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해에 읽는 구약성경] 아람 장수 나아만과 엘리사의 종 게하지 요즘 신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우리 사회에는 배금주의 풍조가 강해졌다. 사람과 생태계의 존재는 투명해지고, 금전이 그 자리를 메우게 되었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려면 재산을 최대한 지켜야 하므로 나눔의 기쁨을 줄여버렸다. 먼저 베풀거나 나누는 사람을 호구로 여기게 되었을 정도로 말이다. 이런 세태 변화를 관찰하며 생각해 본다. ‘과연 내 것만 챙기고 살면 행복해질까?’ 저마다 행복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복은 베풀수록 더 크게 돌아온다.”는 속담을 거듭 확인하는 것 같다. 성경도 같은 이치로 세상을 보게 해주는데, 그 대표적 예가 바로 아람 장수 나아만이다. 2열왕 5장에는 나아만과 엘리사의 종 게하지에 얽힌 이야기가 나온다. 나아만은 아람 장수니 이방인이고, 게하지는 히브리인이었다. 그런데 결말을 보면 나아만은 병을 치유받아 새 육체를 얻은 반면에, 게하지는 히브리인이었지만 나아만의 병이 옮게 되어 부정해진다. 우리는 흔히 나아만이 치유받았다는 사실에만 집중하고, 그가 왜 그런 은총을 누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처럼 하느님의 자비를 입기에 충분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꼼꼼하게 읽어보면, 나아만이 어떤 인품의 소유자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방인이면서도 하느님을 만나게 된 나아만의 사연은, 주님께서 마침내 이스라엘을 넘어 세상 만민의 하느님이 되실 것을 예고해 준다. 아람 장수 나아만 나아만은 아람 임금을 옆에서 모시는 직급이 높은 장수였다. 사실은 하느님께서 승리를 가져다 주시어 그가 높은 위치에 오른 것이었지만(1절), 정작 본인은 복의 원천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지위는 높았지만, 나병환자였다. 나아만은 바로 이 병이 치유되는 사건을 계기로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15절). 그에게 은총의 서막을 열어준 이는 이스라엘에서 잡혀온 소녀였다. 그 소녀가 나아만의 병을 안타깝게 여겨, 사마리아에 사는 한 예언자가 그를 도와줄 수 있으리라고 조언해 주었다(3절). 자기를 생포한 이에게, 곧 제 민족의 적인 아람의 장수에게 충언을 해주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포로가 이방인 주인을 걱정한다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 주인이 적국에서 잡아온 종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녀가 붙임성 있는 성격이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나아만이 그만큼 선량하고 덕 있는 사람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소녀의 조언을 듣고 나아만은 이스라엘 임금을 찾아간다. 이스라엘 임금은 아람 임금이 나아만을 보낸 이유가 자신과 싸우려는 줄 알고 옷을 찢으며 분노했다(7절). 엘리사가 임금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어 나아만이 방문한 목적을 밝혀주었을 때에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그 뒤 나아만은 엘리사의 집으로 찾아갔는데, 그가 행차했을 때의 광경을 한번 떠올려보자. 당시 아람은 이스라엘을 꺾은 나라가 아니었던가? 더욱이 나아만은 임금을 보필하는 장수였다. 그러니 그 행차가 얼마나 위풍당당했을지 상상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가 준비해 온 은 열 탈렌트와 금 육천 세켈, 예복 열 벌도 대단한 선물 보따리였다. 나아만이 관대하고 후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그가 가져온 선물에서도 드러난다. 수행원의 숫자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당연히 구경하러 나왔을테고, 엘리사도 당장 나가서 나아만을 맞이해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엘리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나아만의 상처를 직접 살펴보거나 치유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심부름꾼을 보내 말을 전하게 했다. 요르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담그라고 말이다. 나아만은 내심 엘리사가 자기에게 직접 손을 대고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호소해 줄 거라고 기대했을텐데(11절), 그렇지 않은 엘리사의 태도와 요르단 강의 보잘것없는 모습이 못마땅하였다. 나아만이 실망하여 화를 내자, 부하들은 손해될 것 없으니 엘리사의 말대로 시도라도 해보시라고 권한다(13절).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부하들이 나아만을 미워했다면, 과연 이런 충언을 해주었을까? 나아만이 이스라엘 소녀의 마음을 산 것처럼 부하들의 마음도 얻었기에, 그들이 충성을 다하였을 것이다. 곧, 부하를 아끼는 마음이 복이 되어 그에게 되돌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나아만은 우연히 치유의 은총을 누린 것이 아니었다. 예로부터 천하를 얻으려면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베푼 만큼 돌아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내 것만 챙기는 이기적인 마음으로는 결코 타인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민족과 나라를 초월한 은총 나아만의 치유 사건을 통해 하느님의 은총은 더 이상 히브리 민족에게만 한정되지 않게 되었다(루카 4,27 참조 :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이 사건은 주님의 은총이 세상 만민에게 닿으리라는 예고가 된다. 구제받은 나아만은 이제부터 하느님께만 제물을 바치겠다고 맹세하면서 흙 두 가마니를 달라고 청한다. 언뜻 이상해 보일 수 있는 요청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스라엘 땅에서만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섬길 수 있다고 믿었다(여호 22,10; 1사무 26,19; 시편 137,4 등 참조). 그래서 나아만도 이스라엘의 흙을 얻어가야 했던 것이다. 이방 땅은 우상숭배로 더럽혀진 곳이라, 주님을 섬기기에 적당하지 않았다(아모 7,17; 호세 9,3-5 참조). 게다가 고대인들은 나라마다 다스리는 주신이 각기 다르다고 믿었다. 모압은 크모스 신(민수 21,29; 1열왕 11,7 참조)이, 암몬은 밀콤 신이 다스린다고 믿는 식이다(예레 49,1 참조). 그러다가 나아만 사건을 통해 주님이 이스라엘 땅에만 한정된 하느님이 아니라, 온 세상에 능력을 펼칠 수 있는 분이라는 점을 조금씩 보여주었던 것이다. 엘리사와 헤어지기 전 나아만은 마지막으로 아람 임금이 림몬 신전에 갈 때 모시고 가서 자신도 함께 예배해야 한다며 주님의 용서를 구한다(2열왕 5,18). 엘리사는 “안심하고 가십시오.”라는 말로 그에게서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따르는 신앙의 관습을 타인에게 무조건 강제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기독교인이라서 제사 음식을 만들 수 없다거나 제사상에 절하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다는 일부 종교인의 강경한 태도를 돌아보게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가정이나 나라에 종교 갈등으로 불화가 생기는 걸 원하지 않으심을 이 일화가 귀띔해 주기 때문이다. 나아만의 병이 옮은 게하지 게하지는 엘리사를 돕던 종이었다. 엘리사는 자신이 매개가 되어 일어난 이 치유 기적에 대해 대가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본인의 공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신 일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게하지는 이방인에 불과한 나아만에게 주인이 너무 관대하다고 여긴 듯하다. 자기와 엘리사는 선민이고 나아만은 부정한 이방인이니, 나아만이 무상으로 은총을 누리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요나 예언자도 자신이 이방 성읍 니네베로 파견된 걸 알자 처음에는 소명을 피해서 도망가지 않았던가(요나 1,2-3 참조). 바다로 나갔다가 결국 물고기 밥이 되고 말았다(요나 2장). 여기서 게하지도 비슷한 행동을 한다. 엘리사 몰래 나아만을 쫓아가서 선물을 되찾아온 것이다(2열왕 5,20-22 참조). 자신이 선민이라고 믿는 ‘자신만만’ 병에 걸려있어, 분별력을 잃은 듯하다. 그리고 그 모자란 행위 탓에 나아만에게 일어난 신성한 기적이 대가나 바라는 싸구려 마법으로 전락해 버린 셈이다. 나아만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해도 말이다. 이에 엘리사는 지금이 그럴 때냐며 게하지를 무섭게 꾸짖은 다음, 나아만의 병을 옮게 했다(26-27절). 게하지가 나아만의 병을 대신 앓으며, 자신이 섬기는 하느님에 대해 좀 더 배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만의 나병은 한센병이었나 나아만과 게하지는 나병에 걸렸는데도 격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병은 우리가 아는 나병과는 조금 다른 종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나아만이 아람 궁전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그가 한센병이 아닌 다른 피부질환을 앓고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우리말 성경에서 ‘나병’으로 옮긴 히브리어 ‘짜라앗’은 건선과 백반을 비롯해 악성 피부병을 망라하는 개념이었다. 옷이나 건물에 피는 곰팡이도 포함했다. 사실 신체의 일부가 문드러지거나 떨어져 나가는 한센병은 구약성경에 등장한 예가 없다. 이제껏 출토된 구약시대 사람의 뼈에서도 한센병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미르얌이 모세를 비방하다가 벌로 받은 악성 피부병(민수 12장)이나, 게하지가 옮은 피부병도 한센병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병을 앓았다는 우찌야 임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2역대 26,19-21). 베푼 만큼 거두리라 나아만은 요르단 강에 몸을 담근 뒤 치유의 복을 누려, 어린아이처럼 살이 깨끗해졌다(14절). 이 기적은, 그가 주변인에게 베풀어온 자비와 덕이 은총이 되어 그에게 되돌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나아만도 자신이 아람 장수라며 자존심을 세웠을 때는 엘리사를 만날 수 없었다(9-10절 참조). 새 육신과 깨달음을 얻고 겸손해진 뒤에야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를 대면할 수 있었다(15절). 나아만의 치유 사건은 옛 자아를 벗고 새로운 자아로 태어나게 하는 세례성사에 대한 예표가 된다. 그리고 자존심에 의지하지 않고 겸손해질 줄 알아야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해준다. 경제 가치만 최고로 알고 나눔의 기쁨을 잃어버리면, 마음이 병든 자가 된다. 나와 내 가족만 괜찮으면 웬만한 자극을 받아도,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도, 별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더 나아가 나랑 상관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자비는 쓸데없다고 여기는 게하지처럼 되어버린다. 바로 이런 현상을 두고 엘리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지도 모른다. ‘지금이 그럴 때냐?’ * 김명숙 소피아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에서 구약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6년 7월호, 글 · 사진 김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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