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이야기] 에제키엘
바빌론 탈출 선포하며 귀환의 희망 전해 - 예루살렘 다윗 성채 박물관에 있는 바빌론의 유배 생활을 묘사한 부조.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부·권력·명성을 가진 사람이 사회에 대한 책임도 함께 져야 한다는 뜻이다. 사회 지도층이 갖추어야 할 높은 도덕성을 의미한다. 옛 이스라엘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이를 꼽으라면 에제키엘을 빼놓을 수 없다. 에제키엘은 신분 높은 사제 출신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민족 존립의 위기를 겪을 때 그걸 극복하도록 이끌어준 예언자였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지금부터 26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즈 사제의 아들로 태어나(에제 1,3) 어린 시절부터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스물다섯 되던 해인 기원전 598/7년에는 바빌론으로 끌려가 유배자로 살았기에, 그가 활동한 곳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메소포타미아(현 이라크)였다. 유다 임금 여호야킨과 귀족들만 유배당한 시기에 함께 유배된 걸로 보아, 명문세족에 속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에제키엘은 시종일관 ‘사람의 아들’이라는 익명으로 자신을 감추며(3,1; 12,2 등),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도구로 투신하는 겸손을 보였다. 에제키엘은 히브리어로 ‘예헤즈케엘’이라 하며, 이름 뜻은 ‘하느님께서 강하게 하시다’이다. 본디 나이 서른에는(민수 4,2-3 참조)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제로 봉직해야 했지만, 바빌론 유배라는 정황상 예언자 소명을 받고 활동했다. 그가 거주한 마을은 크바르 강 가 텔 아비브 정착촌(에제 3,15)으로 추정된다(크바르 강은 유프라테스 강물을 끌어들이던 운하다). 유배지에서 에제키엘은 유다 원로들이 찾아와 조언을 구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8,1; 20,1 등 참조) 하지만 예언을 밥벌이 삼아 백성을 속이는 거짓 예언자들이 주변에 워낙 많아, 소명 수행이 쉽지 않았다. 예루살렘과 성전 몰락을 예고하는 에제키엘과 달리, 거짓 예언자들은 바빌론이 곧 물러가고 평화가 찾아온다는 감언이설을 선포했기 때문이다.(13,10: “정녕, 평화가 없는데도 그들은 평화롭다고 말하면서, 내 백성을 잘못 이끌었다” 참조) 동료 유배자들도 듣기 싫은 질책이나 재앙을 선포하는 에제키엘을 달가워하지 않아 따돌리거나, 조롱거리·비웃음거리로 만들기도 했던 듯하다.(2,6; 3,9; 21,5: “아, 주 하느님! 그들은 저를 가리켜, ‘저자는 비유나 들어 말하는 자가 아닌가?’라고 합니다” 참조) 이런 상황에서도 에제키엘은 말씀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으면 자기 목숨도 위험해진다고 생각했을 만큼(3,16-21 참조), 백성 하나하나에 대해 책임감을 느꼈다. 예루살렘 몰락 직전에는 하느님이 그의 아내를 앗아가시고 애도조차 허용하지 않으셨음에도 그 상황을 오롯이 견뎠다.(24,16-18: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네 눈의 즐거움을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너에게서 앗아 가겠다. 너는 슬퍼하지도 울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마라… 이튿날 아침에 내가 백성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다”) 소중한 이를 잃은 아픔에 말문이 막혀 애도조차 못하는 에제키엘처럼, 이스라엘 백성도 기쁨이자 자랑인 성전을 잃는 고통에 애도마저 잊게 될 것임을 예고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외로운 고투에 종지부를 찍은 건 예언대로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되고 난 다음(기원전 587/6년)이었다. 그 이후부터 에제키엘은 참예언자로 인정받아, 유배된 백성에게 회복의 시대를 예고해 줄 수 있었다. 예루살렘 파괴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민족의 죄 때문에 재앙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며 심판을 선포했지만(1-24장), 나라 멸망 이후에는 제2의 탈출 곧 바빌론 탈출을 선포해 귀환의 희망을 심어주었던 것이다.(33-48장) 이렇듯 에제키엘은 이방 땅에서 제2의 모세처럼 나라 잃은 백성을 이끌었다. 하지만 정작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듯, 에제키엘도 자신이 예언한 이스라엘의 회복은 보지 못하였다. 시온 귀환은 그로부터 몇 십 년 뒤인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정복하고 정치권의 판세를 뒤집었을 때 이루어졌던 것이다. - 유프라테스 강 전경. 출처 위키피디아. 하느님과 민족을 향한 소명에 지와 덕을 다한 예언자 에제키엘. 고통이 따르는 임무를 맡고 일생을 투신한 그는 처녀의 몸으로 순종해 기꺼이 아기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과 비슷한 면이 있다. 귀족 출신으로서 일신의 영달을 꾀하지 않고 백성을 위해 헌신한 책임감은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 할 수 있겠다. 젊은 날 고향을 떠나 바빌론에 정착한 에제키엘은 그곳에서 마지막 생을 보냈으며, 무덤은 이라크 땅 힐라 마을 근처 알-키플에 있다고 전해진다. * 김명숙(소피아) -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교에서 구약학 석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예루살렘 주재 홀리랜드 대학교에서 구약학과 강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6년 4월 24일, 김명숙(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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