매아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열심한 유다인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마타티아스처럼 율법에 대한 열성을 품은 이들과 함께 전쟁을 치른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모집한 용병을 이끌고 정복 활동을 했습니다. 유다인들이 볼 때 그는 세속적인 지배자였고, 하스몬 왕조는 점점 헬레니즘적인 방향으로 기울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하스몬 왕조를 지지하던 바리사이들도 이제는 등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요한 히르카노스의 뒤를 이은 것은 그의 아들 아리스토불로스 1세였습니다(기원전 104~103). 본래 요한 히르카노스는 부인에게 통치를 맡기려 했었는데, 아리스토불로스 1세가 어머니를 몰아내고 세 동생을 감금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갈릴래아를 정복하였고, 갈릴래아 북쪽의 이투래아인들에게 할례와 유다의 율법을 강요하였습니다. 그는 1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통치는 그렇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본래 아리스토불로스 1세의 아내였던 살로메 알렉산드라는 남편의 동생인 알렉산드로스 얀내오스를 감옥에서 풀어 주고 그와 결혼하며 그를 임금이 되게 하였습니다(기원전 103~74). 왕조를 이어가기 위해, 살아 있는 시동생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던 그와 결혼한 것이지요. 살로메 알렉산드라는 알렉산드로스 얀내오스보다 열세 살이 많았습니다. 한편 알렉산드로스 얀내오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같은 대제국을 꿈꾸며 그의 이름을 취한 것이었고 과연 자신의 야심대로 다윗 시대만큼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백성의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군인이며 정복자이고 동시에 대사제가 된다는 것은 열심한 유다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고, 더구나 무리하게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서 점령지의 주민들을 억누르는 매우 잔인한 조처들을 취하였습니다. 반란과 폭동이 이어졌고, 그는 팔백 명의 폭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형벌은 이스라엘 역사상 없던 일이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그의 아내가 되었던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통치했습니다(기원전 76~67). 알렉산드로스 얀내우스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녀에게 바리사이파와 화해하라고 충고했다 하지요. 그것이 많은 이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그녀의 통치는, 이전과 이후의 임금들에 비하면 그래도 신중한 편이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실권은 자신이 갖고 있었으나 여성으로서 대사제가 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대사제직은 아들 요한 히르카노스 2세에게 맡겼습니다. 살로메 알렉산드라 사후에는 일단 큰아들 히르카노스 2세가 임금이 되었지만(기원전 67), 그의 동생 아리스토불로스 2세가 사두가이파의 도움으로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그를 몰아내었습니다(기원전 67~63). 형제간에 무력 충돌이 있었고, 아리스토불로스가 더 강했기에 히르카노스의 부하들까지도 나중에는 아리스토불로스의 편에 가담했던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 히르카노스 2세는 이두매아의 총독이던 안티파테르의 도움을 청했고, 또한 안티파테르의 권고를 받아 나바테아인들의 지원도 청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히르카노스 2세와 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각각 막강한 힘으로 팽창하고 있던 로마의 지지를 얻으려고 했는데, 기원전 63년에 아리스토불로스 2세가 군사력을 움직이자 폼페이우스가 개입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는 지성소까지 들어감으로써 성전을 모독하였으나 성전을 파괴하지는 않았습니다. 히르카노스 2세는 다시 대사제로 임명되었지만(기원전 63~40), 임금이라는 호칭은 포기해야 했고 이제 팔레스티나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실속을 챙긴 사람은, 히르카노스 2세를 지지했던 안티파테르였습니다. 안티파테르는 헤로데 대왕의 아버지입니다. 괜히 읽기 시작했다 싶을 만큼 복잡하지요? 하지만 이 복잡한 역사는 대단히 교훈적입니다. 성전과 율법을 지키고자 목숨을 내놓은 투쟁을 시작했던 마카베오 집안이 스스로 권력 다툼에 휘말리기 시작했을 때 어떤 결과에 이르게 되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민족의 멸망이었습니다. [평화신문, 2016년 4월 24일, 안소근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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