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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구약 여행70: 반로마 항쟁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6-05-22 조회수7,449 추천수2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70 · 끝) 반로마 항쟁


이스라엘 역사 끝나고 예수님 시대 시작

 

 

- 마사다 요새.

 

 

이제 유다 역사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유다와 사마리아에 로마 총독이 있게 된 것은 기원후 6년부터였습니다. 헤로데 대왕의 아들 아르켈라오스의 폭정에, 유다인들 스스로가 그의 폐위를 요청하고 차라리 로마가 직접 통치하기를 바란 것이었습니다. 아그리파스 1세가 세상을 떠난 기원후 44년 이후로는 이두매아도 로마 총독이 통치했습니다. 하스몬 집안과 헤로데 집안에 지친 이들은 로마 총독이 직접 다스리기를 요청한 것이지만, 로마인들이 유다인들을 얼마나 이해했겠습니까? 여러 가지 요인들로 로마에 대한 유다인들의 반감은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식적으로 로마는 유다교를 존중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 그 존중은 순전히 형식적인 것이었고, 유다교의 예식에 개입하지 않는다 해도 그와 동시에 유다인들에게 로마의 종교적 예식을 강요했습니다. 여러 신이 그려진 깃발들을 앞세우고 행렬을 하였으며, 로마 관리들은 유다교 신앙을 경멸했습니다. 세금 문제도 유명하지요. 세금 징수가 개인들에게 맡겨졌고, 그들은 군사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세금을 거두어들였습니다. 복음서들에 나타나는 것처럼 세리들이 백성의 미움을 받았던 것은 그러한 배경에서였습니다.

 

이제 유다의 구석구석이 들끓기 시작합니다. 기원후 7년경에도 이미 세금 징수를 위한 인구 조사를 거부하면서 갈릴래아의 유다라는 인물이 반란을 일으킨 일이 있었습니다.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여기에서부터 열혈당원들이 생겨났습니다. 기원후 41년에는 로마인들이 성전에 황제의 상을 세우려 했기 때문에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로마의 순찰대가 약탈하다가 토라 두루마리와 회당을 모독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여러 지역에서 유다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로마 점령군의 강압에 폭동 일어나 

 

대규모 소요가 일어난 것은 66년, 제1차 반로마 항쟁이었습니다. 로마 점령군들과 특히 총독 플로루스의 강압적인 태도가 유다인들을 자극했을 뿐만 아니라, 플로루스가 성전 금고에서 17달란트를 꺼내 간 사건까지 발생하자 유다인들의 폭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총독을 공개적으로 조롱했고, 그는 보복으로 군대에게 약탈을 허락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일부를 불태웠고, 이에 예루살렘 사람들은 성전을 점령했습니다.

 

반군은 처음에 마사다를 비롯하여 여러 요새를 점령했습니다. 시리아에 있던 로마 총독 체스티우스가 진격해 왔어도 그는 예루살렘을 점령하지 못하고 물러났습니다. 그러자 열혈당원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온건한 입장에 머물렀던 이들도 항쟁에 가담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반군에게는 조직이 부족하고 내분이 일어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오합지졸이라고 하면 미안하지만, 그들이 제대로 된 군대는 분명 아니었습니다. 무기와 장비도 부족했습니다.

 

일이 커지자 로마의 네로 황제는 베스파시아누스를 파견하였고, 그는 아들 티투스와 함께 갈릴래아를 공격하여 평정하고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네로가 자살하고 로마의 정국이 매우 불안해져 로마군이 공격을 중단하기도 하였으나, 70년에 군대는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지명했고 그는 아들 티투스에게 군대의 지휘를 맡겼습니다. 그 해에 예루살렘이 파괴되어 완전히 초토화되었고 8월 29일에는 성전도 불탔습니다. 71년 여름에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는 로마로 개선했고, 이후에 일부 반군은 마사다로 가서 끝까지 항거하였는데, 73년에는 마사다도 함락되었습니다. 요세푸스는 마사다에 있던 반군이 항복하지 않기 위하여 집단으로 자결했다고 말합니다. 쿰란 공동체도 이때에 파괴되었을 것입니다.

 

타키투스와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 항쟁 때에 유다 인구의 25퍼센트인 60만 명이 죽임을 당했고 많은 이들이 포로나 노예가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예루살렘이 파괴된 이후 이전보다 더 많은 유다인들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로마 등지로 흩어져 갔습니다.

 

 

율법을 중심으로 모였지만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 치세 때인 132~135년에는 다시 제2차 반로마 항쟁이 일어났습니다. 제1차 항쟁 이후 제2차 항쟁이 일어나기까지의 시기에 대해서는 역사 기록이 부족하여 그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로마의 지배자들과 유다인들 사이의 관계가 이전보다 개선되었을 리가 없습니다. 로마인들은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가 야브네에 율법을 공부하는 집을 열도록 허용했고 이것이 유다인들에게 큰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흩어진 이스라엘은 그 율법을 중심으로 뭉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갈등의 요소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제2차 항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하드리아누스가 할례를 금지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아니면 그가 예루살렘 폐허에 새 도시를 짓고 성전 자리에 유피테르 신전을 세우려 했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항쟁의 지도자는 바르 코시바였는데, 랍비 아키바가 그를 민수기 24장 17절에 예언된 메시아라고 하였기 때문에 ‘바르 코크바’(별의 아들)가 그의 별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반란은 로마인들에게 진압되었고 바르 코크바는 전사하였으며 랍비 아키바는 로마인들에게 처형되었습니다. 제2차 항쟁에서는 약 85만 명의 유다인들이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에 유다인들은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고, 땅을 빼앗기고 완전히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팔레스티나 땅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끝을 맺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역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헤로데 대왕 때에 태어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총독 때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나자렛 예수님께서 신약의 역사를 시작하시기 때문입니다.

 

[평화신문, 2016년 5월 22일, 안소근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은 이번 호로 마칩니다. 집필해 주신 안 수녀님과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호부터는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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