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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바오로 영성의 주제들: 신비가 바오로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6-09-16 조회수5,731 추천수1

[바오로 영성의 주제들] ‘신비가’ 바오로

 

 

“제삼천년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남는 사람은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신비가일 것입니다”(마르티니 추기경). 제 인생에 깊은 영향을 끼친 ‘씨앗 말씀’입니다.

 

지난 호에서 ‘사도’ 바오로의 모습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이번 호에는 이 주제를 더욱 심화하고자 ‘신비가’ 바오로의 모습에 대해 성찰하겠습니다. 바오로는 사도이자 신비가입니다. 이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바오로 신비주의의 특성

 

오래전 종교학 시간에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에 대해 배운 적이 있습니다. 신비주의는 넓은 의미로 “영혼이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일치(또는 접촉)를 갈망하는 종교성의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일치의 구체적인 실재는 종교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소개됩니다. 이름도 잊어버린 유교 경전에 “날마다 거울을 닦듯이 자신을 닦는다.”라는 표현을 보면서 그리스도교 신비가인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정화와 아주 비슷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신비주의(Mysticism)는 종교학자만이 아니라 바오로의 영성, 곧 바오로가 살아낸 신앙 체험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주제입니다. 1930년에 슈바이처 박사가 「바오로 사도의 신비주의(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라는 두꺼운 책을 쓴 이래 바오로의 신비주의에 대한 연구는 지금도 계속해서 심화되고 있습니다.

 

바오로의 신비주의는 우주적인 존재 또는 초자연적 존재와 접촉을 시도하는 종류의 신비주의와는 다른 유형의 신비주의입니다.

 

바오로 신비주의의 두드러진 특징은 마술적인 예식이나 주문이 아니라 하느님이자 인간이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신비주의, 그리스도 신비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의 종교 체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오로를 ‘신비가’로 여긴다는 것은, 이 땅 위에서 사셨으며 무엇보다도 수난과 죽음을 겪으시고 하느님의 힘으로 부활하시어 이제는 하느님 오른편에 영적인 존재로서 앉아계시는 한 인격을 알고 그분과 신비롭게 결합한 사람으로서 바오로를 바라본다는 것을 뜻합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교 신학자일 뿐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열렬한 제자였습니다(갈라 2,19-20; 필리 1,21; 콜로 3,4).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일치는 바오로 같은 인물에게만 해당하는 특권이거나 특별히 소수의 사람이 은총으로 받는 귀한 선물이 아니라 세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이기도 합니다.

 

 

‘신비’의 의미

 

바오로는 자신의 개인적인 종교 체험을 자신의 서간들에서 자주 말하지 않습니다. 서간들이 대부분 공동체 문제들에 대해 사목자로서 답변하고자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바오로가 보기에는 특별한 외적 종교 체험보다는 일상에서 맺는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에서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바오로 서간에서 바오로가 자신을 신비가로 부르거나 “내 신비체험이 이런 것이에요.”라고 말하는 구절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바오로는 서간에서 ‘신비’라는 말을 여러 가지 용례로 사용합니다(로마 16,25; 1코린 2,1.7; 콜로 1,26.27; 2,2; 4,3-4; 에페 1,9; 3,3-5.9; 5,32; 6,19 참조). 그 용례를 요약해서 종합하면 이 ‘신비’라는 용어는 어떤 은밀한 것, 하느님의 계획에 숨겨진 미래의 어떤 사건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지금, 여기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은총의 충만한 자비에 대한 묘사와 자주 연결됩니다.

 

이렇게 바오로가 ‘신비’라는 용어를 특유하게 사용하기 때문에 신비와 관련된 용어만 가지고는 바오로의 신비주의의 특징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오로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맺는 신비스러운 일치에 대해 다양하게 표현한 것에 주목하는 것이 우리 주제에 더욱 도움이 됩니다.

 

두 가지 표현이 중요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표현입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또는 “주님 안에서”라고 말합니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첫 번째 표현은 “그리스도 안에”입니다. 이 표현은 부활하시어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신비로운 결합, 완전히 변형된 새로운 삶을 의미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5,17).

 

바오로는 같은 체험을 필리피서에서도 말합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3,7-9).

 

바오로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향 아래에서, 그분 인격의 힘의 영역 안에서 변화되며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통해 당신과 친교를 맺는 삶으로 들어가는 모든 사람에게 끊임없이 영향력을 행사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와의 일치 때문에 새로운 삶으로 이전됩니다. 새로운 존재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덕분에, 이전에 우리 마음에 떠오르지 않았거나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은총을 많이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을 위해 사는 사람, 거룩한 사람, 성화된 사람, 빛과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에페 3,12). 영원한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로마 8,1 참조), 율법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갈라 4,4 참조), 부활에 대한 확신을 하는 사람(1코린 15,22)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나누는 친교와 일치는 삶의 자세로도 표현됩니다. 곧, 기뻐하는 것, 어떤 상황에서든지 용기와 신뢰를 이끌어내는 것, 가르침과 타이름을 잘 받아들이는 것, 늘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일하는 것,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속하여 지체로서 살아가는 것, 같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환대하고 격려하는 것 등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

 

두 번째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한 인간 안에 사시면 윤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늘 심오한 결과를 낳습니다. 아마도 바오로가 신비가라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도 부정할 수 없는 바오로의 구절은 갈라 2,19-20일 것입니다. 여기서 바오로가 묘사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 자신이 사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몸째 그리되었는지 몸을 떠나 그리되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셋째 하늘까지 들어 올려져 발설할 수 없는 말씀을 들었던 사람(2코린 12,1-4 참조)처럼 주님에 대한 환시나 계시를 본 사람의 특별한 체험을 암시하지 않습니다.

 

죽음 뒤나 몸의 부활 뒤의 미래의 삶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삶은 현세의 상황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것은 더는 인간적 인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주신 인간을 보시는 하느님의 시선 아래서의 삶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분은 지금 부활하신 분으로서 우리 안에서 당신 삶을 계속 살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바오로의 사도생활을 지배하는 주체입니다. 사도의 영혼 전체와 지성, 감정, 의지가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있기에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현존과 활동에 대한 의식도 깊어집니다. 바오로의 논리에 따르면, 세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새 피조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사람만이 새 피조물이 될 수 있습니다.

 

 

세례는 시작이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와 신비로운 관계의 시작으로서 세례를 강조합니다. 1코린 10,1-13에서 이 진리를 효과적으로 소개합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사실도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 조상들은 모두 구름 아래 있었으며 모두 바다를 건넜습니다.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는 코린토인들에게 세례성사를 받은 것만으로는 구원의 완성에 도달하는 것을 보증하지 않는다는 것을 사막에서 살았던 세대의 운명을 통해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세례를 받았고 천상 음식을 맛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느님께 거부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 대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그들은 광야에서 죽어 널브러졌습니다”(1코린 10,5).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한 벌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하나의 모범으로 가르치려고 성경 안에서 우리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로 시작된 그리스도와의 친교와 일치의 삶이 우리의 태만과 게으름 때문에 결실을 보지 못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작은 천국

 

그리스도와 친교를 나누고 그분과 일치하는 삶, 바오로의 신비가로서의 삶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가치가 있습니다. 바오로가 제시하는 믿음의 신비주의, 그리스도 신비주의의 여정은 많은 성인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자신을 ‘바오로의 제자’로 여기고 바오로가 말한 대로 산 가르멜회 소속 삼위일체의 엘리사벳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자신을 그분의 성전으로 삼고, 그 안에 사시는 하느님을 생각해 보세요. 이것은 바오로 사도가 말하기에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혼은 조금씩 그분과 다정스럽게 살아가게 되고, 자기 안에 사랑의 하느님께서 거처하시기로 정해진 작은 천국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면 영혼은 하느님의 공기 안에서 호흡하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 임숙희 레지나 - 엔아르케성경삶연구소 대표이며, 대전가톨릭대학교 부설 혼인과 가정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성서학 석사학위를,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영성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6년 9월호, 글 임숙희 · 그림 서소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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